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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신라 경순왕릉, 망국(亡國)의 설움 서린 곳

by 혜강(惠江) 2008. 12. 11.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릉

 

망국(亡國)의 설움이 서린 곳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글·사진 남상학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우리 좋은벗님네 회원 6명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얼려진 경순왕릉을 찾아 나섰다.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m 정도로 인접한 파주지역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떠난 것이다. 

  언젠가 한번 다녀왔던 파주시 파평면 적성면은 최전방이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찾아간 곳은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고랑포 나루터 뒤편), 파주시와 연천군의 접경 지역의 최북단 마을이었다. 임진강을 넘기 전부터 도로 양편을 따라 변장을 한 무장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간혹 행군하는 모습이 최전방이란 것을 쉽게 느끼게 했다.

  차는 임진강 초소를 지나 북으로 달린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황량한 듯 보였고, 임진강 강물은 물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경순왕릉이 있는 이곳 화장산(花藏山)은 동쪽에는 연천강과 월봉산이 있고, 서쪽에는 성거산(聖居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긍릉파(金陵坡)가 있는 지역으로, 성거산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잘 닦아놓은 길을 돌아가면 바로 능역이다. 입구에 능을 관리하는 분이 좁은 관리소에 홀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찾아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최전방인 이곳에 평일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비 오는 날 뜻밖이라며 반가워했다.

  오랜 동안 한 자리에서 근무하다 보니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게 되었다며 친히 안내를 자청했다. 덕분에 왕릉을 이곳에 쓰게 된 경위와  그 동안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유 등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입구 오른쪽으로 재실이 있고 앞쪽으로 비각이 있는데, 비각 속의 비석은 인산(人山) 때의 경순왕릉 비로 알려져 있으나, 자연풍화 등으로 비문이 많이 훼손되어 있어 비문의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 없어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비(碑)는 백색의 화강암으로 귀부에 박혔던 부분은 떨어져 나간 것 같고, 전체의 규모는 너비 67㎝, 두께 15~18㎝, 높이 132㎝라고 한다. 한때 실전(失傳)되었던 경순왕릉이 1973년 재발견되면서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의 노력으로 인근에서 발견, 고랑포초등학교에 갖다 놓았다가 1987년에 연천군 주관으로 능역을 정화할 때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세워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경순왕릉이다. 능묘 앞에 세운 능표(비좌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는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을 갖추었으며, 이는 모두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재질이다.

  묘표 전면에 종1열로 “新羅敬順王之陵”의 글자가 있다. 이것은 능묘를 봉축했던 영조대왕 때에 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저기 총탄을 맞은 흔적이 뚜렷할뿐 글자의 상태나 획이 너무도 선명하여 잘 믿어지지 않는다. 왕릉의 봉분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규모는 직경 630㎝, 높이 200㎝이며, 봉분 전면에는 410㎝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문성왕의 6대손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신라의 왕도에 침입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자 31세의 나이로 신라 제56대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치고 국사가 다난한 시기였다. 국가가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왕 위에 오른 대왕은 국력 배양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해 노심초사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천하대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이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세자(세칭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歸附;귀속하여 붙좇음)하였다.

 

나라를 내던진 무책임한 항복인가, 아니면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용단인가? 

 

  대왕이 천년 사직(社稷)을 고려에 넘긴 것을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왕의 권위조차  헌신짝처럼 버리고 국가를 내던진 항복인가, 아니면 무고한 백성을 우선 생각한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용단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대왕조의 기록에 「경순대왕께서 고려 왕건에게 양국(讓國)하신 일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옳게 하신 일이다. 그 때 만일 역전사수(力戰死守)하여 고려군에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궁하여졌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복멸(覆滅)되고 화가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왠지 분하고 서글픈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어찌되었건 나라의 국왕으로서 망국(亡國)의 설움을 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은 분명하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 후 경순왕은 왕건으로부터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져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서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두 번째로 결혼하여 여러 자녀(5남 2녀)를 두었으며, 후에 낙랑공주가 금강산에 입산하자 순흥 안씨를 다시 아내로 맞기도 했다. 만년에는 불연(佛緣)에 뜻을 두고 명산대천을 찾아 주유천하(舟遊天下)하며 신앙과 수도에 몰두하다 고려 경종 3년(978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이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하여 이곳 장단 고랑포(高浪浦) 성거산(聖居山)에 왕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모셨다. 운구 도중의 안전사고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정치적인 소동을 염려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경순왕릉은 역시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역사적인 파란 속에 외딴 지역에 방치된 채 한 동안 세인들에게 잊혀져 있었다.

  임진왜란 동안 실전(失傳)되었던 것을 조선 3년(1727년)에 후손(안동인) 김굉(金硡)이 ‘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葬地)’라는 여섯 자가 각인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영조 23년(1747)에 영역을 찾아내어 영조대왕께 수치소(修治疏)를 올려 능묘를 봉축하고 제사를 올리는 조치를 취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다시 실전되었던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여 밀고 밀리는 지리적 현장에 있었기에 경순왕릉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출입이 통제된 지역으로 묶여 있었다.

  그러던 중 1973년 이곳을 지키던 국군장병에 의해 발견되면서 1975년에 문화재 사적 제244호로 지정하고 국가에서 경내 일원을 보수, 곡장(曲墻)과 일부 석물 등을 개수(改竪)하고,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해제함으로써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그 옛날에는 대왕의 능 주변 십리가 다 능역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극도로 축소되어 1,200평 정도의 능역만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은 비무장지대와 인접해 있어 철조망에 붙은 ‘지뢰’표지로 보아 작전지역에 속하는 최전방 지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되돌아 나오면서 비가 멎은 텅 빈 논에 까맣게 앉은 철새들을 보았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갑자기 떼를 지어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TV에서 가끔 비무장지대의 겨울 철새들을 소개한 것을 보았는데 바로 그 장면이다. 추수 끝낸 들판에 떨어진 나락들을 먹이로 삼고 겨울을 나는 진잭들이리라.

  논에는 여기저기 거대한 공룡알 같은 축산용 하얀 '곤포(梱包) 사일리지(silage)'가 시야에 들어온다.  곤포는 짐을 꾸려 포장하는 것, 또는 그 짐을 뜻하는 말이고, 사일리지는 작물을 통째로 또는 짧게 썰어 젖산 발효시킨 저장 사료를 말한다. 사료값이 폭등하다 보니 요즘 축산 농가에서 대체사료로 쓰기 위한 것으로 추수가 끝난 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임진강에서 잡은 재료로 요리를 하는 민물매운탕집을 찾았다.  인터넷에서 찾아 하루 전 전화로 음식을 맛있게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와서 잡숴봐야 알죠?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맛은 알 수 없지만, 상냥한 목소리에 끌려 찾아 간 곳은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면사무소 앞에 있는 대명매운탕집( 031-958-3415). 일행이 맛을 보고, 육질이 단단하고 구수한 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이구동성이다.

 

 

  육순이 넘은 주인장 최동복 씨는 임진강에서 30여년 고기를 잡아온 베테랑 어부, 그날도 카운터 옆 빈 자리에서 장어잡이 낚시를 매고 있다. 잡은 고기가 다 떨어지면 아무리 대낮이라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 자연산이 아니면 내지 않는 고집으로 평생 영업을 해 왔다고 한다. 메뉴는 메기, 빠가사리,쏘가리매운탕과 찜, 장어구이 등이다.

*가는 길 : 자유로를 통하여 백학면 방향으로 오면 장남면 지역인 고랑포리에 이르고 장남면 소재지를 지나 324번 지방도를 따라 옛 개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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