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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4- 남서부 : “한강의 역사는 나루터에 남아 있네!”

by 혜강(惠江) 2008. 4. 29.

서울 4 남서부

“한강의 역사는 나루터에 남아 있네!”

 

글 .사진 민병준

 

 

▲한강대교에서 바라본 여의도. 이 섬은 원래 넓은 모래밭이었으나

제방을 막고 흙을 돋운 뒤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수상도시로 변모했다. 

 

 

  ‘여긴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이곳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쓰시다가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추운 겨울이 물러난 이른 봄날, 해 뜰 무렵에 누구보다 먼저 현충탑에 향 사르고 묵념을 올리니 마음은 한없이 경건해진다.

 

 지금 숲속의 장끼는 제 목소리로 까투리를 부르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도 제 빛깔을 갖고 있듯, 우리가 제 나라 말로 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모두 여기에 누워 계신 분들 덕분이 아니겠는가. 한 없이 일어나는 감사의 마음. 이번 달 서울 남서쪽 기행의 첫 대상지로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현충원이 서울의 하고 많은 자리 중에 하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동작동 언덕에 자리 잡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길손은 아마도 한강이 서울의 중심이요, 대한민국의 상징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강의 지명을 살펴보면,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엔 대수(帶水)라 했다.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엔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한수(漢水) 또는 욱리하(郁利河),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엔 한강을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고도 했다. 고려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列水)라고 불렀다. 또 모래가 많은 일부 지역을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엔 도읍을 적시는 물줄기라 해서 경강(京江)이라고도 지칭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여러 이름들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한강(漢江)이라는 이름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편, 한강은 순 우리말 지명으로서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이라 한다. ‘한’은 ‘크다·넓다·길다’는 뜻이요, ‘가람’은 강의 옛말이니 한강은 곧 ‘크고 넓은 강’이란 뜻이 된다.

 

  서울의 역사는 한강의 역사요, 한강의 역사는 나루터에 기록되어 있다. 전국의 각종 물품과 사람들은 한강의 나루터로 모여들었고, 그들이 가꾼 문화는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강의 나루터는 이렇듯 사람의 왕래를 위한 교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물자의 운반을 위한 수송로 역할에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초소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따로 관리를 파견해 한강의 나루터를 지키게 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전경. 이곳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쓰다 순국한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조선시대엔 현재 한강의 서울 지역에 속하는 구간에 1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상류부터 광나루·삼밭나루·뚝섬나루·두모포·입석포·한강나루·서빙고나루·동작나루·흑석진·노량진(노들나루)·용산진·마포나루(삼개진)·서강나루·양화나루·공암나루 등이다. 이 중에서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량진·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꼽혔고, 2대 나루터라 하면 광나루와 노량진을 일컬었다.

  길은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나루터의 전통은 지금의 한강에 걸린 다리로도 이어졌다. 광나루엔 광진교·천호대교, 삼밭나루엔 잠실대교, 뚝섬나루엔 영동대교, 두모포엔 동호대교, 입석포엔 성수대교, 한강나루엔 한남대교, 서빙고나루엔 반포대교, 동작나루엔 동작대교, 흑석진엔 한강대교, 노량진엔 한강철교, 용산진엔 원효대교, 마포나루엔 마포대교, 서강나루엔 서강대교, 양화나루엔 양화대교·성산대교, 공암나루엔 행주대교가 각각 세워져 있다.


  서울 남서부 대표 나루터인 노량진(鷺梁津)은 일명 노도(路渡·露渡), 노량도(鷺梁渡)라 불리던 노들나루다. 백로들이 많이 날아와 ‘노들’이라고 했다는데, 민요 ‘노들강변’에도 나오듯이 노량진에서부터 양화진까지는 버드나무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지금의 노량진수원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지점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그린 서울 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보물 제850호)를 보면 한강 유역까지 자세히 나와 있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노량진엔 별감이 배치되어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게 하였고, 노량진 남쪽 언덕엔 노량원(鷺梁院)이란 여관도 있어 공무로 도성을 오가는 관리들이 쉬어갔다. 연산군 때엔 한강의 모든 나루터를 봉쇄하고 이 노량진으로만 통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처음 닦은 시흥로(始興路)는 조선시대 도성에서 한강을 건넌 뒤 노량진·시흥·수원을 거쳐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이곳이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가 된 까닭은 우선 숭례문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속도 느리고, 강폭도 좁고, 강변 양쪽이 높아 배다리를 놓기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배로 다리를 연결한 배다리, 즉 주교(舟橋)로 한강을 건넜다. 1795년 정조가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 가운데 노량주교 도섭도(鷺梁舟僑 渡涉圖)를 보면 한강을 건널 때 정조가 쉬어가던 노량진 행궁도 보인다. 현재 이곳엔 1791년에 세운 용양봉저정이 남아 있다. 정자의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난다’는 뜻이니 왕과 관련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1)이번 서울 남서부 기행은 이른 아침에 국립 서울현충원의 현충탑에서 묵념을 드리는 일로 시작했다. /(2)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묘소. 현재 이곳엔 국가원수 2위를 비롯해 임시정부요인,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무명용사 등이 안장되어 있다. /(3)현충탑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는 호국영웅상.

 

  정조는 이전엔 용선(龍船)이나 부교(浮橋)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는데, 이것도 번거롭기 때문에 주교를 가설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주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비변사에서 올린 주교 운영방안이 미흡하자 정조는 1790년(정조 14) 직접 설치장소의 상황부터 강폭, 배 선정, 배의 수와 높이 등 기술적인 면을 비롯해 배를 동원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인 방법도 제시할 정도였다. ‘주교지남(舟橋指南)’은 바로 정조가 주교의 운영방안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어쨌든 정조 이후 노량진은 한강의 으뜸 나루터로 거듭났다. 남부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대부분의 물류는 거의 이곳을 지나갔다. 즉 노량진을 지나야 비로소 서울을 벗어난 것이요, 노량진을 건너야지 비로소 서울에 들어선 것이다.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이곳 노량진에서 제물포(지금의 인천)까지 개통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당시 노량진은 도진취락의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으나, 1900년 한강철교가 세워지고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점차 그 명성을 잃고 말았다.

  나루터와 한강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한강대교를 건너야하는데, 승용차가 아니라 반드시 걸어야 한다.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이 폭파하는 바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서민들 ‘자살다리’로도 오명을 갖고 있는 한강대교. 이 길손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자리 잡고 살면서 제일 먼저 걸어서 건넜던 다리도 이 한강대교였다.

 
▲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이 폭파하는 바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자살다리’라는 오명도 갖고 있는 한강대교.

 

  이 한강대교가 걸려있는 노들섬(중지도)은 하중도(河中島)다. 강 가운데 떠있는 섬 하중도는 상류로부터 떠내려 온 토사가 쌓여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물길이 바뀌면서 섬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 한강엔 팔당 하류만 해도 양수리 하중도, 당정·미사 하중도, 토평·석도 하중도, 잠실 하중도, 뚝섬, 신사·반포 하중도, 여의도, 난지도, 능곡 하중도, 신평·노고 하중도 등 수많은 하중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중도는 지난 세기에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비롯한 여러 개발사업으로 인해 유로가 변경되어 육화(陸化)되거나 골재 채취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한강에 남아 있는 하중도는 여의도를 비롯해 노들섬·밤섬·선유도 등 한 손으로도 꼽을 정도가 되었다.

  한강대교를 건너다보면 널찍한 운동장 등 제법 작지 않은 규모 때문에 노들섬이 원래부터 이렇게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에 노들섬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에도 여의도 주변으로 밤섬(율도)만 보일 뿐 노들섬은 없다.


  노들섬이 모래밭에서 섬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였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단의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한강인도교를 건설하면서 다리가 지나는 모래밭에 흙을 돋워 다리 높이로 쌓아올리고 중지도라고 이름 붙였다. 1930년대엔 노들섬까지 전찻길이 놓여 한강인도교역도 생겼다. 그래도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섬 동쪽의 고운 모래밭을 ‘한강백사장’이라 부르며 여름엔 피서지로,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하며 즐겼다. 

    
▲ 한강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한강 유람선. 하지만 어찌 조선시대의 황포돛배의 흥취에 비기겠는가.

 

  하지만, 1968년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으로 이 노들섬은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다. 한강 북단 이촌동 연안을 따라 한강제방도로, 즉 지금의 강변북로를 건설할 때 한강을 따라 나있던 경원선 바깥쪽에 새로운 둑을 쌓으면서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를 사용한 것이다. 동부 이촌동과 서부 이촌동의 땅 일부도 이때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를 메워 얻은 것이다. 그러다 1973년 노들섬 확장매립공사를 할 때 한강 백사장 모래를 사용하면서 한강 백사장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로 강물이 흘러가면서 지금의 노들섬이 태어난 것이다.


  결국 고운 모래가 넓게 펼쳐졌던 모래밭이었던 노들섬은 한강의 상처를 안고 탄생한 섬임을 알 수 있는데, 최근 서울시에서는 여기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예정이라 밝혔다. 그다지 나쁜 생각 같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그 옛날 인파가 한강 백사장을 메웠듯이 모래밭 복원 등을 통해 한강을 본래의 자연형 하천과 가깝게 만든 뒤 좀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이왕에 하중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강 물줄기를 따라가며 하중도에 대해 살펴보자. 한강 하중도 가운데 맏형인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나의주(羅衣洲)·나의도(羅衣島) 등 다른 이름도 많았다. 조선시대엔 이곳에 목장이 있어 관원을 파견해 목축을 감독하였으며, 궁중이나 나라 제사에 필요한 제물도 제공하였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엔 특별히 ‘백사주 이십리(白沙周 二十里)’라 씌어 있으니 여의도엔 고운 모래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갈매기 한가롭게 노닐던 모래밭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비행장이 만들어지면서 아름다움을 조금씩 잃기 시작했다.

 

▲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에서 약 50%를 차지하고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 (왼쪽) / 노량진 수산시장의 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며 수산물을 손질하고 있다. 이곳에선 새벽엔 경매 구경을 하고, 저녁엔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 (오른쪽)

  

   그래도 여의도비행장은 당시 한강인도교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명물이었던가 보다. 1920년 이탈리아 비행기가 동경으로 가던 길에 여의도에 착륙함으로써 당시 시민들의 커다란 구경거리가 되었고, 1922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방문 비행으로 여의도비행장에서 시범비행을 보이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여의도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으로 국제공항이 이전하자 공군기지로 사용되다가 1971년 폐쇄되었다.

  여의도가 지금처럼 변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1968년의 한강개발계획이다. 이때 여의도 둘레에 높이 16m, 폭 21m, 연장 7km의 제방, 즉 윤중제를 쌓으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개발의 어두운 그림자인가. 아니면 안목이 없는 천박한 개발 만능주의인가. 한강의 하중도 중에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던 밤섬(栗島)도 이때 훼손되었다. 윤중제를 쌓은 뒤 땅을 돋우는 데 필요한 돌과 흙을 구하기 위해 이 섬을 폭파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의도엔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언론기관·금융기관·증권거래소·사무실용 빌딩 등이 잇달아 건설되어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현대적인 수상도시로 이름이 높다.

 

 

▲ 한강대교가 걸려있는 노들섬은 원래 넓은 모래밭이었으나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당시 흙을 돋우면서 섬이 되었다.(왼쪽) / 한강 남쪽 언덕을 따라 이어진 올림픽대로. 서울 동서의 교통을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사람과 강을 단절시켰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오른쪽)

 

  하지만 밤섬을 파괴한 일은 정말 아쉽다. <서울명소고적>엔 ‘맑은 모래가 연달아 펼쳐져 한강과 묘하게 서로 어울려 풍치가 빼어났다’고 밤섬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있다. 밤섬 상류쪽으로 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은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여 일찍이 마포팔경의 하나에 속했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밤섬이란 산수화로나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해본다.

  밤섬의 작고 나지막한 언덕엔 민가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주변으로는 널찍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곳곳에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제법 풍치가 좋았다. 조선시대엔 이곳에 뽕나무와 약초 따위를 심었고, 양이나 염소를 놓아기르기도 했다. 주민들은 주로 고기잡이나 나룻배 운영으로 생활하였다. 바다도 아닌 강이 만든 섬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 (1)동작구 노량진로에 있는 사육신 묘. 예로부터 알려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외에 1977년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하면서 모두 7명이 되었다. /(2)사육신 묘비는 관직명이나 호를 새기지 않고 모두 성씨지묘, 하씨지묘, 성씨지묘 등 성만 나타내는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3)사육신 묘 뒤쪽 언덕에 있는 폐묘. 민간에선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성승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풍경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여름철 백사장엔 피서 인파가 넘쳤고, 봄가을엔 강물에 배를 띄우거나 언덕 위에 올라 강변 풍치를 즐겼다. 그러나 1968년 윤중제 공사 당시 이곳 주민들을 창천동으로 이주시키고 폭파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서강대교가 밤섬 위를 지나는데, 섬의 뿌리는 남아 있었는지 다행스럽게도 이후 이곳에 다시 모래섬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최근엔 식생이 복원되어 각종 철새들이 찾아들고 있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린 풍광은 어찌 되찾을 수 있을까.

  여의도 하류쪽에 있는 선유도(仙遊島) 역시 비슷한 풍파를 겪었다. 이 섬은 지금은 하중도이지만 이 역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강변에 솟은 선유봉(仙遊峯)이란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양천팔경첩 중 ‘선유봉’을 보면 과연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을 정도의 절경이다. 하지만 이 선유봉 역시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선유봉은 폭파되었고, 고운 모래도 파헤쳐져 지금처럼 보잘 것 없는 평평한 섬이 되어 버렸다.

  이후 선유도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남서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었다. 2000년 폐쇄된 뒤 다행스럽게도 정수장을 재활용해 물을 테마로 한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지금은 서울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도심의 생태 테마공원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찌 옛 선유봉의 아름다움만 하겠는가.

 

  한강대교·마포대교·양화대교를 건너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다시 한강에 대해 생각한다. 한강은 서울 시민들뿐만 아니라 배달겨레의 젖줄로서 역사의 한 중간에 있던 소중한 강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해 우리나라가 산업화 사회로 진입한 1960년대 이후엔 한강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변도로 등으로 접근이 쉽지 않아 한강과 인간은 분리되어 있다. 일부 구간이 서울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서울 시민들은 아직도 한강이 환경오염 때문에 생태계 회복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는 한강을 가꿀 때 눈앞의 이익만 좇는 근시안적인 개발보다는 생태계를 친환경적으로 복원하고,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고려하는 데 무게중심을 둬야 할 것이다.

 

▲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지덕사는 양녕대군의 사당이다. 마치 고급 저택의 정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왼쪽) / 지덕사 뒤쪽 언덕에 조성된 양녕대군의 묘. 양녕은 태종의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폐위되었고,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엔 풍류로 일생을 보냈다.(오른쪽)

 

  돌이켜보면 서울은 500년간 조선의 수도였고, 지금도 대한민국의 수도인 덕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 아주 많다. 또 넓은 한강과 북한산·도봉산 등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명산도 솟아 있다. 이렇듯 서울은 역사적·지리적으로 관광자원이 아주 풍부한 도시다. 그래서 서울시는 한강·남산 등을 대표적 관광명소로 만들고, 계절마다 다양한 축제를 열어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수는 아시아 유명 도시 중에서 가장 낮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한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과 그 주변이 가장 큰 관광자원임에도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한강을 훼손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개발을 향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넓고 깨끗했던 한강 백사장, 민가 10여 채가 정겹게 자리하던 밤섬, 한강의 가장 큰 모래섬 여의도, 아름다운 언덕이었던 선유봉을 비롯해 한강 주변의 경관을 잘 보존하였다면 ‘아시아 유명 도시 중 관광객 꼴찌’라는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가 진정으로 지금의 한강을 ‘즐겨 찾는 한강, 가까운 한강, 살아 숨 쉬는 한강, 내일을 여는 한강’으로 가꾸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콘크리트 중심의 개발에서 벗어나 한강의 생태환경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단언컨대, 한강이 예전 모습의 일부라도 되찾는다면 분명 서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강 주변의 문화유산을 둘러보자. 노량진 나루 근처엔 사육신 묘가 있다. 홍살문, 불이문, 신도비각을 차례로 거치면 의절사(義節祠). 여기엔 여섯 분이 아닌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77년 김문기를 추가로 봉안했기 때문이다. 의절사 뒤쪽 언덕을 오르면 하위지·성삼문·유성원의 묘가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이개·유응부·박팽년·김문기 묘가 있다.

 

▲ (1)낙성대 유지 근처에 조성된 낙성대공원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2) 관악구 봉천동의 낙성대 유지. 고려 명장으로서 거란의 40만 대군을 무찔렀던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다. /(3)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누가 모셨는지 이 분들은 모두 한강수를 등지고 풍진 세월을 누워 있다. 길손이 풍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용산구 이촌동 새남터 사형장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 새남터를 뒤로 하고 자리를 잡은 게 아닐까. 아니면 부도덕한 군주가 자리를 잡은 도성을 바라보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 살벌하던 시대로 돌아가 보자. 1453년(단종 1)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몰아내자, 1456년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를 꾸몄다. 하지만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였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했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대군을 칭하는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성삼문·박팽년·김문기·이개는 작형(단근질)으로 처형당하였고, 하위지는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을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이는 사육신을 비롯해 모두 70여 명에 이른다. 이중에서 6명을 흔히 사육신(死六臣)이라 하는데, 이 말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쓴 추강집(秋江集)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의 육신전에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김문기도 사육신의 1명이라는 의견이 있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문제를 밝히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만들었다. 단종 복위운동 당시 공조판서 겸 3군도진무에 있었던 그는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 등과 함께 처형된 인물. 하여 실제로는 사칠신(死七臣)인 셈이지만, 숫자를 떠나 사육신이란 단어는 우리 민족에겐 목숨까지 초월한 영원한 의리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살벌하던 그 시절 시신은 누가 수습했을까? 사육신이 죽고 난 후 그 가족들은 물론이요, 친인척들도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 노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이들의 시신을 거둬 장사지낼 사람이 없었다. 민간에서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수습해서 묻었다고 하나 정확한 사료는 없다.

  원래 조선시대엔 이곳에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 4분의 묘만 있었다. 그러다 서울시에서 1977년 묘역정화공사를 할 때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만들었다. 또 묘역 뒤쪽 언덕엔 문인석이 반쯤 땅에 묻힌 채 돌아앉아 있는 폐묘가 있는데, 이는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성승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 여의도는 국회의사당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어쨌든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주동자들은 물론이요, 그 가족들도 처형을 당했다. 성삼문은 아버지(성승), 동생 셋(삼빙·삼고·삼성)과 아들 넷(맹첨·맹년·맹종·갓난아기)까지 몰살당했고, 다른 사육신들도 거의 같은 꼴로 멸족을 당했다. 다만 박팽년만이 유복자가 살아남아 후손을 이었다.

  당시 주동자의 가족 중 여자들은 세조 편에 섰던 정인지·한명회·신숙주 등 64명에 이르는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동지들을 밀고한 김질도 옛 동지들의 가족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관련 기록을 들추다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의금부에 일러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난신에 연좌된 부녀 중에…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딸 내은금·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고…최면의 누이 선비, 조완규의 아내 소사·딸 요문은 병조판서 신숙주에게 주고…유성원의 아내 미치·딸 백대,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에게 주고…민보흥의 아내 석비, 이윤원의 아내 대비는 판군기감사 김질에게 주고…”

 

▲ 한때 오염과 악취의 대명사였으나 최근 몇 년간 부단한 노력으로 깨끗함을 되찾아가고 있는 안양천. (왼쪽) / 안양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염창교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 하류. 강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다.(오른쪽)

  

  정치적으로 보면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을 무마시킨 덕에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 세조의 후손이 대를 이어 조선을 통치했고, 모의를 밀고했던 변절자들은 대대로 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다. 그 살벌하던 시기, 우리가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살아서의 일신영달? 죽어서의 역사적 평가? 사육신 묘에서 바라본 한강은 오늘도 말이 없다.

  사육신 묘에서 나와 조금 떨어진 동작구 상도동의 양녕대군 묘를 찾아 잘 가꿔진 묘역을 둘러보다 문득 사육신과 관련해 양녕대군에게 서운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왕실 종친의 수장격인 양녕대군은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 편에 섰고, 나중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키다 발각되자 그를 처벌하는 데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 조선에 퍼져있는 장승들의 우두머리라는 장승백이. 정조가 시흥길로 현륭원을 다닐 때 이곳이 너무 호젓하니 장승을 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관악구 남서부의 금천구는 서울에서 면적이 작은 편에 속하는 자치단체다. 그렇지만 길로 본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지역이다. 정조의 초기 현륭원행의 노정은 과천로(지금의 동작대로)였다. 그러나 과천로엔 교량이 많고 남태령 고갯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화성 축조에 착수한 직후인 1794년(정조 18) 시흥로가 개설되자 이듬해 제6차 현륭원행부터는 시흥로(지금의 시흥대로)를 이용했다.  

 

  기존의 교통로 외에 서울~시흥~안양을 거치는 시흥로는 단지 정조 자신의 원행뿐만이 아니라 화성 신도시를 중심으로 삼남지방과 보다 수월하게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정조는 이 시흥로를 닦는 일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우여곡절을 겪는다. 당시 경기관찰사였던 서용보가 한강 일대 7읍의 백성들에게 관청 곡식을 시가의 두 배에 가까운 비용으로 팔면서 “임금님이 화성으로 내려가는 시흥로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경기 암행어사로 파견된 정약용이 이 문제를 수습했다. 지금 뚫린 왕복 10차선 시흥대로의 시작이었고, 대한민국 1번 국도도 이 길로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명암을 간직하고 있는 구로공단을 둘러본 뒤, 한때 오염과 악취의 대명사였으나 최근 몇 년간 부단한 노력으로 깨끗함을 되찾아가고 있는 안양천을 건너면 양천구와 강서구가 손짓한다. 

 

 이 지역은 용왕산·우장산·궁산·개화산 등 겨우 100m 내외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공원 역할을 하고 있으나 서울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낮은 언덕에 불과하고, 지세도 논이 많고 평평하다. 한강은 더욱 넓어지고 문득 갯내음도 풍겨오는 것 같으니 바다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허준박물관 근처의 구암공원은 한때 한강에 접해 있었다. 연못에 있는 바위는 광주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광주바위다.

 

   서울은 세계적인 대도시이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다. 통계를 보면 2006년 서울의 농가는 2,934가구. 이는 서울 전체 가구(3,109,809)의 0.09%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중 논농사는 김포평야의 일부를 거느리고 있는 강서구를 포함해 양천구·구로구 등에서도 짓고 있다. 이렇게 수확한 서울의 쌀 생산량은 제주보다 많다. 2006년 서울에서 생산된 쌀은 2,399t으로 같은 해 제주도에서 생산된 2,352t에 비해 47t이나 더 많다. 이는 약 1,000만 명에 이르는 서울 시민이 하루에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 한다. ‘경복궁 쌀’이 바로 서울 지역에서 생산한 쌀 이름이다.

  이렇게 논과 건물 사이를 오락가락 하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강 따라 흘러내려가다 보면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동양 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1539-1615)이다. 허준은 지금의 강서구 등촌동 능안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이 지역은 대대로 양천허씨의 세거지였다.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있는 공암(孔岩)이라는 바위는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 허가바위라고도 한다. 이 바위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로서 성인 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뚫려 있다. 겸재 정선의 ‘공암층탑’이란 그림으로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공암은 한강의 모래밭에 있어 돋보였으나 역시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 구암공원에 조성되어 있는 허준 동상.(왼쪽) / 구암공원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영등포공고 정문 앞엔 양천 허씨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허가 바위가 있다. (오른쪽)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긴 겸재 정선은 1740년 여름 양천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정선은 다음 해 여름까지 양천에서 그린 그림들을 화첩으로 꾸몄는데, 이것이 바로 아름다웠던 한강의 옛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양천의 진산인 궁산(宮山·75.8m)은 정선이 그림 소재를 위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산이라 하기엔 낮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강가에 솟은 덕에 조망은 으뜸이다. 서울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에서 정선의 흔적을 살펴보고 10분쯤 오르면 소악루가 반긴다. 궁산 정상은 서울시가 우수 조망명소로 지정할 만큼 풍치가 뛰어나다. 이 누각에서는 유장히 흐르는 한강가에 선유도가 보이고, 그 너머로 안산·인왕산·남산·관악산, 그리고 삼각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곳곳엔 겸재 정선의 그림 사본도 걸려 있으니 옛 풍치와 지금의 풍치도 비교할 수 있다.

 

▲ 강서구 가양동의 양천향교. 전국 234개 향교 중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다.

  

   정선이 1741년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화창한 초여름 날 이 궁산에 올라 강 건너 덕양산 자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행주산성 앞을 흐르는 한강을 칭하던 행호(杏湖)에서 웅어잡이 하는 광경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겸재 정선의 친구인 문장가 사천 이병연은 이 정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어망을 행호 밖에서 잃겠구나.

  당시의 풍광이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이젠 이런 풍광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어쩌면 우리가 한강개발이란 이름 아래 잃어버린 현주소가 아닐까. 

 

  궁산에서 한강을 굽어본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서울 기행의 마무리는 아무래도 한강이다. 한강은 교통로 기능, 군사적 기능, 경제적 기능, 문화적 기능, 그리고 생활용수로서의 기능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유구한 역사를 흘러 내려오고 있는 물줄기다. 하지만 한강은 예전의 한강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토록 짧은 시일에 인공구조물에 파묻혀 급격하게 변한 강이 또 있을까 싶다. 옛 선인들이 즐겼던 한강의 풍류를 강변의 고층 건물에서 어찌 맛볼 것이며, 커다란 유람선을 어찌 황포돛배에 비견할 수 있을까. 오늘도 한강은 말없이 황해로 흘러들어 간다. 잘 가라, 한강수여!

 

관악산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과천시 경계에 있는 관악산(冠岳山·632m)은 예로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오악(五岳)의 하나로 꼽혀온 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것 같아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갓뫼’라 하고, 한자로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이는 주위 산들 중에서 으뜸간다는 뜻도 담겨 있다. 주봉은 연주대(戀主臺)다.  

 

 

  관악산은 청계산·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면서 북쪽의 북한산·수락산·불암산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싼 방벽 역할을 한다. 보통 관악산이라 하면 연주대와 연주암이 있는 봉우리를 말하지만, 영역을 넓게 보면 신라 문무왕 때 원효·의상·윤필 세 대사가 도를 깨닫고 성불했다는 삼성산, 그리고 장군봉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전통 풍수에서는 관악산을 불의 기운인 화산(火山)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철쭉꽃이 피는 4~5월에 관악산 철쭉제도 열린다.

  관악산은 서울 시민들의 당일치기 산행코스로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늘 많은 인파가 몰려 코스가 다양하게 나있다. 관악산 횡단코스인 서울대 정문 옆 만남의 광장에서 제4야영장을 거쳐 연주대에 올라선 다음 과천향교로 내려서는 코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외에도 대중교통의 접근성에 따라 신림동 기점, 과천 기점, 시흥동 기점, 안양유원지 기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관악산 횡단코스=만남의 광장→제4야영장 갈림길→연주암→연주대→연주암→과천향교 <3시간30분 소요>
○서울대 원점회귀코스=만남의 광장→무너미고개→연주대→깔닥고개→제4야영장→만남의 광장 <3시간30분 소요>
○서울대~사당동 코스=만남의 광장→제4야영장 갈림길→연주암→연주대→관음사→사당 전철역 <4시간30분 소요>
○과천 원점회귀코스=과천향교→계곡길→연주암→연주대→능선길→과천향교 <3시간소요
○남북 능선종주코스=사당 전철역→관음사→북릉→559m봉→연주대→남릉→불성사→안양시 관양동 <5시간30분 소요>
○관악산~삼성산 연결종주코스=관음사→북릉→연주대→서릉→무너미고개→삼막사→국기봉→만남의 광장 <6~7시간 소요>

                           

 

국립서울현충원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국군을 창설한 이래 전사자들을 서울 장충단공원 내에 있는 장충사에서 모셔왔는데, 6·25전쟁 후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해 전사 또는 순직 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했다.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해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안장됐다. 2007년 현재 국가원수 2위, 임시정부요인 18위, 애국지사 211위, 국가유공자 62위, 일반유공자 1위, 장군 355위, 장교 4,487위, 사병 46,557위, 군무원 1,952위, 경찰 813위, 위패 145,000여 위, 무명용사 6,800여 위 등이 안장되어 있다. 지하철 4호선 동작역 2번·4번 출구 02-815-0625

사육신묘 

 

  동작구 노량진로에 있는 사육신묘(시유형문화재 제8호)는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사육신이 묻힌 곳이다. 사육신은 곧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을 말한다.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만 묻혔으나, 1977∼78년 사육신 묘역정화사업 때 하위지·유성원, 그리고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하면서 모두 7명이 됐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에서 매년 10월9일 추모제향을 올린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도보 10분. 02-813-2130

양녕대군 사당·묘소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지덕사 부 묘소(시유형문화재 제11호)는 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1394-1462)의 사당과 묘다.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는 원래 서울역 앞 남묘 부근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관악산 줄기의 국사봉 밑에 있는 대군의 묘소 앞으로 옮겨왔다. 이곳에는 사당, 서고, 제기고 등 3동의 건물이 있고, 사당 후면에 묘소가 있다.

 

 

          

 

 

  양녕대군은 1404년(태종 4)에 세자로 책봉됐으나 폐위되고, 조선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보냈다. 시와 글씨에 능했다.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에서 도보 10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 관련 사료 등으로 꾸민 박물관이다. 장로교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교수 김양선이 1948년 남산에 세운 기독교박물관과 매산고고관에 소장했던 자료 3,600여 점을 모교인 숭실대학교에 기증하자 1967년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세웠다.

 

  

  소장 유물은 다뉴세문경(국보 제141호), 석제청동기제작용범(국보 제231호), 안중근 의사 유묵(보물 제569호), 청동제지구의(보물 제883호) 등 각종 문화재와 그리스도교 관련사료와 유물, 고대 중국과 로마시대 유물을 포함해 6,769점에 이른다.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노량진 나루터 

 

  동작구 노량진(鷺梁津)은 지금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강변에 있던 나루터다. 예로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 했고 백로가 노닐어 노량진이라고도 했다. 이 나루는 한양에서 시흥·수원 방면을 거쳐 충청·전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을 설치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란 여관이 있어 도성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갔다.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이곳에서 제물포(지금의 인천)까지 개통되자, 한때 철도 시발지로서 도진 취락의 기능이 강화됐으나, 다음해에 한강철교,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노량진 수산시장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노량진 수산시장은 서울시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개설한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이다. 전국에서 위탁된 대량·다종의 수산물을 공개경쟁매매, 또는 정가·수의매매 등으로 판매하는 수탁판매(경매)사업을 주로 한다.  

 

 

  

 

   주요 시설은 활어·선어·패류 등의 경매장, 건어·젓갈 판매장, 활어보관장, 중도매인사무실, 출하주휴게실, 간이냉장고 등이다.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에서 약 50%의 물량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새벽에 가면 경매 장면을 볼 수 있다. 저녁때까지 횟집을 운영한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노량진역 철도 시발지  

 

  1897년 3월22일 우리나라 최초로 경인선 철도가 착공됐다. 당시 일본인들이 철도부설 문제로 왕래가 잦던 끝에 우리 정부가 철도 부설권을 모어스에게 특허를 주었으나 일제의 집요한 매수공작에 의해 모어스는 일본에게 철도부설권을 양보했고, 일제는 1899년 4월23일 공사를 재개함으로써 그해 9월18일 철도가 개통됐다. 지금 노량진에는 시인 서정주가 지은 시와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 휘호한 철도 시발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동작나루

 

  동재기나루, 동작나루 등으로 불리던 동작진(銅雀津)은 현재 동작역이 있는 이수천 입구 강변에 있던 나루터를 말한다. 이 일대에 검붉은 구리(銅) 빛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충청·호남이나 영남 남서부로 내려갈 때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작나루는 근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한강인도교 건설로 기능이 약화됐다. 지금은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지하철 7호선 동작역.

보라매공원 

 

동작구 신대방동과 관악구에 걸쳐 있는 보라매공원은 원래 공군사관학교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1985년 서울시에서 인수해 이듬해 개원한 복지시설 위주의 시립공원이다. 공군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보라매공원이라 했다.

  주요 시설물로는 대운동장을 비롯해 잔디광장·독서실·청소년수련장·소동물원·체육관·수영장·장애자복지관·남부노인종합복지관 등을 비롯해 연못·녹지·산책로·조깅코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 7호선 보라매역 2번 출구 보라매공원 방향 500m 정문. 2호선 신대방역 4번 출구 문창초교 방향 500m 후문.  

 

 

장승배기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는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이 서있던 유적지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 참배 길에 잠시 쉬어가던 이곳이 수풀이 우거지고 음산하자 왕명으로 장승을 세웠다 한다. 이후 행인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고 마을사람들은 장승에서 동제를 지냈다.

  대방장승은 ‘변강쇠가’의 소재가 되고 장승배기라는 유명한 지명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일제가 철거한 장승을 광복 후 마을사람들이 다시 세우고 매년 10월24일 장승제를 지내며 주민 화합의 축제를 펼친다.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6번 출구 동작도서관 옆.


낙성대 유지   

 

  관악구 봉천동의 낙성대 유지(기념물 제3호)는 고려시대 명장으로 거란의 40만 대군을 무찔렀던 인헌공 강감찬(948-1031) 장군이 태어난 집터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해 그 생가터를 낙성대(落星垈)라 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이 있었으나 1973년 낙성대를 정화하면서 낙성대공원의 안국사 경내로 옮기고 3층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매년 10월경 관악문화원(02-885-5975) 주관으로 안국사에서 장군의 추모제인 인헌제를 지내고 있다.

 

호림박물관 

 

  관악구 신림동의 호림박물관은 윤장섭 선생이 출연한 유물과 기금을 토대로 설립한 사립 박물관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에 4개 상설전시실과 1개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 수장고 등 전시 관련시설과 커피숍, 기프트숍 등의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토기(3,000여 점), 도자기(4,000여 점), 회화전적류(2,000여 점), 금속공예품(600여 점) 등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44점의 유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국보 8점, 보물 36점)되어 있을 정도로 소장품의 다양성과 질적인 면에서 우수하다.   관람시간 10: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일반 4,000원, 학생 2,000원.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난곡 방면 도보 10분. 전화 02-858-2500, 3874

 

 

신림동 굴참나무 

 

   관악구 신림13동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제271호)는 높이 17m, 가슴높이 둘레 2.5m, 나무 밑둥둘레 2.9m에 달하는 노거수. 강감찬 장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지금과 같이 커다란 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지만, 수령은 약 250살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음력 7월1일과 10월1일 목명보존과 마을의 평안을 위해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근에는 장군이 별당으로 사용했다는 칠불사(지금의 은천사)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관악구 남현동 사당 사거리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은 구 벨기에 영사관(사적 제254호)에 꾸민 문화 공간이다. 구 벨기에 영사관은 레온 방카르가 1905년 중구 회현동에 준공한 건물인데, 1970년 상업은행에 불하된 후 198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우리은행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가 지금의 분관으로 새롭게 꾸몄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하면서 현관과 발코니의 이오니아식 석주 등은 독특한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람시간 평일 10:00~20:00, 주말·공휴일 10:00~18:00. 지하철 2·4호선 사당역 6번 출구에서 도보 1분. 전화 02-598-6247

 

 

사당동 백제요지  

 

  관악구 남현동 문화재길에 있는 사당동 백제요지(사적 제247호)는 백제 때 질그릇을 굽던 가마터다. 이곳에서는 질그릇 조각들이 불에 탄 흙과 재에 섞여서 발견됐는데, 사선을 어긋나게 그은 문살무늬를 가진 조각들이 주로 보여 백제 후기의 가마터로 추정된다. 부근에 붉은 흙이 많아 질그릇 생산지로 적합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서울 지역에서 알려진 유일한 백제 가마터로서, 비록 파괴는 됐으나 백제 질그릇 생산기술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러나 2006년 서울대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백제 요지와는 관련이 없는 통일신라 후기(9세기)의 유적이라는 새로운 의견도 제시됐다.  

 

 

 

봉천동 마애미륵불 

 

  관악구 봉천동 관악산 북쪽 중턱에 있는 마애미륵불(유형문화재 제49호)은 가로 5m, 세로 6m의 큰 절벽에 사람 크기의 미륵불을 새겨놓은 조선시대의 미륵불 좌상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둥근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됐으며 얼굴은 갸름한 편이다. 늘씬하게 표현된 신체와 둥글게 깎인 어깨 등으로 보아 상당히 우수한 조각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의해 이 불상이 미륵존불이라는 사실과 1630년(인조 8)에 조성됐다는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편년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서울대학교 부속박물관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부속박물관은 1940년 박영철이 고서화 100여 점과 보존비를 기증한 것을 계기로 1941년 동숭동 옛 캠퍼스에 2층 건물을 지어 개관했다. 1975년 관악캠퍼스 도서관 6층으로 옮겼다가 1993년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겼다. 소장 유물은 역사품 4,400여 점, 민속품 2,500여 점, 기타 고고학 발굴품 수만 점이 있으며, 이중 일부를 정기적으로 교체 전시하고 있다.

  대학 박물관 중에서 소장품의 질과 양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손꼽힌다. 특히 발해 유물, 서화류, 민속 유물 등에는 국립박물관에도 없는 우수한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관람시간 10:00∼17:00, 일요일 휴관. 지하철 2호선 서울대 입구역에서 서울대행 5511번, 5512번, 5513번 버스 이용해 경영대에서 하차. 행정실 대표전화 02-880-5333, 874-5693 

 

 

여의도 

 

영등포구 여의도(8.4㎢)는 한강에서 가장 큰 하중도(河中島)로서 영등포 쪽에 작은 샛강이 있다. 원래 광활한 모래벌판이었던 이곳에 1916년 일제가 간이비행장을 건설했다. 1968년 제방을 축조해 신개발사업을 착수했다.

 

 

  이 섬의 복판을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한 6차선의 마포대교가 1970년 개통함으로써 신시가지 발전이 한층 가속화됐다. 1981년 원효대교를 세워 여의도와 용산구 원효로4가를 이어 놓았다. 국회의사당·한국방송공사·문화방송국, 각종 금융관계사, 아파트 등을 비롯해 대한생명 63빌딩·엘지 쌍둥이빌딩 등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다. 

 

 

선유도공원 

 

   한강의 하중도인 선유도는 원래 선유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섬으로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남서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폐쇄된 뒤 서울시에서 공원으로 꾸몄다.   한강의 역사와 동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강역사관·수질정화공원, 시간의 정원, 물놀이장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총 11만400㎡ 면적의 공원에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공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양평동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와 선유도를 잇는 너비 4~14m, 길이 469m의 보행전용 교량 선유교도 설치되어 있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30분 단위로 입장객 안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개방 시간은 06:00~24:00.

 

 

한우물과 주변 산성지  

 

  금천구 시흥동 호암산(315m) 정상에 있는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사적 제343호)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우물과 그 주변의 옛 성터를 말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1989~1990년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길이 22m, 폭 12m의 한우물과 옛 산성터·건물터·제2우물터 등이 확인됐다.

 

 

  천정·용복·용초로 불리는 한우물은 심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평상시에는 군용에 대비했다고 한다. 한우물 북동쪽 50m 지점에 있는 동물석상 1구는 경복궁의 해태와 마주보게 해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써 도성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석구(石狗)임이 밝혀졌다.

 

 

평강 성서유물박물관 

 

  구로구 오류동의 평강 성서유물박물관은 평강제일교회 교육관에 마련된 성서유물박물관으로 미국의 고고학자 케네스 바인 박사가 평강제일교회의 박 아브라함 목사에게 기증한 고대 이집트와 오리엔트문명의 유물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주요 소장 유물에는 기원전 4000년 경의 이스라엘 토기를 비롯해 고대 서아시아의 토기 중에서 가장 품질이 우수한 미케네 불레셋 토기, 기원전 8세기 키프로스의 페니키아 양식 토기, 메소포타미아식 원형 인장 및 이집트의 스캘럽 인장, 모세의 어머니로 알려진 하쳅수트 여왕의 황금 완장, 이집트의 미라 2점, 수메르의 고대 설형문자 토판문서 등이 있다.

  개관시간 평일 10:00~17:00, 일요일 13:00~17:00(입장은 16:00까지), 관람료 고등학생 이상 2,000원, 초등학생·중학생 1,000원. 지하철 1호선 오류역에서 도보 7분, 지하철 7호선 천왕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2분. 전화 02-2686-9496

 

 

양천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강서구 가양동의 양천향교는 전국 234개 향교 중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다.

 

 

  1411년(조선 태종 11)에 처음 지은 뒤 몇 번의 화재를 겪었고, 지금의 건물은 1981년에 복원한 것이다. 1988년 현재 복원 공사 중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허준박물관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에 있는 허준박물관은 등촌동 능안 마을에서 태어난 허준을 기리기 위해 2005년 건립한 한의학 전문 박물관이다. 허준 기념실에는 허준 관련 유물, 동의보감 제작 과정 및 집필 모형, 허준의 저서와 한의학 관련 고서적, 허준과 한의학의 미래 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약초·약재 전시실에는 동의보감에 나타난 약초와 약재, 처방별 약재 자료가, 의약기기실에는 한의학의 주요 의약기기를 분야별로 구분한 자료가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그밖에 기증품을 중심으로 한 기증자료실, 내의원의 주요 구조와 생활상을 축소 모형으로 재현한 내의원과 한의원실, 약봉지 싸기와 체질 알아보기 등 관람자가 직접 한의학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공간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 옆에는 각종 성인병·난치병 등을 연구하는 한국한의학연구소와 대한한의사협회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휴관. 어른 800원, 초중고생 500원. 관람시간 10:00~17:00(입장은 16:30) 지하철 5호선 발산역 3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6644번을 타고 공진중학교에서 하차. 

 

 

허가바위 

 

  강서구 가양동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위치한 허가바위는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하는 발상지다.

 

 

  굴은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로서 성인 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다. 허준은 이곳에서 동의보감을 집필했고 생을 마친 곳이라 전한다. 지하철 5호선 발산역 3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6644번을 타고 영등포공고에서 하차. 

 

개화산공원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개화산(128m)은 서울 가장 서쪽에 솟은 산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하며 정상에서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 때 주룡 선생으로 불리던 한 도인이 이 산에 숨어 살다 세상을 떠난 뒤 그 자리에 이상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나자 후세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 선생이 살던 옛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이 쉬기 좋게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김포공항 

 

강서구에 있는 김포공항은 1942년 준공되어 군용 비행장으로 사용되다가 1958년 국제공항이 되면서 대한민국의 관문이 됐다. 이후 미국·일본·프랑스 등 28개국 71개 도시에 항로가 개설되어 많게는 하루 400여 대의 항공기가 뜨고 내렸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수용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지금은 2001년에 새로 지은 인천국제공항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현재 김포공항의 국내선은 김해(부산)·제주·대구·광주·울산·여수·목포·포항·사천(진주)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항에 운항하고 있고, 국제선은 서울~도쿄, 서울~상하이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출처> 2008. 4 / 월간산 [4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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