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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李珥)의 얼이 숨쉬는 자운서원(紫雲書院)

by 혜강(惠江) 2008. 12. 15.

 

파주  자운서원

율곡 이이(李珥)의 얼이 숨쉬는 곳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번지

 

글·사진 남상학

 

 

 

  파주엔 볼거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파주3현으로 불리는 율곡 이이(자운서원, 화석정), 황의 정승(반구정), 윤관 장군(상서대)의 유적이 이곳에 있다.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번지. 자운산(紫雲山) 기슭에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있다. 

  정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 위로 율곡 이이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인 신도비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8각형 지붕의 율곡기념관이 있고, 율곡기념관을 지나 오른쪽 뒤편에 율곡연수원이 있다.  여기서 매점과 우측 연못을 지나 언덕 위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운서원이 자리를 잡았다.  

 



  이 서원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7년(1615)에 지방 유립들이 창건하었다.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고, 그 뒤 숙정 39년(1713)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두 분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 후기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린 뒤 빈터에 율곡의 학문을  기린 묘정비(廟廷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고 1973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펴 지금의 모습으로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경기도 기념물 제45호) 

 

 



  자운서원의 대문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그 가운데 강당이 있으며, 강당 옆에는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적은 비석인 묘정비가 서 있다. 그리고 강당 뒤로 높은 대지 위에 나지막한 담장을 두른 팔작지붕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과 측면이 3간이고 사당 내부에는 이이 선생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다.

   사당의 담장 둘레는 130여 미터에 이르고,  담장 밖에는 묘정비가 세워져 있으며, 솟을 대문 입구 양쪽에 서 있는 360년생 느티나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그간의 세월을 말해준다. 사당 아래에 간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 등은 최근 주변을 정비하면서 신축한 것이다.  

    이이(李珥)는 1536년 강릉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 유학(儒學)에 전념하여 별시와 장원에 합격,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 선조 1년(1568)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74년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는 15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 15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15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15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158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배향되었고, 파주의 자운서원 외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豊德)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黃州)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시조 작품으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있다.                             

   고산 구곡담(九曲潭)을 사람이 몰으든이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일곡(一曲)은 어드메오 관암(冠巖)에 해 빗쵠다.
   평무(平蕪)에 내 거든이 원근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녹코 벗 온 양 보노라. 

         - 중략 -

   구곡(九曲)은 어듸메오 문산(文山)에 세모(歲暮)커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눈 속에 뭇쳐셰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주> 관암(冠巖) : 갓같이 생긴 바위/ 평무(平蕪) : 잡초가 우거진 들판


 

 


  이 작품은 율곡 이이 선생이 대사간의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 석담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을 때, 고산의 구곡 풍경과 감회를 서곡 1수와 본문 9수로 읊은 것이다. 序詩에 이어 관암(寬巖),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風巖), 금탄(琴灘), 문산(文山)의 구곡을 노래했는데, 그것은 지명인 동시에 특색도 설명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묘와 부친과 모친인 신사임당의 합장묘 등 13기의 가족묘가 있다. 선산 중심부의 맨 위쪽에는 율곡 이이의 부인 고산 노씨의 묘가 있고, 바로 아래 율곡 이이의 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 이이의 맏형 부부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있다. 그 아래로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맨 아래쪽에 이이의 맏아들 이경임의 묘가 치하고 있다. 묘역을 마주하고 우측과 좌측으로도 가족묘가 있다. 

 

 

 

  이이의 묘소가 부모의 묘소보다 위족에 자리 잡고 있어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이에 대한 많은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명확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율곡 이이의 묘소와 사임당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율곡의 가족묘를 거쳐 율곡 이이의 일대기를 담은 율곡 이이 선생 신도비와 율곡기념관을 살펴보았다. 1986년 건립된 율곡기념관은 팔각정 양식의 벽돌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291평으로, 전시장에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서화 유품을 비롯하여 율곡 이이의 큰 누님 매창(梅窓)과 막내 동생 우(瑀, 호는 玉山)의 유품 등이 진열되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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