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보성 강골마을, 세월이 멈춘 그곳 ‘잃어버린 시간 여행’

by 혜강(惠江) 2009. 3. 13.

 

전남 보성 강골마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 

 

세월이 멈춘 그곳, 내게 돌아오라 손짓하네

 

 

 

박경일기자

 

 

 

 

▲ 강골마을 뒤편의 유려하게 휘어진 고샅길로 들면 빼어난 정취를 가진 정자 ‘열화정’을 만난다. 담 너머로는 대숲이 울창하고 담 안쪽으로는 300년이 훌쩍 넘은 아름드리 동백들이 하늘을 가린다. 이즈음 열화정에는 동백꽃이 만개해 정자 앞마당과 연못은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으로 가득하다.

 

 

전남 보성의 강골마을. 이곳은 시간이 멈춰진 곳입니다. 고색창연한 한옥과 돌담 골목, 바람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내는 대숲과 수백년을 자란 굵은 소나무…. 마을의 시간은 아마도 30∼40년 전쯤에서 멎은 듯합니다. 강골마을 수원댁 대청마루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처럼 말입니다. 길이 들어 자르르 윤기가 도는 툇마루에 올라앉은 흰 고무신이며, 나무를 때는 아궁이에 바람을 불어넣는 풍로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들국화와 댓잎을 넣어 곱게 바른 문창호지도 있고, 벽에 주르륵 자식이며 손자손녀들 사진을 걸어놓은 풍경도 있습니다.

강골마을이 특별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풍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공동체로서의 시골생활’이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는 빼어난 정취의 고택들로 즐비한 이른바 ‘전통마을’이 많습니다만, 대개 이런 곳들은 ‘박제된 과거의 공간’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깃들여 살고 있다고 해도, 삶은 공간과 잘 맞지 않는 옷처럼 겉돌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강골마을은 다릅니다. 이곳은 옛집도 좋지만 그보다 ‘삶의 내용’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마을의 휘어진 고샅길에는 늠름한 장닭이 활보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이 난 툇마루에서 노인들이 뒷산에서 갓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있습니다. 몇몇 노인은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마을회관으로 마실을 나갔고, 빈집에 혼자 남은 강아지 몇마리가 긴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봄 햇살을 즐기고 있습니다.

강골마을 사람들은 낯선 외지인들을 밥상 앞으로 불러들이는 것쯤은 예삿일입니다. 처음 본 외지인들의 옷소매를 끌고 앞장서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마을 구경을 시켜주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이 한솥 가득 팥칼국수를 끓여내면서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슬그머니 숟가락 몇개쯤을 더 놓기도 합니다.

이 마을을 찾는다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마을 사람들에게 안내를 청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런 원칙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생활을 기웃거리는 외지인들의 무례함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마저도 행여 외지사람들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들킬까 마음이 불편해할 것을 미리 헤아린 배려라는 것을….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주민들에게 안내를 청해보시지요.

주민들과 함께라면 바삐 스쳐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 1967년도 달력도, 손때가 묻은 일제강점기 영어단어장도, 바둑이와 영희가 등장하는 1970년대 교과서도, 툇마루 기둥에 덜렁 간디 사진 한장을 붙여놓은 빈집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끼니 때와 맞춘다면 냉이를 넣고 끓여낸 된장찌개와 싱싱한 상추로 막 무쳐낸 겉절이, 달달하게 조려낸 고추절임을 차려놓은 시골밥상에 끼어들 수도 있을 겁니다.

몇해 전인가 강골마을을 찾아왔던 도회지 주부가 안골댁(74)이 정성껏 말린 고추를 사갔던가 봅니다. 며칠 후 ‘맛있는 고추 참 잘 먹었다’며 고마움을 담은 편지 한장을 띄워보냈다네요. 그랬더니 안골댁은 몇달 동안 편지를 품 안에 간직하고, 마을회관에서 동네사람들이 모일 때면 어김없이 그 편지를 꺼내 자랑했답니다. 그 얘길 듣고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파릇파릇한 봄, 강골마을에 다녀오신다면 손 편지 한장을 띄워보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편지는 할머니의 품 안에서 귀퉁이가 닳을 때까지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택 뒤 고샅길 따라 사람 사는 온기가 ‘모락모락’

 

 

 

▲ 강골마을의 한가운데 들어선 광주 이씨 종택.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우물을 담 밖으로 내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우물과 종택을 가로막은 담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다. 종택의 어른들이 물을 길으러 온 마을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풀어내는 어려운 사정을 듣기 위한 것이다.

▲ 아치실댁의 대청에서 내다본 풍경. 강골마을의 한옥들은 어떤 문을 열든 굴뚝이나 장독대 등이 조형적으로 펼쳐지도록 해놓았다.

 

 

▲ 강골마을의 종택의 댓돌에 올려진 흰 고무신. 강골마을에서는 화려한 경치보다는 이런 잔잔한 생활 풍경이 눈길을 붙잡는다.

 

 

# 보성의 볼 것들을 지나쳐 강골마을을 찾아가는 길



전남 보성에서는 단연 차 밭이다. 조형적으로 심어진 차나무들이 구릉을 휘감는 풍경이나, 너른 차 밭 곳곳에 조형적으로 심어진 삼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5월 초순 연초록 새잎이 돋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사철 푸른 차 밭은 이즈음도 싱그러움이 넘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차 밭의 아름다움은 보성을 가린다. 관광객들은 보성에서 차 밭만 돌아보곤 휭하니 떠나지만, 보성의 매력이 차 밭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성을 좀 안다는 이들은 차 밭 외에 벌교의 꼬막을 떠올린다. 벌교의 여자만 갯벌에서 캐낸 참꼬막의 졸깃한 맛을 아는 사람은 안다. 더러는 보성 벌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다. 여기다가 보성은 판소리 서편제의 본향이다. 내로라하는 걸출한 소리꾼들이 보성에서 기예를 닦았고 소리를 배웠다. 이뿐일까. 보성에는 철쭉이 국내에서 가장 넓게 피어난다는 일림산이 있고, 백제유민이 도일한 곳으로 알려진 조성포구가 있다. 1억년 전의 공룡알 화석지가 발견된 득량면의 바닷가도 있다.

이렇듯 도처에 즐비한 볼 것들을 다 지나쳐 ‘강골마을’을 찾아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다가 넘실거려 ‘강골(江谷)’이란 이름이 붙여진 마을. 간척 이후 너른 예당 들을 넉넉히 바라보며 앉아 있는 마을이다. 가구 수 27가구에 주민수 50명 안팎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바다가 지척이지만 대대로 논을 갈아 살아온 강촌마을. 그러나 이렇듯 꼭꼭 숨어있는 마을에 근래 들어 하나 둘씩 외지인들이 찾아들고 있다. 이 마을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일까. 강골마을로의 여정은 그런 질문으로 시작됐다.

 

# 찬찬히 둘러봐야 진면목이 보이는 마을

슬쩍 지나쳐서는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 곳. 강골마을이 딱 그렇다. 강골마을은 광주 이씨들의 집성촌이다. 400여년에 걸친 시간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다. 솟을대문까지 갖춘 제법 규모 있는 종택을 비롯해 고색창연한 한옥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하지만 아흔아홉칸을 헤아리는 경북 안동 일대 세도가 종택의 당당한 위세에 견줄 바는 못 된다. 그저 단순히 ‘옛집’의 겉모습을 둘러보겠다면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강골마을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강골마을을 돌아보는 일은 잘 접어놓은 지도를 하나씩 펼치는 것같다. 하나씩 접은 면을 펼칠 때마다 과거의 시간과 공간들이 펼쳐진다. 강골마을에서 펼쳐지는 시간은 단절면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고택부터 식민지 시대를 건너 6·25전쟁과 새마을운동 무렵의 시간들이 첩첩이 포개져 있다.

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고택과 빼어난 누각도 있지만, 시멘트 기와를 얹은 해방 전후에 지어진 집들도 있고, 1970년대쯤 슬레이트로 지붕을 새로 얹은 집들도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시대에 지어진 집들은 튈 법하지만, 이곳에서는 희한하게도 서로 잘 어우러진다. 조선시대의 공간과 해방 전후의 공간 그리고 1970년대 무렵의 공간까지 마을 안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광주 이씨 종택인 감찰댁(이용욱 가옥)이 있다. 1835년에 지어진 고택으로 최근 문화재청이 대대적으로 보수한 탓에 사랑채나 중간채의 옛맛은 떨어지지만, 안채는 옛 풍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중간채부터 마당 그리고 안채로 이르는 공간을 순서대로 높여 놓아 안채 툇마루에 앉은 이의 시선에 중간채 기와지붕 위로 오봉산이 펼쳐지도록 해놓은 공간감각이 탄성을 자아낸다.

이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이 종택 담에 우물과 연결되도록 뚫어놓은 작은 구멍. 종택의 어른들은 이 구멍을 통해 물을 길으러 온 아낙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낙들은 우물에서 감히 어른들에게 여쭈지 못하는 누구누구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얘기부터 누구 집에 우환이 생겼다는 이야기까지 나누었겠고, 종택의 어른들은 이 구멍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터다. 당초 ‘큰 샘’이었던 이 우물에 주민들이 ‘소리샘’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비워져서 지켜낸 마을의 추억과 전통



차분차분 마을을 둘러보자면 하루해가 짧다. 초가로 지붕을 얹은 이식래 가옥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골의 옛집을 다시 찾은 듯한 느낌을 준다. 돌담 너머 집을 에워싸고 있는 울울창창한 대숲에다가 세월의 때가 묻은 흙담벽이며 불을 때는 아궁이, 가마솥, 장독대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렇게 고색창연한 한옥 외에 근대에 지어져 안주인의 택호로 불리는 집들도 옛 추억을 환기하는 풍경과 물건으로 가득하다. 들보의 상량문에 1937년에 지어졌다는 내력이 선명하게 씌어 있는 소촌댁. 이 집의 장손은 부엌 옆의 나무계단으로 오르는 다락방을 보여주곤 “6·25전쟁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인민군을 피해 여기 몸을 숨겼다”고 했다. 또 안채의 창문을 가리키며 “B26폭격기가 철로를 폭격했을 때 여기 앉아 있었는데, 유리창이 다 박살이 났었다”는 추억담도 들려줬다.

강골마을에서 이런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없는 집은 없다. 강골마을의 집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대숲길 속에 숨긴 듯 들어서 있는 아치실댁은 그야말로 과거의 보물창고다. 방 벽에는 1967년 4월의 크라운맥주 달력이 40년 넘게 붙어 있고, 스탠다드석유회사의 나무로 짠 상자와 집주인의 일제강점기 무렵의 학창시절 앨범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해방 전후의 교과서며 시사잡지며 낡은 책자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그득하다. 아치실댁에 묵는다면 창호문을 열고 봄볕을 쬐면서 보물창고에서 세월의 먼지가 쌓인 오래된 책을 뒤져볼 수 있다.

강골마을은 어떻게 이런 낡고 오래된 풍경들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강골마을이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 이씨 후손들이 ‘입신양명’해 서울로 광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강골마을의 옛집들은 비워졌다. 이 작은 마을에서 대를 이어 국회의원이 나왔고, 한 집안에 3명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결국 슬레이트 지붕이 올라가고 옛것들이 다 스러져가던 압축성장의 시기에 강골마을은 ‘비워짐으로써’ 개발 바람을 피해갔던 것이다.

 

# 동백꽃 지는 열화정에서 절정을 만나다

 

 

 

강골마을의 아름다움은 ‘사람 사는 온기’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풍경만 놓고 보면 ‘최고의 장소’는 바로 마을 뒤편의 유려하게 S자로 휘어진 길을 돌아들어 만나는 정자 열화정이다. 조선 현종때 지어진 정자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다.

열화정은 뒤로는 대숲과 동백숲을 배경으로 삼고, 앞으로는 ㄱ자형 연못을 두고 서 있다. 고색창연한 누정 뒤편의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동백나무에 동백꽃이 한창이다. 뚝뚝 목이 떨어진 동백꽃이 바람에 실려 연못 위에 떠 있다. 누정의 난간에 기대앉으면 저절로 시 한수가 읊어질 법하다.

이른 아침 열화정을 돌아보다 마침 산책을 나온 소촌댁의 이용화(73)씨와 맞닥뜨렸다. 이씨는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지고는 막무가내로 소매를 잡아끌었다. 마을을 찾아온 사람을 밥때에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소촌댁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안주인도 반색을 하며 반겼다. 새조개국과 갓 무쳐낸 상추겉절이, 토하젓을 차려낸 소박한 아침 밥상. 아무리 시골이라도 낯선 외지인은 집 안으로 들이지 않는 세상에 밥상까지 차려내놓는 인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 강골마을, 여행의 의미와 축제의 형식을 전복하다



강골마을은 기왕의 여행스타일이나 방식을 전복한다. 판에 박은 듯한 체험프로그램을 갖춘 박제된 시골이 아니라, 실제 시골의 삶에 슬쩍 끼어드는 듯한 그런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곳이다. 강골마을에 민박을 정해놓고 놀러온 사람들이 옆방에 묵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추렴을 해서 장을 봐 고기를 구워 먹거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한솥 가득 팥죽을 끓여 나눠먹는 일쯤은 흔하다.

이런 마을의 분위기는 주민들이 매년 4월 말쯤 여는 축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름하여 ‘두그루 철쭉 축제’다. 인근의 일림산에는 100만평의 너른 산사면에 수만그루의 철쭉이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그때에 맞춰 강골마을에서 수원댁 마당의 단 두그루의 영산홍을 놓고 축제를 연다. 배포 좋게 두 그루의 철쭉을 놓고 축제를 여는 까닭은 소통없이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이른바 관 주도 축제의 의미를 전복한다.

‘두 그루 철쭉 축제’에서는 마을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차 밭을 둘러보고, 판소리 공연을 보면서 함께 북장단을 맞추는 소박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꼭 축제때에 맞춰 가지 않더라도 좋다. 강골마을에서는 언제 찾아가든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공동체로서의 시골 생활’을 만난다. 우리의 과거가 한데 모여 잘 늙어가고 있는 곳. 전남 보성의 강골마을은 그런 곳이다.

 

 

2번국도 군두사거리 우회전

 

◆ 강골마을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로 동광주 나들목에서 내려서 광주 제2순환로를 타고 화순을 지나 29번 국도와 18번 국도를 갈아타고 가면 보성읍 방향이다. 보성읍내 못 미쳐서 미력면 사무소를 지나 만평삼거리에서 좌회전해 2번 국도를 타고 득량면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2번 국도 군두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득량면사무소다. 여기서 득량중학교를 지나 오봉교를 넘으면 강골마을이다. 호남고속도로 서순천나들목으로 나와서 순천 방면 2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성 방면 2번 국도로 갈아탄 뒤 득량 방면 84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도 된다.

 

수원댁·소촌댁… 한옥집 깔끔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보성읍 강골마을을 찾아간다면 마을의 한옥집에서 묵는 것이 좋겠다. 마을 한복판의 종택이 깔끔하긴 하나 비워둔 집이라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흠. 수원댁이나 소촌댁, 아치실댁에서 묵는 것을 추천한다. 숙박과 2끼의 식사 그리고 차 밭을 둘러보고 갯벌체험을 하는 미니투어를 포함해 1인당 3만5000~4만원을 받는다. 강골마을 민박은 마을 공동으로 운영한다. 3, 4인 기준 가족 10가구까지 수용할 수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http://dr.invil.org)나 전화(061-853-2885)로 예약이 가능하다.

 

 

 

<출처> 2009. 3. 11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