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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서해

교동도, 역사의 한(恨) 서린 강화 서북단 섬, 북한 땅이 지척에 ~

by 혜강(惠江) 2009. 6. 9.

 

강화 교동도·

 

역사의 한(恨) 서린 강화 서북단 섬

 - 철조망 너머 지척에 북쪽의 연백평야가 ~

 

 

·사진 남상학

 

 

 

 

교동도로 들어가는 관문, 교동대교

 

  화 교동도(喬桐島)는 실향민들의 땅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황해도 연백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 가던 섬이었다. “전쟁 끝나면 돌아가려고 잠시 머물다”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해로 흘러가는 곳. 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고 물길로 분단을 가르고 있지만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여기 강화의 교동도에 와서는 하나로 흐른다.

 

 교동도는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만나는 삼각주로 발달한 섬으로, 강화도 북서쪽 4㎞ 지점 한강줄기가 황해로 이어지는 곳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며, 면적 47.15㎢, 해안선길이는 35.97㎞에 달한다.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동북쪽으로 개풍군과는 8.5km, 서북쪽으로 연백군과는 3.0km 거리로 상당히 가깝다. 남북분단 이전에는 이곳 교동도와 연백은 생활권이 같기 때문에 왕래가 잦았다. 

 

 

 

빨간 색 부분이 교동도,북한 연백평야와 마주하고 있다.

 


 교동은 원래 고림(高林)이라고 불러오다가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이라고 부르고 군태수를 두었다가 고려 명종 때 현감무(縣監務)를 두었다. 교동은 옛날 중국을 오가는 바다 길목에 있어 대부분의 배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그러나 남북 분단 후 지금은 교동도 북단 해역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한의 연백군과 마주하고 있다.서울에서 지척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를 뚫어야만 했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어쩔 수 없이 고립되었 땅이다. 따라서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또한 교동도는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왕족들의  유배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교동도에는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던 연산군이 유배당해 이곳  교동도에서 죽었다. 또 교동도는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의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화개산 서쪽에 고인돌이나 석기시대의 유물들(마제석검), 조개맨돌과 같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로부터 인간이 모여 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데, 섬마을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포장된 도로변에는 논들이 넓게 누워있다.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고, 수량이 풍부한 난정저수지, 고구저수지가 있어 가뭄에 관계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간척지의 쌀이 명성이 좋듯이 교동도 쌀 역시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특산물로는 질 좋은 쌀, 화문석, 완초제품, 새우젓이 유명하다.

 

  한편 근해에서는 좋은 산란장을 이루어 산란기에 난류성 어족이 많이 몰려든다.  도미·농어·숭어·흰새우·낙지 등이 잡히고, 개펄에서 굴이 채취된다. 그러나 외지인들은 사계절 언제든지 낚시할 수 있는 고구저수지를 찾는다. 참붕어, 잉어, 가물치 등 공해 없는 다양한 어종을 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넓은 교동평야와 여기서 생산되는 '강화 교동섬 쌀'

 

 

  교동도는 ‘달우물’ 쓴물도 유명하다. 북녘 연백온천의 수맥이 이어진 것으로, 우물을 파보니 먹기 힘든 쓴물이 나왔다고 한다. 바닷물이 유입된 ‘짠물’이 아닌 칼슘 성분이 풍부한 광천수다. 교동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옛 교동교회 바로 밑에서 이 '신비의 물'이 솟는다. 아토피성 질환 등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에 이용객이 줄을 잇는다. 

 

  요즘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은 해발 259.5m의 화개산 등산을 비롯하여 60~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풍물시장, 역사기행으로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와 이별의 한을 달래기 위해 망향대 등을 찾는다. 특히 걷기 열풍을 타고 강화 나들길 9~10코스를 걷기 위해 찾아온다.

 

 

강화나들길 9, 10코스가 교동도를 걷는 길이다.

 

 

♧월선포구 둘러보기

 

  교동대교를 건너면 월선포구이다. 월선포는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교동도와 강화도를 오가는 연락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재차 방문하는 사람은 강화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갈매기와 함께 건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온다. 그러나 걷기를 위해 교동도에 오는 사람은 월선포가 걷기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찾아온다. 또한 월선포구는 강화도 전망 포인트로서 교동대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낚시꾼들도 찾아온다. 본도에서 오는 연락선은 끊겼으나 매표소, 카페 등은 그대로 있어 향수를 자극한다.

 

  월선포구에서는 여행 코스를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길이 좌우로 나뉜다. 초보 여행자라면 일단 교동남로 20-1번지에 있는 제비집으로 가는 게 좋다. 교동도 역사를 익히고 여행계획을 짜는데 큰 도움을 주는 곳이다. 제비집은 교동8경 감상, 가상현실 영상체험, 신문 만들기, 카페와 전시관, 자전거 대여 등 여행객들을 안내해준다. 관광플랫폼이자 여행자가 교동도 여행코스를 잡는데 큰 도움을 준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10코스가 만들어졌다. 월선포에서 화개사·화개산·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 등을 잇는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16㎞·6시간 소요)를 걷는 이들이 많다.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 길·17.2㎞·6시간 소요)는 난정저수지·한증막·수정산·머르메 등을 거친다.

 

 

백길이 끊긴 월선포구는 이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센트럴카페'만 남아 추억을 찾아 방문하는 손님을 맞고 있다.

 

♧영화 세트 같은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교동면 중심지에 있는 교동도 유일의 시장이다.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 따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실향민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터전인 것이다. 500여m밖에 안 되는 좁은 골목엔 극장, 교동이발관·중앙신발·동산약방·교동철물·교동다방 등 없는 것이 없다. 전통 주전부리를 할 수도 있다. 몇년 전에 비해 일부 간판이 깨끗해지고 골목에 벽화들도 그려졌지만, 대체로 오래된 시장골목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영화·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는 곳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마치 1960~19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세트장 같은 시장 골목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어린 시절 ‘골목길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젊은 이들은 호기심으로 찾아와 신기한듯 카메라와 셀카봉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다. 낮은 집 추녀에 지은 제비집, 상점의 검정고무신 등도 신기한 볼거리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사진 촬영 때 서로 배려가 필요하다. 대룡시장이 인기관광지가 되면서 시장사람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 것은 근접촬영 때문이다. 우선 구경만 하지 말고, 이것저것 길거리 음식 등을 열심히 사 먹자. 시장 음식을 군것질하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꼭 찍고 싶은 사진이 필요하면 양해를 구하는 저세가 필요하다.    

 

 

 

 

♧ 화개산 등정, 북한 땅 조망 

 

 

  대룡시장을 둘러보았다면 화개산을 올라본다.  화개산은 해발 260m의 산으로 넉넉히 2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 있어 가벼운 기분으로 오를 수 있다. 화개산 들머리는 교동면사무소(032-932-5002~3) 뒤 대촌마을이다. 수령 500여 년이 되는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 대촌마을 마지막 왼쪽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을 시작하여 20∼30분이면 8부 능선에 있는 내성의 우물로 추정되는 화개약수와 효자자리를 볼 수 있다. 화개약수는 화개산성 안에 있는 샘물로 전에는 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유일한 식수였는데, 지금도 산행할 때  갈증을 풀 수 있다.  효자자리는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예부터 전해오는 효자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화개산에는 석성(石城)인 화개산성이 있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왜란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내성과 외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창고를 두었다고 하는 성터가 산줄기 및 정상부분까지 훼손된 상태이지만 그대로 남아 있다. 몇 차례 개축하였으나 지금은 다만 내성만이 남아 있다. 주위 길이는 약 2km, 높이는 5m의 석성으로 고구리와 상룡리로 이어진다. 

 

  정상까지는 45분 걸린다. 정상은 교동도의 사면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실향민들이 찾아와 북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곳이다. 폭이 3㎞ 남짓이라는 물길 건너편이 아픔의 땅, 연백군이다.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도 보인다. 황해도 연백평야는 강화도만큼이나 가깝다. 드넓은 들판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부시고, 태양 가득 담은 바다의 빛에 또 다시 눈이 시려온다. 북녘땅을 살필 수 있는 망원경이 아니더라도 북한지역 마을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에 강화도, 남쪽에 석모도, 서쪽으로는 말도, 불음도, 주문도 등이 있다. 조용한 호수 같은 바다에 점점이 보석처럼 섬들이 떠있다. 

 

  하산길은 봉수대 쪽이다. 정상 바로 밑에서 선사시대 신앙의 흔적인 암각(성혈과 선각)을 본 뒤,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50m 떨어진 연봉 정상에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대 거쳐 바윗길을 한동안 내려오면 길이 완만해지고, 곧 화개사로 내려서게 된다.

 

  화개사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하였다. 유물은 부도 1기가 있으며, 절 뒤에는 문무정이 있으며, 절 오른쪽에는 불두화가 있다. 규모는 작지만, 고려시대의 학자 목은 이색이 머물며 공부했다는 유서 깊은 절이다. 여기서 산자락을 따라 면사무소까지 이어진 1.5㎞ 길이의 산길을 걸어볼 만하다. 두 명의 비구니 스님이 산다는데, 댓돌 위에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다. 이토록 고즈넉한 절이 있을까?

 

 

화개약수
효자묘
화개산 석성
화개산 정상 표지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방향인 미법도, 서검도, 석모도 방향
정상에서 바라본 북녁땅 방향
정상 부근의 사불감시초소와 팔각정
화개산 봉수대
화개사, 보호수 노송이 사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화개사 샘물

 

 

♧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향교

 

   향교는 옛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유생과 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을 한 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243개의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문선공 안유(安裕) 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孔子像)을 들여와 이 문묘에 봉안한 유서 깊은 향교다. 이어 다시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 유학성현들의 화상 10여점과 제기 등을 구해 오게 했다. 이후 경향 각지에 문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으로 이뤄졌다. 홍살문을 통과하여 외삼문을 통하여 향교 건물로 들어가면 서무, 동무가 있다. 동무는 9간이며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등 우리나라 구현을 봉안하고 배향한다. 서무 역시 9간이며 초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흔, 좋헌, 송시열, 박세체등 우리나라 구현을 봉안 배하는 곳이다.

 

  10간(十間)으로 되어 있는 대성전(大成殿)에는 중국의 5성과 정자, 주자,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2월과 8일 초정(初丁)에 석전을 그리고 매월 삭망(朔望)에 분향례를 올린다. 명륜당(明倫堂)은 6간이며 향교의 2대 기능(二大機能) 중 하나인 현대로 말하면 공립학교와 같은 유학 교육을 시켰던 곳으로 유생들이 사서오경을 공부하고 강독하며 초시 준비와 향음 주례 및 각종 행사를 하던 곳이다.

 

  내삼문의 우측 아래에 버려지다시피 세워져 있는 노룡암(老龍巖)에 더 정겨운 눈길이 갔다. 어디로 굴러다니느라 돌에 새겨진 글자가 절반이나 떨어져 나갔다. 노룡암은 교동현 동헌 북쪽들 층계 아래 있었다. 위에는 넓은 울창한 숲 속에 늙은 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측단이 있었다. 숙종 43(1717) 충민공 이봉상이 "노령암" 이라고 쓰고, 그 후 57년 (1773)에 그의 손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는데, 1897년 교동 향교로 옮겨놓았다.

 

  우리 조상들은 조그만 돌 하나에도 미의식을 느껴 이미지를 부여하고 대대에 걸쳐 귀중히 보관했는데 지금 그 후손들은 석상에다 사격연습, 성벽돌로 방공호 쌓기, 비석으로 댓돌놓기 등 민통선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부 같은 짓을 했으니 부서진 노룡암을 대하기가 면구스러웠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으나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문이 열려 있으므로 내부를 관람하고 싶으면 날짜를 맞춰 가면 가능하다.

 

 

홍살문으로 걸어들어오는 일행
대성전
노룡암, 글씨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 강화도 비석군(碑石群)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립되었다는 교동도의 자랑인 화개산자락의 향교를 찾았다. 향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과거 교동도에 뒹굴고 있던 서른 개 남짓의 비석이 수습되어 한곳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들은 쓰러지고 훼손되어 멸실될 우려가 있어서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남산포 길옆에 이전하였다가 1991년 다시 향교입구로 옮긴 것이다. 39기 대부분이 겸부사(兼府使)의 선정비(善政碑)인데 이 가운데에는 거사대(去思臺)라는 특별한 양식의 비가 3기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고을원의 선정을 영원토록 잊지 못한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동도는 연산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의 유배지가 될 만큼 외진 곳이었고, 부임한 원들은 한결같이 여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주민들을 쥐어짜서 한양으로 뇌물을 올렸다고 하니, 이 많은 비석들은 위정자들의 가렴주구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의미의 영세불망비란말인가.

 

 

교동도 읍내리의 비석군

 

♧ 성문 하나만 남은 교동읍성 

 

   교동도는 중국으로 오가는 바다 길목에 있어 대부분 배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당시 지금으로 말하면 시청격인 도호부가 설치됐을 정도로 지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당시의 현터나 읍성이 아직 그 자취가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때(1629년) 쌓은 성으로, 읍성은 둘레가 약 305m, 높이가 약 2.4m이며, 용성 3곳과 치첩 네 곳이 있었다. 동문의 문루는 통삼루, 북문의 문루는 공북루, 남문의 문루는 유량루였다. 오랜 동안에 걸쳐 폭풍우로 무너져 지금은 남문(유량루)의 홍예(무지개 다리) 석문 부분과 좌우 일부 석축이 남아 있다. 무너져내린 남문을 지키는 건, 빗돌을 고 있었던 듯 등에 홈이 파인 수수한 모습의 돌거북 하나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교동부지로 돌로 쌓은 계단 24개가 남아있어 3도(경기. 황해. 충청)수군 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다운 규모를 엿 볼 수 있다. 또 이곳에는 안해루 누각인 2m 가량의 돌기둥 4개가 남아 있으나 2개는 교동 초등학교 교문기둥으로 사용하다가 운동장 한켠에 놓여 있다.

 

 

교동읍성의 남문인 유량루
교동부지에는 돌기둥만이 서 있다.

 

 

♧ 밭으로 변한 연산군 적거지

 

 

  읍성의 문루에서 교동부지의 돌기둥이 있는 곳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연산군 적거지'라고 새긴 자그마한 화강암 비가 세워져 있다. '연산군적거지(謫居地)'란 연산군이 귀양살이를 한 곳이라는 뜻이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으나, 현재 밭으로 변해 버린 집터에 덩그러니 돌비만 서 있다.

 

  처음 세운 표석은 '적거지'라 하지 않고 '잠저지(潛邸地)'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잠저(潛邸)'란 임금이 되기 전 시기에 살던 곳을 말하는데, 연산군은 귀양살이했으므로 '잠저지'가 아닌 '적거지'라고 함이 옳다. 잘못된 표기를 바로잡아 뒤에 '연산군적거지'로 바로 잡았다.

 

   옛날에 교동은 연산군·안평대군 등 왕족의 유배지였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었다. 표지석 아래에는 연산군이 길어 마셨다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 속에서 자란 오동나무가 고사목이 되어 베어진 채로 남아 있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1494~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즉위 초에는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되어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마침내 중종반정으로 폐위, 군으로 강등되어 교동의 초옥으로 유배되었다가 두 달만에  병사했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또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 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 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연산군적거지 표지석
저음에는 연산군잠저지로 잘못 표기되었다.
연산군이 길어마셨다는 우물로 추정되는 곳, 지금은 오동마무가 자라 고사목인 자리에 철저망을 쳐 두었다.

 

 

 

♧ 연산군 유배지에 세운 교동도유배문화관

 

 

 연산군 적거지를 본 김에 교동도유배문화관도 들러보자. 교동도 연산골에는 2018년에 세운 교동도유배문화관이 있다. 이곳 골짜기에 ‘연산군유배지(위리안치)’ 비석만 덩그러니 세워져있었는데, 연산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집과 폐위된 연산군이 유배올 때 탔다는 함거를 재현해 놓았다. '위리안치'란 ,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함거'는 죄인을 호송하거나 맹수를 잡아 가두는 데 사용하던 우리처럼 만든 수레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보면, 중종반정(1506년)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4인이 메는 평교자(조선시대 종일품 이상이 타던 뚜껑 없는 가마)에 올라타 창덕궁을 나와 5일 만에 교동에 도착했다고 한다. 함거가 아닌 평교자를 탄 모습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강화와 교동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1000 년 동안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유배문화관 안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화와 교동에 유배된 왕과 왕족들에 대한 설명이 걸려있다. 고려 때는 희종ㆍ강종ㆍ충정왕ㆍ우왕ㆍ창왕이, 조선시대에는 광해군ㆍ안평대군ㆍ영창대군과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특히 이 골짜기는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는데, 골짜기 지명이 연산골이고, 주민들의 말을 들어볼 때 이곳에 연산군이 유배돼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과 가까운 섬이기에 감시와 격리가 쉬웠기 때문이다. 고려의 희종과 강종, 충정왕, 우왕, 창왕이, 조선의 광해군, 안평대군, 영창대군,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는 사화(士禍)를 일으키며 폭정을 일삼던 조선 10대 왕 연산군(1476∼1506)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교동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역질에 걸려 31살의 나이에 숨졌다. 연산군의 무덤은 부인인 폐비 신씨의 청에 따라 중종 7년에 경기도 양주(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연산군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만들어진 '교동도유배문화관'에서는 이런 왕족 유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연산군유배지 표지석과 교동도유배문화관(위), 유배자를 호송하는 함거 모형(아래)
교동도유배문화관 내의 전시물

 

 

♧ 실향의 아픔 서린 망향대, 아픔 속에 그리는 통일의 염원

 


  교동 북쪽해안의 언덕배기에 실향의 아픔이 서린 망향대가 있다. 여기에 서면 물길 건너 금단의 땅 개풍과 연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남북분단 이전에는 이곳 교동도와 연백은 생활권이 같기 때문에 왕래가 잦았다.  6.25 이후 분단이 되면서 이곳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 생겨났고, 1960년에 연백을 비롯한 황해도 주민들이 연백이 잘 보이는 이곳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인사리 망향대라 부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지석리다.

   2백 평 남짓한 공터에는 작고 조촐한 망향대가 세워져 있고, 한 쪽에는 ‘在以北 父祖之壇’이라고 쓴 비석이 허허하게 서 있다.  망향대에는 실행민의 애틋한 글이 새겨져 있다. 

 

 “천만 실향민! 우리가 얻은 38의 교훈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분단의 설음과 실향의 아픔을 우리 스스로가 서로 달래고 나누며 하나로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역사적 흐름을 우리 모두의 가슴깊이 심어 주었다. 이에 우리들 연안 출신 몇몇 동지들은 선배 여러분의 절대적 협조로 고난의 쓰라린 과거를 영광된 겨레의 역사로 되돌릴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곳에 망향대를 세운다. 보라! 저기 비봉의 뫼뿌리에 어머니의 자비로운 모습을, 형님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을 무릎 꿇고 엎드려 조상의 넋을 위로하고 영광된 겨레의 역사 창건에 온갖 힘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후손에게 이를 넘긴다.”


   휴전선 고지 여러 곳에 안보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예산을 들여 거창하게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비하면 이곳 망향대는 너무 초라하다. 하지만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강 건너 고향사람들끼리 마음을 모아 거창한 전망대가 아닌 조촐한 제단을 만들어 북쪽의 부모 형제들을 향해 미안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달래는 마음은 오히려 돋보인다. 

 

   지금은 섬을 떠나고 고인이 된 사람들도 많지만 대부분 교동사람들의 고향은 황해도 연안지방이다. 조상 대대로 기름진 연백평야에서 농사를 지었던 이들은 38선이 그어졌을 때에도 이남으로 편입되어 농토를 몰수당하지 않아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연안사람들 중에는 강을 건너와 교동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고, 교동사람도 연백평야의 토지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휴전협정으로 한강 하류가 휴전선이 되는 바람에 연안사람들은 자신들의 농토를 모두 잃게 되었다. 농토뿐만이 아니다. 징집을 피해 잠깐 남으로 몸을 피했던 아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이 되었고, 북에 남았던 부모 형제들은 문전옥답은 말할 것도 없고 남으로 간 자식도 잃었다.  

 

   고향이 지척이어서 연백평야 주변의 배천군 사람들과 용도·괘궁·호남·봉서·해성·송봉·목단·호동·봉북·연안면이 고향인 사람들 중에 명절날이나 조상들의 제삿날에는 이곳을 찾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차 그 수도 줄어들고 있다는 마을 사람의 얘기이고 보면 분단의 세월이 강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미 타계한 사람이나 죽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눈을 감겠다는 연백평야 사람들의 그리움과 한이 얼마나 절절한가는 오래전에 새겨놓은 ‘망향시’ 속에 아릿하게 담겨져 있다.

 

    와룡지 너른 들에 뜸북새 지새 울고

    북신당 맑은 샘물 솟구쳐 흐르는지
    그리움 구름 되어 비봉을 찾아드니 

    한 서린 안개 되어 눈앞을 가리누나.
    실향의 아픈 설움 정 되어 뭉쳤으니

    눈서리 내린 몸에 봄볕이 어리누나
    장군 얼 효자의 넋 면면히 이어내려

    의기는 충천하고 정열은 뜨거워라
    비봉아 나래 펴라 와룡아 눈 떠라

    우리 힘 모두 모아 귀향의 꿈 이룩하세

 

  이래저래 교동은 역사적으로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바다 건너 연백평야 일대가 고향인 실향민들에게는 강화도나 교동도가 유배지나 다름 아니다. 정쟁에서 패배해 유배당했다가 사약을 받은 실권자들의 한보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한이 더 처절하지 않겠는가.   

 

 

교동도 북쪽 해안에 세운 망향대와 비석, 망향시
망향대에서 바라본 북녁땅이 선명하다.

 

 

♧ 기독교 초기의 옛 교동교회와 '마라의 쓴물' 

 

 

 연산군의 유배지로 잘 알려져 있는 교동도는 기독교 유적지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교동도에 1899년 이미 복음이 전파됐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복음은 서울을 향해 전파되는 동시에 바닷길로도  전파됐다. 강화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권신일 부부가 교동도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해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동교회의 시작이다. 이 초가 예배당은  인천과 강화의 교인들이 모금한 헌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권신일의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2년 만에 10가정이 교회에 등록했고, 1907년에는 교동지역 교인만 1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후 교동교회는 1933년 상룡리로 예배당을 옮겼고, 해방 후 난정교회와 교동중앙교회를 분립시키며 성장했으나, 1979년 교인들의 분열로  교동제일교회로 나눠지고 말았다. 

 

 옛 교동교회는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예배당은 처음 지을 때 초가였던 지붕을 1970년대에 푸른색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다. 실내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돼 있고, 드리워진 커텐을 걷으니 햇빛이 잘 들어와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다. 예전부터 쓰던 오래된 풍금과 재봉틀을 변형해 만든 테이블도 운치 있다. 예배당 앞에 서 있는 종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 상룡리에는 교동교회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예배당 맞은 편에는 ‘마라 쓴물 온천장’이다. 교동교회 박용호 권사가 1991년 양어장을 만들 계획으로 시추했던 곳에서 뜨거운 온천이 쏟아져 나왔고, 그 물이 신경통과 관절염 환자에 효험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온천장으로 개발했다. 물맛이 짜고 써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라의 쓴물’(출 15:23)이라는 명칭을 1994년부터 사용했다.

  ‘마라 쓴물 온천장’은 2000년 강화본도의 창후리로 옮겨갔다. 교통이 불편하고 밀려오는 손님을 감당하기에는 이 곳의 시설이 너무 열악해서 창후리에 현대적 시설의 온천장을 새로 만든 것이다. 현재 교동도에 있는 원래 ‘마라 쓴물 온천장’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으며, 하루 한번씩 물만 길어 강화본도로 나르고 있다.

 

 

교동교회 외양과 내부 모습
'마라의 쓴물'을 실어나르는 차량이 교회 앞에 서 있다.

 

●여행정보 

 

 

가는 길

 

*자가용 :  인천시 강화군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40년동안 주민의 한이 풀렸다. 이로 인해 본도 창후리~교동면 월선포 선착장간 도선을 띄웠던 화개해운이 문을 닫았다. 교동대교는 본도인 양사면 인화리~교동면 봉소리간 3.44㎞에 폭 13.85m의 왕복 2차로의 교량이다. 교동도는 민통선 안쪽에 있으므로 군검문소의 신분 확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다. 밤 12시~새벽 4시엔 교동대교 출입이 통제된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대중교통 서울 신촌(현대백화점 앞·홍익대 앞 등)에서 3000번 버스가 강화시외버스터미널까지 10분 간격으로 다닌다. 영등포역 앞에선 88번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다닌다.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도까지는 18번 버스가 하루 10차례 다닌다.


 숙박 및 식사 : 숙박시설이나 음식점, 오락시설 등이 미비하다. 교동도에서 숙박하게 되는 경우에는 교동파크(032-932-4164 ,면사무소 소재지인 대룡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밖에 고구촌(고구리 낚시터 부근), 강화 여인숙, 낙원 여인숙(032-932-4071), 화개산펜션(010-8594-3024)이 있다.
식당은 삼호정(032-932-5272, 젓국갈비), 대풍옥(032-932-4030, 냉면·국밥),  와글와글(032-933-6882, 갈치조림 등), 소풍(032-934-2009, 백반·분식), 자연산고추장추어탕(032-934-8996,추어탕 등) 등이 있다.

 

여행 문의 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524, 강화터미널 관광안내소 (032)930-3515, 교동면사무소 (032)930-450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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