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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2-북동부 : 삼족오 깃발 휘날리던 고구려의 기개를 느껴라!

by 혜강(惠江) 2008. 3. 11.

서울 2 : 북동부

 

삼족오 깃발 휘날리던 고구려의 기개를 느껴라! 

 


민병준의 향토기행

 

 

▲불암산에서 바라본 야경

  

  한성은 크게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성은 성안의 지역으로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이 자리 잡았고,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에 이르렀다.

 

  ▲ 강북 지역 웬만한 곳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북한산. 노원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찍었다. 

 

 

지도와 현재 지도를 나란히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번에 둘러볼 서울 북동부 지역에서 조선시대 성저 지역은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우이천 물줄기와 중랑천 물줄기를 이은 선이 대체적인 경계다. 그러니까 우이천~중랑천 안쪽의 강북구·성북구·동대문구·성동구는 한성부의 성저 지역이었고, 바깥쪽의 도봉구·노원구·중랑구·광진구는 경기도 양주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서울 중심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도성에서 동쪽으로 가는 큰길은 모두 흥인문(동대문)에서 시작했다. 북동쪽은 흥인문~동묘~보제원~안암동천~제기현~고암~수유현~양주 누원을 거쳐 한반도 북동쪽 끝인 함경도 서수라까지 연결된 제2로가 있었고, 동쪽은 흥인문~안락현~중량포~양주~망우리를 거쳐 동해안 평해까지 연결된 제3로가 이어졌다. 제2로와 제3로는 흥인문을 벗어나 동묘에 이른 뒤 보제원(普濟院)에서 둘로 갈라졌다. 지금 이곳엔 경동시장이 있다.

경동시장은 6·25전쟁 이후 경기도 북부 일원과 강원도 일대에서 들여오는 농산물과 채소 및 임산물들이 옛 성동역(현 미도파백화점 자리)과 청량리역,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하여 몰려들면서 형성된 재래시장이다. 특히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의료사업도 벌였던 옛 보제원터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경동 약령시장(서울약령시)은 교통이 편리한 점을 이용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 

 

 

 ▲ 서울 성곽에서 내려다본 성북동 전경. 1960년대 재개발 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달동네 주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탄생한 곳이다.

 

1960년대 초 20여 개 남짓했던 점포수는 1천여 개 규모로 성장해 지금은 350년 전통의 대구약령시를 앞질렀다. 현재 경동 약령시장은 전국 거래량의 70%를 차지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약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보제원의 전통과 20세기의 교통 상황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흥인문에서 보제원터가 있는 경동시장을 지나는 망우로는 조선시대엔 큰길이었지만, 혜화문(동소문)에서 성북구를 관통하는 옛길은 소로였던 듯하다. 물론 현재는 동소문로가 뻥 뚫려 있고, 지하철 4호선으로 서울 도심과 성북구·강북구·도봉구·노원구 등 서울 북동부 지역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이지만 말이다.  

 

 

                                                      

                           ▲ 전국 한의약 거래량의 70%를 차지하는 경동약령시장. 350년 전통의 대구 약령시장 규모를 훨씬 앞질렀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소문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제일 먼저 성북구다. 성북동과 보문동 일대는 전통가옥이 많고, 서울 도시 개발의 초창기인 1960년대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중상류층의 단독 주택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 한 편 들어보자.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 가슴에 금이 갔다. /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의 작품이다. 이 시는 1960년대 성북동 지역의 택지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동대문구 한의약박물관에 있는 보제원 모형. 보제원은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피는 의료사업도 벌였다. /경동 약령시장 한의약거리에 있는 보제원 유지비.

 

시의 무대가 된 성북동은 돈암장·선잠단·간송미술관·이태준 고택·심우장·성락원·길상사 등 서울의 어느 곳보다도 옛 사람의 흔적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해 고샅길을 누비다 보면 옛 정취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성곽과 연계하면 가히 서울 으뜸 산책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성북동에서 빼놓고 싶지 않은 곳이 있다. 그렇다.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을 얻은 최순우 선생 옛집에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정갈한 문체를 그려본 뒤, 일제 강점기 때 10만 석에 달하는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혜원화첩 등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찾아낸 전형필 선생의 소장품을 전시한 간송미술관에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문화 독립운동가의 고고한 체취를 맡아보고 싶다. 비록 매년 봄·가을에만 정기전을 열어 요즘 같은 겨울엔 감상할 수 없지만 말이다.

 

 

▲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있는 구 영릉의 석물들. 여주로 이장되면서 남은 것들이다.

 

  또 소설가 상허 이태준 고택도 사랑스럽다. 후손이 운영하는 찻집으로 바뀐 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상허가 글을 썼다는 사랑방에 앉아 한 잔 들며 그의 수필집 <무서록>을 뒤적이거나, 학창시절 <문장강화>를 읽으며 글쓰기의 엄격함에 전율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심우장(尋牛莊)은 또 어떤가. ‘님의 침묵’을 읊조리기 좋은 백담사계곡은 아니더라도, 만해의 성정처럼 늘 푸른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선 만해가 굳이 북향으로 집을 지은 까닭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런데, 심우장은 만해가 마지막으로 등을 기댄 집이기 때문일까. 심우장에서 떠올리는 ‘님’은 어찌하여 자꾸 만해가 되는지 정말 이상하다.

 

  성북구엔 유서 깊은 고개가 둘이다. 아주 큰 고개는 아니었지만, 모두 도성에서 북동쪽으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개였다. 바로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다. 아리랑고개는 정릉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예전엔 정릉고개로 불렸으나, 1926년 나운규가 이곳에서 한국 영화예술에 새 이정표를 세운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미아리고개는 할 말이 아주 많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같은 한성부라 해도 사대문 안쪽만 한양으로 느꼈듯이 일제강점기와 1960~70년대까지는 바로 이 미아리고개를 심리적인 경계로 느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토박이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광복 전엔 전차 종점인 돈암동까지가 서울이었고, 미아리고개 너머는 서울로 치지 않았다 한다.

 

▲ 불암산 남쪽 조망. 저멀리 왼쪽으로 아차산~용마산~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그런데, 미아리고개라고 말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점집·달동네·공동묘지, 그리고 텍사스촌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잠시 미아리고개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자. 예전엔 현재의 미아리고개를 되너미고개로 불렀다. 18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는 사산금표도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씌어있다. 또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 등 대부분의 지도엔 적유현(狄逾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돈암현(敦岩峴)도 있다. 모두 되너미가 한자로 바뀐 것이다.

‘되너미’엔 무슨 뜻이 있을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유래는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다고 하여 고개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한성을 벗어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당분간 큰 고개가 없으므로 마지막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 경사가 심해 고갯마루에 오르면 다시 요기를 해야 된다는 뜻, 즉 밥을 되(다시) 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하였다고도 한다.  

 

 

                       
              ▲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사지내던 선농단터.

 

 모두 나름대로 그럴 듯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이 길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되너미’에서 접두어 ‘되’는 ‘일이 힘에 벅차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형용사 ‘되다’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면 되너미고개는 경사가 심해서 되게 넘는 고개, 즉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 된다.

어쨌거나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북방의 여진족이 혜화문으로 도성을 출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 왕래하기는 했지만, 우마차가 통행하기 어려운 험한 고개였다. 그러니 1세기 전까지는 그다지 역할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엔 이 고개를 넘는 북한 인민군 탱크 부대를 막지 못했고, 인민군이 이 고개로 패퇴할 땐 북으로 끌려가던 가족을 눈물로 배웅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사연도 있다. 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태어났다.  

 

 

                              

  ▲ 일제강점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상허 이태준 고택. 지금은 후손이 수연산방이란 찻집을 열고 있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1933년에 짓고 만년을 보낸 심우장. 만해는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의 서릉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지. 지금도 뽕나무가 심어져 있다. 

 

 

  그러다 휴전 후 근대화가 진행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북동부 시민들이 도심으로 왕래할 때 거리가 가까운 미아리고개를 많이 이용했고, 강북구·도봉구·노원구의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통행량은 급증했다. 그 무렵 서울시는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내고 길 주변에 옹벽을 세웠다.

요즘 미아리고개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점집이다. 서울시청 자료를 찾아보니 미아리에 점집이 들어선 것은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 씨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원래 서울엔 남산 기슭인 중구 양동 판잣집에 맹인 역술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 동네가 재개발되자 그곳에 살던 이도병씨는 집값이 싸고 전차 종점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미아리 굴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점을 쳤다. 개업 2년만에 이씨는 가게를 얻었고, 10년만에 집 한 칸을 마련했다. 이 일이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동료 역술인들도 하나둘 정착하기 시작해 1980년대 중반에는 1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현재는 70여 곳의 점집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주소로는 성북구 동선동4가 279번지.

이렇게 미아리고개를 넘어서면 최근 시행된 성매매 특별법으로 썰렁해진 ‘미아리 텍사스촌’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시 서울 매춘업의 역사를 짚어보자. 각종 자료엔 매춘을 업으로 하는 유곽(遊廓)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해를 1904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중구 충무로 근처의 신마치(新町) 유곽이었다. 즉 1904년 10월 제일루가 처음 생겼고, 그로부터 한 달만에 충무로·소공동·태평동 일대엔 청풍루·속래관·월하루·송월루·경성루·정문루 등 10여 개 유곽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 신문엔 당시 신마치 주변에서 293명의 젊은 여성이 매춘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도 있다.

그러다 1948년 공창제도 폐지령에 의해 공창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는 사창의 번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몇 년 뒤 6·25 전쟁을 겪으면서 생계수단을 위한 매춘이 늘어났고, 1960년대 초엔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서울역·용산역·영등포역·청량리역, 그리고 종로3가 일대에 집장촌이 형성되었다.
 1961년 성을 팔고 사는 사람 모두를 무겁게 처벌하는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되었으나 유명무실했다. 그러던 1968년, 당시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커서 윤락지대의 대명사로 불렸던 ‘종삼’이 이른바 ‘나비작전’으로 철거되었다. 1945년부터 종로3가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종삼 집창촌은 6·25전쟁 후엔 종로 3·4가와 낙원동·봉익동·훈정동·인의동·와룡동·묘동·권농동·원남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나비작전’도 성공하지 못했다. 종삼에서 쫓겨난 이들 중 일부가 미아리와 강남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지금의 ‘미아리 텍사스촌’과 ‘강남 룸싸롱촌’이 형성된 것이다. 최근엔 서울 최대 규모인 ‘미아리 텍사스촌’을 비롯해 동대문구 전농동의 ‘청량리 588’, 용산역 부근, 강동구 ‘천호동 텍사스촌’, 영등포역 부근 등에 집창촌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강북구 미아동 주민들은 ‘미아리 텍사스촌’이란 말을 매우 싫어한다. 오죽하면 몇 년 전엔 ‘미아리 텍사스촌’란 말을 언론 등에서 관습적으로 쓰지 말 것을 호소하기 위해 10만 명이 넘는 구민들이 서명을 했겠는가. ‘미아리 텍사스촌’의 정확한 행정명은 ‘하월곡동 88번지 집창촌’이다.

위와 같은 서명 사건에서 보듯 적지 않은 미아동 주민들은 ‘미아리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선을 보거나 미팅을 했는데 집이 미아동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거나, 직장 동료들에게 ‘집이 미아리라 좋겠네~’ 하는 농담을 들었을 때는 정말 당장이라도 이사를 가고 싶은 심정이란다. 또 용한 점쟁이를 소개해달라고 할 때도 그렇고, 나이든 사람들이 공동묘지·달동네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때도 힘겹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미아동에 산다고 말하는 대신에 정릉이나 삼양시장 근처 등에 산다고 돌려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물론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미아리의 이미지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미아동을 품고 있는 강북구는 1973년 성북구에서 갈린 도봉구에 포함되었다가 1995년 도봉구에서 분리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점이 있다. 강북구? 명색이 강북구인데 왜 강이 없냐고. 한강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강북이라 했다는데, 그렇다면 강북에 있는 14개의 도가 모두 강북이 아닌가. 설령 그렇더라도 서울에서 한강을 뜻하는 ‘강’ 자가 들어간 구는 강남구·강동구·강서구·강북구인데, 유독 이 강북구만 한강에 접해있지 않다. 그것도 북한산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 있다.

그래서 서울의 각 구의 명칭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가장 성의 없는 작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하긴 얼핏 생각하면 북한산·삼각산·인수봉 등등 대표하는 명소가 많기 때문에 작명이 수월했을 듯하지만, 그 봉우리들 정상의 주소가 거의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니 전문가들도 고민이 많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북한구’가 이상하면 ‘북한산구’, ‘삼각구’가 이상하면 ‘삼각산구’, 그리고 ‘백운구·인수구·우이구’ 등등 부르다 보면 정 들 좋은 이름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한강과 전혀 상관없는 데도 강북구라니.

길손은 이 중에 상징과 위치 등등 부족할 게 없는 ‘삼각산구’라는 명칭이 가장 맘에 든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면서 현재 강북구청에서 삼각산 옛이름 찾기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으니 더욱 인연이 깊지 않은가. 북한산이 삼각산이란 이름을 되찾는 날, 과연 강북구의 명칭도 바뀔 수 있을까. 대관령으로 유명한 평창군 도암면이 2006년에 대관령면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삼각산 운운에 눈치를 챘겠지만, 누구든지 강북구에 들어섰다면 아마도 거대한 암봉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최고봉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의 인수봉, 남쪽의 만경대가 삼각뿔을 이룬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리던 북한산은 금강산·지리산·묘향산·백두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으로 꼽혔던 명산이다.

백제시대 들어 북한산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정약용이 지은 <위례고>엔 ‘위례성은 백제 시조가 처음 도읍하였던 곳으로 옛 자리가 지금 한양성 동북쪽에 있다. 하북 위례성의 옛 자리는 지금 경성의 동북쪽 10리 되는 곳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주민들이 그곳을 잘못 불러 한양 고현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하북 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북한산 동쪽 어디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전문가들은 범위를 좁혀 지금의 미아동 주변을 온조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하북 위례성 자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 아차산 정상에서 감상하는 여명. 도도히 흐르는 한강 너머로 옛 백제 위례성이 서서히 밝고 있다.

  

  북한산 기슭의 수유동은 독립의 열망과 민주화의 소망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민주화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가장 북쪽엔 4·19혁명의 희생자 281명의 민주 영령이 잠들어 있는 4·19국립묘지가 있다. 그 주변으론 독립협회 조직 항일투쟁, 헤이그 밀사로 나갔던 이준 열사,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손병희 등 24명의 열사 묘소가 흩어져 있다.

강북구에선 이곳을 탐방코스(6.7km)로 잘 꾸며놓고 매년 가을 강북구민 한마음 걷기대회를 열고 있고, 강북구 공무원으로 발령이 나면 반드시 이곳에 들러 묵념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각오를 다진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화계사는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최현배 등 국문학자 9명이 모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공포한 곳이기도 하다.  

 

 

                          

  ▲ 아차산 입구 골목길의 고구려 벽화. 아차산성엔 고구려가 70여 년간 한강 유역을 지배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북한산의 대표 들머리인 우이동 등산로 입구에서 얼마쯤 오르면 봉황각이 반긴다. 손병희 선생 등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젊은이들을 합숙훈련시키던 곳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차로 오를 수 있는 큰길 끝에 있는 도선사는 신라 말기인 862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집. ‘천 년 후 불법과 국운을 일으킬 곳’이라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에 일제가 절에 불을 질렀다. 도선국사가 손가락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높이 20m 암벽에 새겨진 관세음석불에 눈 맞춘 뒤, 본격적으로 산행할 작정이 아니라면 북한산 자락을 벗어나야 한다.  

 

 

                            

                    ▲ 아차산에서 바라본 광진구 쪽의 조망. 아차산은 사방으로의 조망이 빼어나다.

 

 

  잠깐, 북한산과 헤어지기 전에 꼭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육당 최남선의 옛집 소원(素園)이 있던 자리다. 1939년 건설된 이 집에서 육당은 1941년부터 1952년까지 거주했는데, 일제 말기 친일파로 변절하면서 강연과 신문 논설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을 적극 독려한 곳이다. 고택 보존을 놓고 찬성이냐 반대냐 수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지난 2003년에 철거하고 말았다. 이력 들추기를 껄끄러워하는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철거를 원하기도 했으나 말년에 친일을 한 집이란 이유가 가장 컸다. 소원은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남쪽으로는 정원이 있고 집 주위엔 향나무·전나무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에 5층짜리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우이동에서 고개를 넘어 방학동으로 건너가 연산군묘와 은행나무를 보면 북한산 자락은 거칠게나마 둘러본 게 된다. 이쯤에서 북한산과 헤어지고 도봉산 기슭으로 넘어간다. 도봉산 동쪽, 지금의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 근처엔 누원(樓院)이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이 지역이 조선시대엔 독특한 상권으로 제법 호황을 누렸다.

누원은 한성에서 원산을 거쳐 경흥의 서수라까지 연결될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연천·적성·포천·영평으로도 이어지는 자리였다. 즉 당시 한성에서 북동쪽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었기 때문에 함경도 원산만 일대에서 나는 어물과 길주·북청·종성·회령 등지에서 생산된 포목 등을 도중에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곳은 도성 시전의 금난전권 밖에 있으면서도 비교적 도성에서 가까워 성안의 독점적 도매상인인 사상도고들과 연결이 쉬웠다. 게다가 성안의 영세 상인들까지도 직접 이곳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법 번창했다. 그렇게 도성의 시전상인들 애를 먹였던 큰 장이 섰던 누원이건만 현재는 도봉동의 누원초등학교, 누원고등학교 등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봉서원·천축사 등을 둘러본 뒤 도봉산 기슭에서 벗어나려면 중랑천(中浪川)을 건너야 한다. 한강의 지류 중 서울 북동부의 가장 큰 젖줄인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와 서울 북동부를 남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옛 이름은 중량천(中梁川)이지만, 이름도 많아 의정부에서는 두험천(豆驗川), 경기와 서울의 경계에서는 도봉서원에서 유래한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 도봉구 창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내(漢川), 한계(漢溪) 등으로 불렸다.

중랑천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곳은 기름 진 농토 펼쳐진 마들 지역의 상계동·중계동·하계동으로 대표되는 노원구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배밭·배추밭 천지이던 이곳에 1980년대 이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노원구는 일약 서울 최고의 주택단지로 변신했다. 통계를 보니 2007년 3월31일 현재 서울시 전체 인구는 10,381,711명인데, 25개 구 중에서 노원구의 인구는 633,934명으로 가장 많았다.

 

하천이 있으면 다리도 필요한 법. 현재 중랑천엔 수많은 다리가 걸려 있다. 상류서부터 큰 다리만 꼽아도 노원교·상계교·창동교·녹천교·월계교·월릉교·중랑교·장안교·장평교·군자교, 그리고 청계천과 합류한 구간엔 성동교·성수교·용비교 등 10여 개가 훌쩍 넘는다. 이 다리들은 현재 서울 중심부에서 북동부의 노원구·중랑구를 연결해주고, 또 경기도 방면으로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엔 속계교(송계교)·중량교·살곶이다리 정도만 존재했다. 돌다리였던 속계교는 현재 월릉교 자리로서 그 흔적은 월릉교 밑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량교는 지금의 중랑교 자리인데, 원래 나무다리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하류 지점에 있는 살곶이다리(사적 제160호)는 돌다리로 한자로는 전곶교(箭串橋)다. 1420년(세종 3)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기초만 세웠다가 60여 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길이 78m, 너비 6m로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였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야누스의 얼굴처럼 묘한 형태가 되었다. 현재 주민들은 이 다리를 건너 일을 보러 다니고, 운동도 하는 등 요긴하게 쓰고 있다. 쓰라린 기억 하나 되살리자면,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다리를 건너갔다.

서울 도심에서 동부의 경기도로 빠지는 도로는 북부간선도로와 6번 국도가 제일 크다. 두 길 사이에 솟은 게 바로 봉화산(160.1m)이다. 이곳엔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아차산 봉수대(서울기념물 제15호)가 있었다.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온 연락을 남산에 최종적으로 보고하던 곳이다. 하지만 이 봉화대 역시 병자호란 때 국경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서울은 상업이나 서비스업 등 3차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특산물이라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나마 옛날 봉화산 일대에서 재배되던 ‘먹골배’가 유명하다. 먹골배는 묵동의 옛 이름인 먹골에서 따온 것인데, 이 지역의 땅에는 모래가 많아 배가 달고 맛있었다고 한다. 먹골배는 이후 신내동·중화동·성북동 일대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공릉동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하고 있을 뿐 대부분 경기도 구리시·의정부시쪽으로 옮겨갔다. 조선시대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호송을 맡았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은거하며 배를 가꿨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배밭이 적지 않다. 그래서 여긴 봄이 제일이다. 그것도 배꽃 피는 4월 초순 무렵 이 근처를 지나다보면 서울이면서도 농촌 같은 정겨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이래저래 조망의 즐거움이 많은 도시다. 남산의 서울타워, 여의도 63빌딩 등이 있으나 북동쪽에선 이런 인위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조물주가 빚은 자연의 봉우리가 조망처가 된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서울 북쪽의 대표적인 명산은 모두 조망이라면 전혀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전체를 연결한 불수도북 산행은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하지만 망우리고개 조망도 빠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4대 명산을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이지 싶다. 그래서 이성계도 지금의 구리 동구릉에 자신의 음택을 잡고는 이 고갯길에 올라 근심을 잊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성계도 그랬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도 세상 근심을 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망자가 되는 것일 터.

 

  ▲ 망우리공원묘지의 산책로. 만해 한용운, 박인환 시인 등 수많은 명사가 묻혀 있는 이 묘지의 산책로는 ‘사색의 길’이란 이름을 얻었다.

   

 망우리고개 주변의 망우산(281.7m) 일대에 조성된 망우리 공원묘지는 서울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다. 일제강점기에 미아리 공동묘지를 옮기면서 1933년 무렵부터 묘가 들어섰다. 사연 없는 무덤 없겠지만,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 명시 ‘님의 침묵’을 지은 승려 시인 만해 한용운, 우두 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며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문명훤,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그리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하고 노래했던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묻혀 있다.

그런데, 이곳은 으스스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산책코스도 있는 공원묘지다. 실제로 한겨울인데도 묘지 순환로엔 친구들끼리 찾은 소녀들, 아이 손을 잡고 찾아온 가족,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연인, 남쪽의 아차산부터 산줄기를 연결하여 걸어온 등산인들로 매우 활기가 넘쳐났다. 산책로 양쪽엔 아름드리 벚나무가 즐비하니 아마 봄 풍광도 일품일 터. 꽃잎 휘날리는 봄날에 다시 한 번 찾고 싶다. 잠깐, 망우리 묘지공원 안에 있는 산책로 이름은 바로 ‘사색의 길’이다.

 

 ▲ 망우리공원묘지의 산책로. 만해 한용운, 박인환 시인 등 수많은 명사가 묻혀 있는 이 묘지의 산책로는 ‘사색의 길’이란 이름을 얻었다. /중랑천 하류의 살곶이다리는 요즘도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절반은 콘크리트로 복원이 되어 있다.

  

  아차산과 광나루를 끼고 있는 광진구는 고구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원래 백제의 땅이었으나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쳐들어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551년 나제연합군에게 빼앗길 때까지 서울 지역은 70여 년 동안 고구려 영토가 된다. 장수왕은 백제와의 전투 당시 개로왕을 사로잡아 이 산성 아래에서 목을 베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싸우다 목숨을 잃은 곳도 이 아차산성이라는 설화도 전한다.

고구려가 한강을 지배할 당시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전방기지였다. 그래서 이곳엔 당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알려졌던 아차산성 이외에 17개의 보루를 찾아냈고, 2,750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남한에선 충주의 중원고구려비 외에 고구려 유적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17개 보루 중 아차산 지휘부였던 홍련봉 보루를 포함해 9개소나 품게 된 광진구는 한껏 들떠있다. 그래서 매년 1월1일 해맞이 축제, 10월 아차산 고구려축제를 벌이고, 현재 고구려 유적공원과 박물관 건립을 위한 고구려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 서울 북동부 명소 위치도

 

아차산은 높지도 빼어나지도 않은 아담한 산이다. 하지만 능선의 보루에 서면 한강에 접한 최고의 요새답게 사방 조망이 아주 좋다. 북쪽과 서쪽으론 불수도북 산줄기 안에 폭 안긴 서울 강북 지역이 한눈에 들고, 동쪽으론 구리·남양주의 산천이, 남쪽으론 한강 너머로 강남의 빌딩군이 펼쳐진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줄기와 시가지 전체를 거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면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닌가.

무엇보다 아차산 보루에서 감상하는 일출은 여느 높다란 산정이나 관동팔경의 동해 일출과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 너머의 산봉우리에서 솟아올라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밝게 비추는 붉은 태양. 때맞춰 까마귀라도 날았다면 삼족오의 환생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저 한강을 굽어보며 어찌 장수왕과 개로왕이 백척간두의 대결을 벌이던 1,500여 년 전으로 상상의 날개를 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허 이태준 고택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 고택(시민속자료 제11호)은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머물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1933년에 지은 개량한옥으로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를 결합한 본채로만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이태준의 후손이 당호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이름으로 녹차·대추차·오미자차·더덕주 등을 판매하는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입구 2112번·1111번 시내버스와 성북03번 마을버스 이용. 전화 02-764-1736

 

 

             

 
심우장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시기념물 제7호)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33년에 짓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만해는 한일늑약이 체결되자 중국에 망명했다가 1913년에 귀국했다.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명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44년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이 있다.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해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입구 2112번·1111번 시내버스와 성북03번 마을버스 이용.
 

 간송미술관 

성북구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은 한국 전통미술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이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수장품을 정리·연구하기 위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속기관으로 발족됐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제70호), 동국정운 권1, 6(제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제72호), 금동삼존불감 (제73호), 청자압형수적(제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제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제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제149호),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제135호)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매년 봄·가을 정기전을 갖는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입구에서 2112번·1111번 시내버스와 성북03번 마을버스 이용.

선잠단지

성북구 성북동 성북초교 근처에 있는 선잠단지(先蠶壇址·사적 제83호)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의 잠신(蠶神·누에신) 서릉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1471년(조선 성종 2)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 남쪽 앞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입구에서 2112번·1111번 시내버스와 성북03번 마을버스 이용.

 

정릉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사적 제208호)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 정동에 있었으나 도성 안이라는 논란이 있어 1405년(태종 5)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태봉의 미움으로 수백 년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의 상소로 왕후 무덤의 격을 갖추게 됐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어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해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든 왕비의 무덤이다. 관람 09:00~17:30(하절기 18:30), 1시간 전 매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 6번 출입구에서 아리랑고개 방향 100m 지점에서 정릉행 버스 승차. 전화 02-914-5133

 

 

의릉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사적 제204호)은 조선 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무덤이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왕위에 오른 지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관람 09:00~17:30(하절기 18:30), 30분 전 매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1호선 신이문역 1번 출입구에서 도보 15분.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7번 출입구에서 도보 15분. 전화 02-964-0579

 

최순우 고택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고택(시등록문화재 제268호)은 고고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최순우(1916-1984)가 살았던 옛

집이다. 1930년대에 지은 전통 한옥으로 전형적인 경기지방 한옥 양식이다.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해 2003~4년 복원해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을 얻었다. 안채는 전시 공간으로 이용하고 동편 행랑채는 사무실, 서편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게 공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개방시간 4~11월 화~토 10:00~16:00.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입구에서 도보 10분. 전화 02-3675-3401 

 

성락원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성락원(城樂苑)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을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별궁으로 삼은 정원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앞뜰·안뜰·바깥뜰로 나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이곳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다래나무·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뜰에는 영벽지와 폭포가 있고, 바깥뜰에는 송석과 연못이 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입구에서 2112번·1111번 시내버스와 성북03번 마을버스 이용.

 

돈암장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은 목조 팔작지붕의 한옥 건물이다. 193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배희한(裵喜漢)이 궁궐 양식으로 지었다. 이승만이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2년간 거처했으며, 첫 내각을 조직한 곳으로 한국 근대 정치사에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돈암장 남쪽 정원에는 연립주택 등이 들어서 있고 현재는 본채만이 남아 있다. 건물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됐지만 외관은 건립 당시 그대로다.

 

한의약박물관

동대문구 용두동 동의보감타워 지하 2층에 있는 한의약박물관은 동대문구청이 설립한 구립박물관으로서 한국의 전통 한의학 관련 유물과 한약재 등을 전시하고 있다. 탕약제조기와 한약재 제조장비 등 한의약 관련 유물 400여 점과 한약재 500여 점을 전시해 한의약의 역사, 한방의 원리, 한의학 명의와 고서 등이 갖춰져 있다. 또 한방 체험실, 다목적 교육실, 조선시대 환자 치료를 위해 설치한 보제원 모형 등도 마련됐다. 입장 무료.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3번 출입구에서 도보 3분, 2호선 용두역 2번 출입구에서 도보 7분. 전화 02-3299-4900~3

 

 

영휘원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 옆에 있는 영휘원(사적 제361호)은 조선시대 고종의 계비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다. 엄비는 1897년(광무 원년) 원자 은을 낳아 귀인으로 책봉됐고, 그 후 순비, 순헌귀비로 책봉됐다. 1898년 아관파천 때는 고종황제를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했다. 원래 영휘원 근처에는 명성황후 민씨를 모신 홍릉이 있었으나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으로 이장했다. 관람시간 09:00~17:30. 관람료 400원. 월요일 휴관.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입구에서 도보 5분,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입구에서 도보 10분.

 

세종대왕기념관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3년 개관했다. 전시관은 재위 32년간의 업적이 그림으로 표현된 일대기실, 한글 관련 문헌을 전시한 한글실, 세종 시대에 정비된 각종 국악기와 관련 자료가 있는 국악실, 활자 관계 유물을 비롯해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의 발명품이 전시된 과학진열실 이렇게 4개 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이곳에는 능엄경언해(보물 제763호),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제769호), 금강경삼가해(보물 제772-1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보물 제837호), 수표석(보물 제838호)를 비롯해 세종대왕신도비, 구영릉 석물 12기가 있다. 관람시간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30~17:00. 관람료 어른 1,800원. 일요일 무료. 월요일 휴관.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입구에서 도보 5분,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입구에서 도보 10분. 전화 02-969-8851

 

선농단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사적 제436호)은 농사의 신인 고대 중국의 제왕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이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도 한 우리나라 전통 농경문화의 상징적 유적이다. 지금은 사방 4m의 돌단만이 남아 있다. 행사가 끝나면 중신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가자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소를 잡아 국말이밥을 내렸는데 이를 선농탕이라 했으며 오늘에 와서 설렁탕이라 부르게 됐다. 요즘에는 농림부·동대문구청·동대문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4월20일 선농제향을 재현하고 있다. 6호선 안암역에서 도보 10분.

 

홍릉수목원

동대문구 청량리동 임업연구원 내에 있는 홍릉수목원은 1922년 임업시험장을 설립하면서 조성된 한국 최초의 수목원이다. 전체 면적 44만㎡이다. 현재 북한지역 자생 수종을 제외하고 총 157과 2,035종의 국내 식물 2만여 개체를 수집·식재해 전시하고 있으며, 석엽 등 각종 표본 4,245종을 소장하고 있다. 수목원 안에는 산림·임업 등에 관한 정보가 집대성한 산림과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개방시간은 일요일 10:00~17:00. 입장료는 무료. 평일에는 예약. 월요일 휴관.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입구에서 도보 10분. 전화 02-961-2873~4

 

 

경동시장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용두동에 있는 경동시장은 농·수·축산물·건어물, 인삼·한약재 등을 도소매하고 있는 시장이다. 6·25전쟁 이후 경기도 북부 일원과 강원도 일대에서 들여오는 농산물과 채소, 임산물들이 옛 성동역(현 미도파백화점 자리)과 청량리역을 통해 몰려들면서 형성됐다. 특히 옛 보제원터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서울약령시(경동 약령시장)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한약재를 취급하는 한약 전문시장으로 유명하다. 한의원 324개소, 약국 312개소, 한약도매업체 57개소, 한약수출업체 99개소 등 한약관련업체 899개소가 밀집되어 있다. 

 

답십리 고미술상가

골동품점, 도자기점 등이 즐비한 동대문구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문화재이자 박물관이다. 청계천8가, 이태원, 아현동 등지에 흩어져 있던 고서화, 고가구, 도자기 상점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현재 139개 점포가 50만 점의 골동품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이 거리는 파출소를 경계로 동부거리(장안평 상가)·서부거리(삼희상가)로 나뉜다.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1번 출입구에서 도보 2분, 4번 출입구에서 도보 5분. 일요일 휴관.

 

화계사

수유동에 있는 화계사(華溪寺)는 조선시대인 1523년(중종 17)에 신월(信月)이 창건했다. 1618년(광해군 10)에 화재로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고, 1866년(고종 3) 용선·범운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퇴락한 건물들을 보수했다. 경내에는 팔작지붕 다포계의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천불오백성전·범종각·보화루·학서루 등이 있다.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범종각에는 1683년에 주조한 화계사 동종(보물 제11-5호)을 비롯해 오래된 목어·북·운판이 걸려 있다.

 

천축사

도봉산 만장봉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천축사(天竺寺)는 673년에 의상이 수도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를 세웠고, 고려 명종 때 영국사(寧國寺)가 들어섰다. 1398년 조선 태조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해서 절을 새롭게 고치고 천축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1474년 왕명으로 중창했고,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화류용상을 절에 바치고 불당 안에 부처를 모시는 불좌를 만들었다. 그 뒤 여러 번 다시 고쳐 지었다.  

 

도선사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에 있는 도선사(道詵寺)는 통일신라 862년(경문왕 2) 도선국사가 이곳의 산세를 1천 년 뒤의 말법시대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바위를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머물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와 호국참회원(護國參會院)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과 실천불교·생활불교 운동을 전개해 대찰이 됐다. 

4·19 국립묘지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4·19국립묘지는 1960년 4·19혁명 당시 유명을 달리한 민주 열사를 모신 공간이다. 당시 자유당 부패정권과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대적인 학생운동이 1960년 4월19일을 절정으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 12년간에 걸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1963년 건립한 이 묘역에는 현재 237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개방시간 06:00~18:00. 지하철 4호선 2번 출입구에서 01번 마을버스 이용. http://419.mpva.go.kr 전화 02-996-0419

 

육당 최남선 고가터

우리나라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로서 근대문학을 개척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북한산 아래의 우이동 5-1의 소원(素園)이란 고택에서 1941년부터 1950년까지 집필활동을 했다.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남쪽으로는 정원이 있고 집 주위에는 향나무, 전나무 등 수목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친일활동 장소라는 이유로 2003년 철거됐고, 현재 이곳엔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도봉산

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양주군 장흥면에 걸쳐 있는 도봉산(739.5m)은 북한산(北漢山)과 함께 북한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과 나란히 솟아 있으며, 북으로 사패산이 연이어 있다. 자운봉·만장봉·선인봉·주봉·우이암과 서쪽으로 5개 암봉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오봉 등 도봉산은 전체가 걸출한 바위성체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선인봉은 암벽등반 코스로 유명하다. 또 문사동계곡·원도봉계곡·무수골·오봉계곡 등 수려한 계곡을 많이 품고 있다.

 

각 봉우리와 계곡을 따라 수많은 등산로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면 100개 이상 엮을 수 있는데, 이들 등산로 중에서도 핵심은 포대능선 길이다. 도봉산 대부분의 등산로는 이 포대능선~자운봉~칼바위~우이암 능선으로 이어진다. 도봉산의 등산로 기점은 북쪽부터 시계 바늘 방향으로 안골계곡 기점, 회룡골 기점, 원도봉유원지 기점, 도봉유원지 기점, 무수골(성황당) 기점, 우이동 기점 이렇게 6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지하철 1호선·7호선 도봉산역.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사무소 전화 031-873-2791~2 <지도=특별부록 참조>

 

연산군묘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燕山君墓·사적 제362호)는 연산군과 그 부인 거창신씨의 묘소다. 성종의 원자인 연산군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폐왕이 되어 연산군으로 강봉되고 강화 교동에 유배됐다가 1506년 31세에 병사했다. 묘의 시설은 대군으로 예우해 봉분·곡장·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을 갖췄으나, 병풍석·석양·석마 등은 세우지 않았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선시대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묘역 아래쪽에는 궁인 조씨 및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다. 

 

 

도봉서원

도봉구 도봉산 기슭에 있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은 1573년(선조 6)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봉안했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696년에는 송시열을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자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됐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됐다.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옹기민속박물관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옹기민속박물관은 2,500여 점의 옹기 관련 유물을 소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옹기 전문박물관이다. 1991년 고려민속박물관으로 설립했고, 1994년 옹기민속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시 공간은 옹기전시실, 민속생활용품 전시실,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이 도예교실, 민화교실, 다도교실 등 다양한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시간 10:00~17:00(하절기 18:00)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2,000원. 전화 02-900-0900, 0399

 

 

방학동 은행나무

방학동 연산군묘 옆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800~1,000년으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추정되는 서울시 보호수 1호다. 높이 25m, 둘레 10.7m의 거목이 가지와 잎을 부채꼴로 펼치고 있다. 예로부터 나무에 빌면 아들을 낳게 해주는 신령수로 통한다. 근처에 파평윤씨 일가가 600여 년 전부터 먹었다는 원당샘이 있다. 1990년대 은행나무 주변에 아파트 대단지와 빌라촌이 들어서면서 생육에 지장을 받았다. 이에 처진 나뭇가지에 지지대를 세우고 병충해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여러 차례나 받았다.

 

아차산 봉수대

아차산 봉수대(시기념물 제15호)는 중랑구 상봉동·중화동·묵동·신내동에 접해 있는 봉화산(160.1m)에 세워진 조선시대 통신수단이다.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온 연락을 남산에 최종적으로 보고하던 곳이다. 예전에는 광장동 아차산성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문헌에 아차산 주봉에서 북쪽으로 벗어난 능선의 서쪽 봉우리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어 이곳이 아차산 봉수대터임이 밝혀졌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 복원했다.

 

 

망우리공원묘지

중랑구 망우동·면목동,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솟은 망우산(281.7m) 일대에 조성된 망우리공원묘지는 서울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다. 1933년 처음 묘가 들어섰고, 1973년 봉분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묘지 구하기가 어렵다. 현재 약 28,500기의 분묘가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 한용운, 우두 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문명훤,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소가 있다. 망우리공원 내의 내부순환도로 5.2km를 아스팔트로 포장해 ‘사색의 길’이라는 산책로를 만들었다. 

 

 

용마산 폭포공원

면목동 동쪽에 있는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중곡동 간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예로부터 중랑천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보루 유적이 있다. 용마산은 1961년부터 1988년까지 27년간 서울시의 도로 등 건설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던 곳으로 1993년 용마돌산공원으로 개장됐다가 인공폭포를 조성하면서 1997년 용마폭포공원으로 새롭게 개장했다.

 

 

수락산

서울시 노원구,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 사이에 솟은 수락산(638m)은 바위와 계류, 그리고 옥류폭포·은류폭포·금류폭포 등 아름다운 폭포가 어우러진 명산이다. 절터샘, 큰바위샘, 수암약수 등 약수 등도 산재해 쉽게 식수를 구할 수 있다. 평평한 마들평야를 끼고 도봉산과 마주보고 있다. 동쪽 기슭에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m의 석조미륵입상이 있는 내원암, 서쪽 기슭에 쌍암사·석림사, 남쪽 기슭에 학림사·흥국사 등 작은 사찰이 많다.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불암산
노원구와 남양주시에 솟은 불암산(508m)은 정상부분이 모두 바위를 이룬 남성다운 풍모를 자랑하는 산이다. 불암산 정상에서는 도

봉산, 북한산, 수락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정상 남동쪽에는 신라 지증국사가 세운 불암사와 그 부속암자인 석천암이 있고, 남쪽에는 조선시대에 무공이 세운 학도암 등이 있고, 서쪽에는 경수사·천보사·정암사 등이 있다. 산정에는 옛 성터와 봉화대터가 남아 있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

 

 

살곶이다리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있는 중랑천 하류의 살곶이다리(사적 제160호)는 조선시대의 돌다리로 원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고,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길이 78m, 너비 6m로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한다. 1420년(세종 3) 공사를 시작했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기초만 세웠다가 1483년(성종 14)에 완성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었는데, 1972년 서울시에서 복원했으나 원형 그대로 복구하지 못했다.

 

태강릉

노원구 공릉동의 태강릉(泰康陵·사적 제201호)은 태릉선수촌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태릉, 동쪽에 강릉이 있다. 태릉은 조선 중종의 비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 비 인순왕후의 능으로 이 둘을 합쳐 태강릉이라 한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공개되지 않던 강릉은 이르면 2008년 봄에 개방될 예정이다. 태릉 관람시간 하절기 09:00∼18:30, 동절기 09:00∼17:30. 마감 1시간 전 매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1번 출구에서 202번, 1225번 시내버스로 5분 소요. 7호선 태능입구역 7번 출구에서 1155번·1156번 시내버스로 10분 소요. 전화 02-972-0370, 02-948-5668 

 

한글고비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이윤탁 한글영비(보물 제1524호)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국어학적 가치가 높다.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 문인 이문건이 선친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신씨를 합장하며 후세에 비석과 묘를 해칠 것을 염려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왼쪽 면에 한글로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이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지하철 7호선 하계역 3번 출입구에서 1141번 버스 이용.

 

뚝섬 서울숲

성동구 성수동 뚝섬 일대에 있는 서울숲은 2005년 뚝섬 일대에 조성된 시민공원이다. 면적은 1,156,498㎡(약 35만평)이며 문화예술공원, 자연생태숲, 자연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한강수변공원 총 5개 테마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시설로는 야외무대, 서울숲광장, 환경놀이터, 자전거도로, 산책로, 나비온실 등이 있다. 자전거 대여(011-9161-7675) 시간당 3,000원. 입장료는 무료. 주차료 소형 10분당 300원. 지하철 2호선 뚝섬역 8번 출입구에서 도보 5~10분. 전화 02-460-2905

 

 

응봉산 개나리동산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응봉산(95m)은 산은 낮아도 한강 등 주변 조망이 좋다. 팔각정이 있는 정상에서는 한강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매년 4월 초가 되면 온통 노랗게 물든 개나리꽃으로 뒤덮이기 때문에 개나리동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무렵 열리는 개나리축제에서는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 글짓기, 사진전시회, 노래자랑, 먹거리장터, DDR경연대회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아차산성
광진구 광장동·구의동 아차산에 있는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서쪽·남쪽에 성문터(城門址)가 남아 있다. 매년 1월1일 아차산 해맞이 축제가 열리고, 10월에는 아차산 고구려 축제가 열린다.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와 아차산역 2번 출입구에서 아차산 입구까지 도보 10분.

 

어린이대공원
광진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은 1973년 개장한 가족 단위 휴식공간이다. 입구의 서문부터 어린이 자유학습장과 가족공원으로서 각종 시설물이 펼쳐져 있다. 공원 심장부인 ‘새싹의 집’에는 동화실·영사실·과학실·민속실·미술실 등이 있고, 그 오른쪽에 야외음악당이 있어 5,000명이 음악당 앞 잔디밭에 앉을 수 있다. 식물원에는 열대식물이 가꾸어져 있으며, 동물원에는 애완동물과 조류가 사육되며, 야외 방사장도 있다. 휴게소인 육각정, 전망대격인 팔각정 등이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놀이동산 아이랜드에는 하늘차·번개차·회전그네·요술집·꼬마기차 등 다채로운 오락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공원 입장은 무료이지만, 놀이동산·동물공연장·바둑이랜드 등은 대부분 유료시설이다. 주차료 10분당 승용차 300원.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1번 출입구(어린이대공원 정문), 5호선 아차산역 4번 출입구(어린이대공원 후문). 전화 02-450-9311

<출처> 월간산 460호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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