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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3-남동부, 상천벽해 강남에 어린 백제의 향기

by 혜강(惠江) 2008. 3. 11.

 

서울 3 남동부

상천벽해 강남에 어린 백제의 향기

 

민병준의 향토기행

 


▲ 백제 전기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몽촌토성. 강남 지역의 개발 광풍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높다란 빌딩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았다.

 

 

  한강을 건넌다. 천호대교,  노원 쪽에서 서울의 남동부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는 게 가장 무난하다.  물론 조선시대라면 광나루에서 나룻배를 이용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도를 놓고 세어보니 현재 서울 주변 한강 물줄기엔 모두 27개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 최초의 다리는 1900년에 세워진 한강철교(용산~노량진)다. 이후 여기저기 다리가 들어섰는데, 한강 하류부터 살펴보면 가장 최근인 2008년 1월 개통된 일산대교를 비롯해 김포대교·행주대교·방화대교·가양대교·성산대교·양화대교·당산철교·서강대교·마포대교·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잠수교·반포대교·한남대교·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청담대교·잠실대교·잠실철교·올림픽대교·천호대교·광진교·강동대교가 있다. 이외에도 현재 올림픽대교와 암사대교도 건설 중에 있으니 한강은 100여 년만에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버린 셈이다.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서울 남동부 지역 여정은 한강 상류에서 하류쪽으로 물길 따라 내려가며 강동구~송파구~강남구~서초구 순서로 훑어보는 게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하면 선사시대에서 백제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을 무난히 따라갈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서울 남동부 첫 방문지는 강동구의 대표 유적지인 암사동 선사유적지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80여 년 전인 1925년 여름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수많은 기록들엔 서울 한강 유역을 덮쳤던 대홍수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 서울 전역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강변 물가의 적지 않은 마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침수 피해를 입었고, 강변의 정자나 문화유산도 떠내려갔다.

 

 

▲ 몽촌토성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조선시대 한강 뱃길의 기착지였던 암사동 일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이 대홍수 때 언덕이 허물어지면서 발견되었다. 이후 몇 차례 발굴한 결과, 맨 아래의 제1층에서는 신석기시대 유물, 중간의 제2층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 맨 위의 제3층에서는 백제의 토기조각 등이 나왔다.

  결국 이곳은 기원전 4,000년 무렵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유적지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입장료(500원)보다 주차료(2,000원)가 4배나 비싼 곳이지만 한두 시간 둘러보며 해설사의 설명을 듣다보면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

  선사유적지를 나와 남쪽으로 뻗은 큰 길 선사로를 타면 천호동을 지난다. 인가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라는 강동구의 천호동은 예전엔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의 일부로서, 광나루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나루터) 촌락이다. 광나루는 서울에서 광주로 통했으며, 한강 뱃길로는 멀리 충주를 거쳐 영남대로를 따라 동래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가는 요충지였다. 1936년에 광진교가 놓이면서 천호동과 서울 연결이 육로로 바뀌었고, 서울 도심쪽의 도시화 물결이 광진교를 손쉽게 건너서 천호동쪽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 강동구에 있는 암사동 선사주거지. 기원전 4,000년 무렵인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다.

 

 

  천호동을 벗어나면 백제가 손짓한다. 제일 먼저 풍납토성이 반긴다. 한강 유역을 최초로 장악한 고대 국가는 백제였다. 그런데 백제의 기원은 설이 다양하다. 백제의 시조가 온조 1명이라는 설, 비류·온조 2명이라는 설, 비류·온조·구태 3명이라는 설 등이다. 이외에도 비류가 세운 나라가 본래의 백제이고, 고이왕 때 온조백제로 교체되었다는 비류백제설, 비류·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시조라고도 하는 서소노백제설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내용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동생 온조는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도읍을 정할 지세를 살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쪽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말렸다. 

                             

▲ 암사동 선사주거지 움집 안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 암사동 선사주거지에서 빗살무늬토기 만들기 체험. 아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이온데, 이곳에서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가서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짜서 사람 살기 적당치 않자 비류는 부끄러워 후회하다 죽었고, 그 백성들이 하남 위례성으로 돌아와 온조의 백성들과 합치게 된다. 이후 백제는 고이왕(?-286)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이후 475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있었던 500여 년간(BC 18-AD 475)을 흔히 한성백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성백제의 도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 밀려 금강쪽으로 내려간 뒤 위례성이 철저히 파괴된 데다 남아있던 고분도 세월이 흐르며 거의 도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송파구 일대를 하남 위례성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엔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비롯해 백제 초기에 세워진 적석총, 고분 등 한성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파구에 널려 있는 백제 그림자 밟기는 공주나 부여 답사와는 또 다른 빛깔의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지상 5층 이상 건물을 신축할 수 없는 탓에 고만고만한 3~4층짜리 건물들 사이로 길게 이어진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원래 둘레가 4km나 되었으나 1925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2.7km 정도만 남아 있다. 예전엔 토성 위를 거닐 수 있었으나 지금은 성벽 아래에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덕에 인근 송파·강동구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몽촌토성.
 
  그런데, 1990년대 말에 부분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유물과 건물지 등이 대량으로 나오자 학자들은 이곳을 한성백제 시대 왕이 머물던 위례성이거나 여러 위례성 중 하나라 여기고 있다.

  그러던 중 2000년 재개발조합 주민들이 발굴 유적을 임의로 파괴하자 정부는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해 건물 신축을 제한해왔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주민들의 방해로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올해부터 다시 발굴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 한다. 만약 풍납토성이 백제의 위례성으로 확실히 판명되면 700년 가까운 백제 역사 가운데 비밀에 묻혀 있던 500년 역사를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기대가 자못 크다.


 ▲ 몽촌토성을 둘러싸고 있는 물길은 성벽 방어용으로 설치한 해자다.
 

  올림픽공원에 포함시켜 보호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둘레가 약 2.7km 되는데, 풍납토성과 달리 민가나 건물들로부터 큰 침입을 받지 않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또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도 나왔다. 이 성 역시 도읍지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위례성을 지키던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 한성백제 시대 중에서도 4~5세기 무렵의 것으로 알려진 방이동 백제 고분군.
 
 건물들이 바싹 붙어 둘러싸고 있는 풍납토성은 성벽 여러 군데가 도로로 단절되어 있어 걷기 불편한 반면, 몽촌토성은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덕에 인근 송파·강동구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비록 한때는 피 흘리던 격전지였으나 도심 한가운데에 심신을 달래줄 이런 유적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풍납토성도 주민 전체를 이주하고 발굴한 뒤 이처럼 복원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 보상비용만 해도 무려 수조 원이 든다니 정부로서도 막막할 따름이다.
 
  석촌동의 백제 초기 적석총에선 고구려의 냄새를 맡는다.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와 한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세운 백제 초기 어느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송파구의 백제 초기 적석총.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와 한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세운 백제 초기 어느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된다. / 석촌호수. 원래는 한강 본류였으나 1971년 잠실도를 육지로 붙이는 공사를 할 때 호수가 되었다. 
 

   그런데 여러 개의 무덤 가운데 3호 무덤의 규모는 동서 49.6m, 남북 43.7m, 높이 4m로 매우 크다. 이는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 즉 고구려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큰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은 백제 시조인 온조일까? 아니면 백제의 국가 기반을 확립한 고이왕? 그도 아니면 누구일까? 적석총 공원을 거닐다보면, 칼바람 부는 한겨울에도 이런 상상 속으로 빠져드니 상상력 풍부한 이가 따스한 봄볕 아래서 거닌다면 머릿속에 역사소설 한 편 뚝딱 만들어내지 않을까.

이렇게 백제의 그림자를 밟으며 송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면 원하건 원치 않건 쓰라린 역사의 흔적도 만나게 된다. 삼전도비. 1639년(인조 17) 인조가 청태조에게 항복을 했던 한강변 삼밭나루터에 세운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다.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인 만큼 사연도 많다. 원래 한강의 본류였던 석촌호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청일전쟁 후 묻어버렸고, 1895년에 일본인들이 다시 세워 놓았다. 그리고 1956년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땅 속에 묻었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울시는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역사를 보여 교훈이 되도록 소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이따금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기도 한다고 한다.



  ▲ 1 서초구 우면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술의 전당. 고층 빌딩의 수직선과 오페라하우스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2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밤풍경. 1990년대 초 이른바 ‘오렌지족’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거리로 유명하다. 3 지하철 2호선이 지나는 강남역 사거리. 강남 지역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약속의 장소다. 
 

  상전벽해라는 말도 있지만, 송파에서도 잠실만큼 큰 변화를 겪은 곳이 또 있을까. 잠실은 조선 세종 때 왕명으로 뽕나무를 심고 동잠실이라 불리던 곳이다. 잠실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한강에 떠있는 하중도(河中島)였다. 그런데 이 섬은 한강 북쪽 강변, 즉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에 더 가까이 있었다. 대동여지도나 옛 지도를 보면 상림(桑林)이라 기록된 잠실섬이 한강 북안에 거의 붙어 있는 것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홍수 때마다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약간씩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잠실섬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잠실섬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으나 1945년 광복 이후 뽕나무를 베어낸 뒤 땅콩·우엉·참외 등을 심는 채소밭으로 쓰다가 1971년 잠실섬을 하안 남쪽에 붙이는 물막이공사를 해 육지로 바꿔버렸다. 이름 하여 ‘잠실 하중도 물막이공사’. 공사 중 잠실섬 남쪽으로 흐르던 물줄기를 폐쇄할 때 그 일부를 호수로 남겨두었으니 바로 지금의 석촌호수다.

  현재 송파대로가 지나는 석촌호수 동호와 서호 사이는 조선시대의 송파진이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는 천 년 동안 한성·충청도·경상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나루터였다. 당연히 상업도 발달해 상설시장이던 송파장은 전국 각 지방의 산물이 집산되는 중심지로서 조선 15대 장터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 때 송파진과 송파장터가 유실되면서 모래벌과 강줄기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송파장의 이런 전통은 전국 각지의 산물이 모여드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전문 박물관인 국악박물관. 인근에 자리한 종합예술 학교, 국립국악원, 예술의 전당 등과 함께 복합 문화예술센터를 이루고 있다. / 도심의 높다란 빌딩 사이에 자리 잡은 봉은사. 도심 속의 수행처로 사랑 받고 있다.

 

  송파구에서 서쪽의 탄천을 넘으면 강남구다. 서울 최고의 부유층들이 모여 사는 강남·서초·송파구 이른바 ‘강남 3구’엔 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많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강남역, 청담동 패션거리, 테헤란밸리, 대치동 학원가, 예술의 전당…. 이곳엔 교육·생활·문화 등에서 최고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도로는 어디나 왕복 8차선이고, 거리도 휴지 한 장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도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차량감시용 CCTV는 이방인을 주눅 들게 한다. 거기에 길가의 건물은 높을 뿐만 아니라 세련되기까지 하다.

  강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압구정동을 빼놓을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 한강에서 가장 인기 높았던 정자는 바로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다. 압구는 한명회의 호로서 ‘세상일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가 있다.

  한명회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젊어서는 매우 불우했지만, 1453년 세조의 계유정난에 협력한 이후에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세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네 차례나 일등공신이 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또 두 딸을 각각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로 만들어 부귀영화를 함께 누린 인물이다.

  이런 한명회는 소박함을 표방한 압구정으로 선비들을 불러 시연(詩宴)을 베풀곤 하면서 정치적인 끈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 이 정자의 명성은 중국 사신들에게까지 알려져 조선에 오는 사신들은 압구정에 와서 놀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궁중에서만 쓸 수 있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설치하려고 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니 어찌 세상일을 잊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명회가 세상을 떠난 뒤 세월이 흐르면서 압구정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고, 마지막 소유자는 박영효(1861-1939)라 한다.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된 그에게 하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84년(고종 21)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역적으로 몰려 몰수당했고, 고종 말년에 다시 돌려받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압구정은 점차 쇠락했고, 어느 때인지 허물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90년대 초에 이른바 ‘오렌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압구정에서 등장했을 때 이런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한명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압구정,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유층의 만남은 어딘가 절묘한 게 있다.   신조어 사전엔 오렌지족을 ‘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유학을 경험하고 서울 강남 일대에서 퇴폐적인 소비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용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부유층이라는 특혜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향락적 소비문화에 빠져 상류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없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사치·향락의 상징이던 오렌지족이 즐겨 찾던 거리로서 1990년대 초 패션의 중심가로 자리 잡고 당시 부유층 젊은이들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중반 압구정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때 터를 잡은 고소득층 2세들이 1990년대 초반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이곳에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조선 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인 헌릉. 왼쪽이 태종의 능이다. / 남태령 정상 표석.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것이다. / 호젓한 남태령 옛길과 왕복 8차선의 새길. 남태령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큰 고개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연이 전한다. 

 

  상가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강남·서초·송파구 일대의 부유한 40~50대 여성들은 청담동 명품거리를 자주 찾고, 20대 여성들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었는지 가게를 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상권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실망한 강남의 젊은이들 가운데 압구정 마니아를 빼놓고는 대부분 강남역이나 코엑스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은 강남역. 강북에 명동이 있다면, 강남엔 강남역이 있다. ‘강남’이란 명칭의 상징성도 있거니와 지하철 2호선과 수도권을 잇는 20여 개의 버스 노선이 이곳을 지나 교통도 아주 편리하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만나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따라서 어느덧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다양한 가치와 감정이 교차하고, 소비문화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젊음은 왜 강남역에 열광하나’ 편은 강남역에서도 인구이동이 가장 많은 7번 출구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프로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소비문화의 상징이던 강남역을 비교적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카메라에 잡힌 강남역은 단지 이미지를 소비만 하는 곳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꿈을 키우는 공간이기도 하고, 여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도 했다.

  잠시 분위기를 바꿔보자. 1970년대 개발되기 이전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는 강남이라지만 어찌 전통의 향기 가득한 문화유산이 없겠는가. 흔히 선릉·삼릉 등으로 불리는 선정릉, 조선 불교의 중흥에 앞장섰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먼저 선정릉으로 강남 이야기를 풀어보자.

  강남의 고층빌딩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선정릉은 강남의 허파로서 공기 청정기 역할을 한다. 숨 막힐 듯한 빌딩숲 속에서도 테헤란로가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선정릉 때문일 것이다. 1시간을 꼬박 걸어야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이곳은 규모로 보나 조경으로 보나 결코 허투루 여길 수 있는 단순 공원이 아니다. 능 뒤쪽으로는 굽은 노송들 사이로 있는 산책로를 거닐다가 깊은 숨을 들이켜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강남 한복판의 빌딩숲과 고풍스런 왕릉은 어쩌면 부자연스럽고, 어떻게 보면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조화라고 볼 수도 있다.

  선정릉은 조선 9대왕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宣陵), 그리고 그 아들인 11대왕 중종 홀로 잠들어 있는 정릉(靖陵)을 한번에 부르는 명칭이다. 성종은 세종·세조의 치적을 기반으로 문화정책을 펴고, 20여 년에 걸쳐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비롯해 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오례의·악학궤범 등을 편찬·간행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한 왕이다. 정치적으로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두 세력의 균형을 잘 맞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폐비 윤씨 사건을 겪었고, 조선 최대의 섹스 스캔들인 어우동과의 관계설 등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아들인 연산군 폐위 등의 사건과 얽혀 현재도 사극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어쨌거나 성종은 조선의 기반을 닦은 왕이지만 사후는 전혀 편치 않았다.

  현재 성종의 능엔 유해가 없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은 선릉과 정릉의 무덤을 도굴하고 관마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나중에 성종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중종의 시신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릉엔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워 남은 재를 다시 관에 담아 안장했던 것이다. 또 선릉은 홍살문과 능상에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고, 지금은 초현대식 건물들 한가운데에서 공해와 힘들게 싸우고 있다. 

 

  이번엔 중종이 잠든 정릉으로 간다. 형 연산군과 12살 차이가 났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갑자기 왕위에 오른 탓에 권위가 없어 즉위 초기엔 공신 세력들에게 끌려 다녔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려 했던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의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등용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기반이었던 향약 보급과 현량과 실시 등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며 도학정치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무리한 개혁정책은 1419년 실시한 ‘정국공신 위훈삭제’로 갈등의 골은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 등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사림이 목숨을 잃는다.

  중종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禧陵)과 함께 고양에 있었으나 중종과 묻히고 싶어했던 셋째부인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자리로 억지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옮겨놓고 보니 길지가 아니었다. 지대가 낮아서 매년 여름 홍수 때마다 강물이 능 앞에까지 들어오고 재실(齋室)도 침수되는 일이 잦았다. 여러 차례 큰 돈을 들여 흙을 쌓았으나 침수는 계속되었다. 문정왕후는 결국 현재의 태릉(泰陵)에 홀로 잠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측천무후’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도 안 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봉은사(奉恩寺)는 서울 지역의 대표적 사찰로서 당시 선·교종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았던 보우(?-1565)는 연산군과 중종 대를 거치면서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던 조선 불교를 되살려낸 종교운동가이자 서산·사명대사로 계승되는 호국불교의 명맥을 연 봉은사의 선승이다. 하지만 보우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불교계에서는 선교 양종을 부활시킨 순교승으로 추앙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요승으로 규정짓고 있다.

 

 

 

  이런 평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보우가 문정왕후의 신임으로 봉은사 주지가 된 이후 귀양 간 제주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17년간은 유교와 불교의 극한대립 기간이었다. 명종 때는 유학의 전성기였는데, 왕후는 보우를 앞세워 불교중흥을 꾀했으니 사정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하지만 불교 입장에서 보면 도첩제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였고,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는 등 승단을 정비할 수 있었던 중흥기였다. 서산·사명대사 같은 분들도 이때 과거를 통해 승려가 되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북쪽에서 봉은사로 가려면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조선시대엔 봉은사 때문에 뚝섬나루는 천객만래(千客萬來)한다 해서 천만진(千萬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만큼 붐볐다. 이렇게 한강을 건너와 갈매기 한가롭게 날갯짓하는 강변을 뒤로 하고 허허벌판을 5리쯤 걸으면 봉은사에 닿았다.

  지금은 그 길을 따라 왕복 8차선의 영동대로가 나있고, 봉은사 주변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촌들이 둘러싸고 있다. 북쪽 언덕엔 명문으로 이름 높은 경기고등학교가, 남쪽엔 한국종합무역센터가 우뚝 버티고 있으며, 주위로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인 삼성동 아이파크를 비롯해 아셈타워, 인터콘티넨탈호텔 등이 자리하고 있다.

  봉은사는 이렇듯 전통과 현대가 극적으로 어우러지는 도심 속의 수행처이지만, 여기서 조금 속물근성을 보이자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자리 잡은 절집이 아닐까 싶다. 

 

 

▲ 영동대로 코엑스 사거리의 빌딩들. 절집 앞으로 펼쳐진 삼성동의 허허벌판은 대부분 봉은사의 땅이었으나 1970년대 강남 개방 당시 평당 6,200원이라는 헐값에 팔렸다.

 

   말이 나온 김에 봉은사와 사하전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들어보자. 조선시대 선종의 으뜸 사찰이었던 봉은사는 왕실로부터 방대한 땅을 하사 받았는데, 지금의 삼성동 일대는 거의 봉은사의 사하전이었다. 봉은사의 경제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건은 강남 개발이 시작된 1970년대에 발생했다. 당시 조계종은 총무원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돈이 아쉬웠고, 정부는 강북 도심에 있는 공기업들을 강남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땅이 필요했다. 주지승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조계종 사이엔 거래가 이루어졌고, 삼성동 널따란 벌판 12만 평이 팔렸다. 평당 6,200원. 그리고 그 자리에 한국전력 본사가 들어섰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2005년 정부의 공기업 지방 이전 정책이 발표되면서 한국전력 본사가 광주광역시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렇게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이 매물로 나올 조짐을 보이자 대기업·금융회사·부동산개발업체 등이 눈독을 들였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현재 공시지가보다 2~3배나 되는 평당 1억 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평당 6,200원이었던 땅이 35년만에 무려 1만 배가 넘는 가격의 매물로 나온 것이다. 그게 12만 평이었으니…. 수조 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이 거래는 불교계 최악의 부동산 거래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도 봉은사 법당의 부처님은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계실 뿐 말씀이 없다. 서울 남동부의 마지막 여정인 남태령(南泰嶺·183m)을 향해 삼남대로를 달린다. 지금의 동작대로다. 따라서 걷거나 나귀를 타는 것도 아니요, 시속 80km로 왕복 8차선 도로를 승용차로 간다. 조선시대에 한성에서 경상·충청·호남의 삼남 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던 가장 큰 길은 숭례문~동작진(동재기나루터)~삼남대로(동작대로)~남태령~과천~수원을 지났다. 대동여지도엔 이 구간을 ‘과천로’라고 적고 있다.  

 

  길이 6km에 이르는 남태령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소로였으나 1930년대에 일제가 산을 깎아 왕복 4차선의 신작로를 만들었고, 1990년대 초에 지금처럼 왕복 8차선으로 넓혀졌다. 서울쪽 반절은 옛길 흔적이 사라졌으나 과천 쪽은 1km 정도의 옛길이 복원되어 있다.   남태령의 옛 이름은 여우고개, 한자로는 호현(狐峴)이라 적었다. 지금의 남태령이란 이름은 정조로부터 유래했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생일 때마다 수원 화산에 있는 능으로 참배를 갔다. 11회의 참배 중 처음 5회는 과천로를, 나중엔 시흥로를 이용했다.

  어느 날 과천로를 이용해 이 고개를 넘을 때였다. 가마가 고갯마루에서 잠시 멈추자 정조는 물었다. “이 고개이름이 무엇인고?” 그러나 수행한 신하들은 ‘여우고개’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과천의 현리인 변 이방이 불쑥 아뢰었다. “예, 남태령이라 하옵니다.” 모두들 긴장했다. 이에 다른 이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인데 어찌 거짓을 고하느냐?” 하고 힐책했다.

  정조가 변 이방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너는 남태령이라 하였느냐?” “예,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지만, 신하로서 임금께 그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 “그래, 그 이름 한번 참 좋구나!” 이후 이 고개 이름이 호현에서 남태령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경상·충청·전라도로 통하는 삼남대로 남태령으로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넘나들었을까. 그렇지.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이 고개를 넘었지. 그리고 중종 때 개혁을 꿈꾸다 화순의 능주로 유배를 떠난 조광조도 이 고개에서 쉬어갔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 장군도 1597년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출옥한 후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을 거쳐 남태령을 넘으셨구나. 또 북청 유배지에서 돌아온 추사 김정희는 선친이 마련한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4년간의 말년을 보냈으니 누구보다도 남태령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하긴 그래서 남태령 정상에 표지석을 세울 때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지 않았던가.   또 누가 있을까. 그래. 가난한 선비, 이름 없는 민초, 장사꾼들도 나름대로 사연을 안고 이 고개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고개를 넘으려면 호랑이·도적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걷던 월치전, 즉 ‘고개넘잇돈’을 준비해야만 했을 것이다. 얼마였을까? 두 푼? 세 푼? 남태령 옛길에서 펼치는 상상은 끝이 없다.

 

                                       

 

 

청계산 

  서울 서초구와 경기 과천시·의왕시·성남시 경계에 있는 청계산(淸溪山·618m)은  주봉인 망경대(望景臺)를 비롯해 옥녀봉·청계봉(582m)·이수봉(二壽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이다. 정상인 망경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북쪽 청계봉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고려 멸망 후 이색·길재·조윤 등 고려 유신들이 이 산에서 은거했는데, 망경대는  조윤이 상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달랬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수봉은 무오사화에 연루된 정여창이 이곳에 숨어 위기를 두 번이나 모면했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청계산은 적당한 높이에 코스가 길지 않아 산행시간이 짧고, 경사도 완만해 가족 단위 산행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산행 코스는 

△원터골 녹지초소→원터골 약수터→공중전화→헬기장→매봉(2시간 소요)            

△청계골 녹지초소→청계골 약수터→공중전화→헬기장→매봉(1시간20분 소요)           

△바람골 입구→원터 쉼터→산토끼 옹달샘→공중전화→헬기장→매봉(2시간20분  소요)           

△화물터미널→옥녀봉→산토끼 옹달샘→공중전화→헬기장→매봉(2시간40분 소요)           

△개나리골 입구→옥녀봉→산토끼옹달샘→공중전화→헬기장→매봉(3시간30분 소요)              

 


암사동 선사주거지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암사동 선사주거지(사적 제267호)는 기원전 4000년 무렵인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다. 1925년의 대홍수 때 한강이 넘쳐 유적 일부가   파손된 채로 토기·석기들이 발견됐다. 이후 몇 차례 발굴한 결과 맨 아래의 제1층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 중간의 제2층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 맨 위의 제3층에서는 삼국시대 백제 토기 조각 등이 나왔다. 현재 이곳에는 암사동 선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관람 시간 09:30~18:00, 매주 월요일 정기 휴일. 관람료 일반(18세 이상) 500 원, 7세 이상 300원. 주차료 2,000원. 지하철 8호선 암사역 4번 출구에서 도보 15 분. 02-3426-3857, 3426-3867.

 

 
길동 자연생태공원 

   강동구 길동에 있는 자연생태공원은 자연생태계 학습장과 녹지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한 환경친화형 공원이다. 총 80,683㎡의 면적에 수목 64종 31,846그루,  야생 초화류 138종 188,357포기가 자라고 있다. 다수의 인원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자유관찰지역, 인솔자가 동행해야 이용할 수 있는 제한관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받아 입장객 수를 1일 200명으로 제한한다. 

  지하철 5호선 강동역 4번 출구에서 3412번, 300번, 361번, 370번, 9301번 버스 이용, 10분 소요. 전화 02-472-2799

 
           

 

 

광주 풍납리 토성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광주 풍납리 토성(사적 제11호)은 백제 초기의 토성이다. 원래 경기도 광주에 속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시에 편입됐으며, 풍납토성이라고도 한다. 한강유역에 있는 백제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토성 유적으로서 주민이 생활하던 주거지로 추정된다. 둘레 3,740m에 이르는 규모 큰 평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2,679m 정도만 남아 있다. 지하철 5호선 천호역 또는 풍납토성역.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

  송파구 석촌동에는 백제 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은 백제 초기에 만든 무덤이다.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3호 무덤은 층이 3단으로서,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 즉 고구려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크기는 동서 49.6m, 남북 43.7m, 높이 4m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와 한강 상류에 정착하면서 세운 백제 초기 어느 왕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하철 8호선 석촌역.

 

 

 

 

방이동 백제 고분군

  방이동 백제 고분군(사적 제270호)은 백제 전기(4세기 초∼475)의 무덤들로 모두 6기가 있다. 현재 확인된 8기를 중심으로 보호지역으로 공원화하고, 내부를 복원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부장품은 거의 도굴됐다. 방이동 유적은 가락동·석촌동 무덤과 함께 한성백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지하철 5호선 방이역.

 

 

 

몽촌토성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몽촌토성(사적 제297호)은 둘레가 약 2.7km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이 성은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다. 자연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했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됐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됐고, 출토 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 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삼전도비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비(사적 제101호)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 태조의 요구에 따라 1639년(인조 17) 항복했던 한강변 삼밭나루터에 세운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이 비는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다.

 

 

 

 

올림픽공원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경기를 목적으로 건설한 송파구 방이동의 올림픽공원은 체육·문화예술·역사·교육·휴식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종합 공원이다. 이곳에는 경륜장, 역도경기장, 펜싱경기장, 체조경기장, 테니스경기장, 수영장, 올림픽회관 등의 주요 시설이 있다. 이 공원은 산책·조깅·인라인스케이트 등을 즐길 수 있는 건강 공원, 몽촌토성·올림픽미술관 등으로 이루어진 볼거리 공원, 음악분수·이벤트 광장 등으로 구성된 재미있는 공원, 이렇게 3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 5호선 올림픽공원역 3번 출구. 개방시간은 한얼광장(5호선 올림픽공원역)과 평화의광장(8호선 몽촌토성역)은 06:00~24:00. 그 외의 지역은 06:00~22:00. 입장료 무료. 주차료는 올림픽회관 30분까지 무료, 30분 후 기본료 1,000원, 10분당 1,000원. 동2문·남2문·북2문 1일 3,500원. 02-410-1114

서울놀이마당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공원 내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은 전통 민속예술의 발표·전수·전승·발굴·보존을 위해 1984년 건립한 연희시설이다. 연중 개방해 꼭두각시놀음·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 등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속예술을 공연하고, 전통문화 애호사상을 고취하는 강습회 등도 열린다. 매주 토·일요일 무형문화재를 위주로 공연을 실시한다. 지하철 2, 8호선 잠실역. 전화 02-414-1985.

삼성 어린이박물관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송파구 신천동의 삼성 어린이박물관은 전시품들을 모두 직접 손으로 만지고 조작해보면서 어린이 스스로 탐색할 수 있도록 꾸민 한국 최초의 체험식 박물관이다. 과학·미술·사회·문화·방송국 등 10개 영역에 걸쳐 100여 개 전시물을 마련해놓고 있다. 또 영유아놀이학교, 키즈놀이스쿨, 미술학교, 과학교실, 박물관학교, 사진교실 등 심화된 내용의 특별교육 프로그램을 연령에 맞춰 다양하게 갖추어놓고 있다.

  관람시간은 10:00~18:00(매표 14:00). 일반(중학생 이상) 5,000원, 36개월 이상 6,000원, 12~36개월 3,000원, 12개월 미만 무료. 주차료 최초 30분 1,000원, 이후 10분당 500원. 토요일 오후 2시 이후, 일요일, 공휴일엔 2시간 무료. 지하철 2호선 8번 출구에서 교통회관 방향 50m, 8호선 9번 출구에서 잠실역 사거리 방향 100m. 전화 02-203-1871~4

 

 

 

롯데월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롯데월드는 대형 레저·쇼핑 타운이다. 문화부문에 민속관·문화센터·연극공연장·영화관, 젊음의 광장, 레저부문에 롯데월드 어드벤처·매직아일랜드, 스포츠부문에 스포츠센터·아이스파크 등이 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대규모의 실내공원으로 ‘모험과 신비’를 주제로 한 탑승시설·관람시설·공연 프로그램·세계의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전시관·모형촌·놀이마당·저자거리로 구성된 민속관은 종래의 박물관과는 달리 첨단 영상과 새로운 전시기법을 도입했다. 지하철 2, 8호선 잠실역. 전화 02-411-2000
 

 

 



석촌호수

  송파구 잠실동의 석촌호수는 원래 한강 본류였으나 1971년 잠실지구 공유 매립공사로 조성된 잠실 하중도가 육지에 속하면서 형성된 호수다. 현재 석촌호수는 동호와 서호로 나뉘어져 있다. 동호는 새벽 조깅코스와 주변 직장인들의 휴식처, 그리고 자전거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서호에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와 서울놀이마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선정릉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사적 제199호)은 조선 9대왕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모신 선릉(宣陵)과 11대왕 중종을 모신 정릉(靖陵)이 있다. 또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의 무덤도 있어 흔히 삼릉이라고도 불린다. 선정릉은 도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한적한 편이라 조용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관람 09:00~17:30(하절기 18:30), 1시간 전 매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지하철 2호선 선릉역 8번 출구, 7호선 강남구청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http://seonjeong.cha.go.kr, 02-568-1291

광평대군 묘역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 기슭에 있는 광평대군 묘역(시유형문화재 제48호)은 광평대군을 비롯해 무안대군·영순군·혜정공·이현응·이회 등 종문 700여 기의 묘소, 종가재실의 고옥도 함께 있는 공동묘역이다. 1425년(세종 7)에 태어난 광평대군 이여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지금의 삼성동 선릉 부근인 광주 학당현(學堂峴)에 있었으나, 이곳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게 되자 1495년 이곳으로 이장됐다.

 

 

 

봉은사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794년(원성왕 10)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선릉을 위해 중창하고 봉은사로 개칭했고, 1562년(명종 17) 현 위치로 옮겼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를 치렀는데, 서산·사명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했다.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숙종 때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도보 10분. 7호선 청담역에서 37번, 21번, 64번, 212번, 960번, 65번, 69번, 710번 버스 이용, 봉은사 앞에서 하차, 도보 5분. 종무소 02-545-1448

 



코엑스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센터 내에 있는 코엑스(COEX)는 국제적인 전시회나 국제회의 개최를 통한 교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종합전시관이다. 지상 4층, 지하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개의 전문 전시실과 7,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을 비롯해 61개 회의실을 갖추고 있다. 또 국제 비즈니스를 위한 종합적인 지원체제를 갖추고 연간 150여 회의 전문 전시회, 각종 국제회의와 이벤트를 개최하는 한편, 해외 유수의 바이어와 국내 수출입업체를 직접 연결시키는 등 교역 증대 역할도 한다.

  주요 시설은 크게 전시장과 컨벤션센터 회의실로 구분되며, 전시실은 다시 태평양홀·대서양홀·인도양홀·컨벤션홀로 세분된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 5, 6번 출구. 전화 02-6000-0114

LG아트센터

  강남구 역삼동의 LG아트센터는 객석 3개 층, 약 1,100석 규모를 갖춘 다목적 공연장으로서 연극·무용·음악·뮤지컬 등을 두루 수용할 수 있는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LG아트센터 상남홀은 다목적 공연장이 가지는 음향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가변형 잔향 조절 시스템을 채택함으로써 장르에 따라 최적의 음향조건을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지하철 2호선 역삼역 7번 출구에서 LG아트센터 전용 엘리베이터 이용. 02-2005-0114
도산공원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1973년 조성했다. 세상을 떠난 뒤 망우리에 안장했다가 1973년 미국에 있던 부인 이혜련의 유해를 이곳에 합장하며 도산공원으로 꾸몄다. 기념관에는 사진 71점과 신채호 선생이 미국에 있는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등 편지 19점, 흥사단 활동시 작성 문서 48점, 임시정부 사료집, 도산일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상, 말씀비, 체육시설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에서 222번 버스 이용, 또는 7호선 강남구청역에서 63-1번, 77-1번 버스 이용. 전화 02-541-1800

 


 

관세박물관

  강남구 논현동 서울세관본부 내에 있는 관세박물관은 관세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관세행정의 홍보와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00년에 세운 특수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11,000여 점의 관세관련 유물과 사료 중 1,5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관세청과 세관 활동 등을 영상물에 담아 상영하는 홍보실도 운영하고 있다. 지하철 7호선 학동역 10번 출구. 전화 02-3438-1690 

풀무원 김치박물관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풀무원 김치박물관은 김치의 역사, 변천사, 다양성, 우수성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김치에 관련된 논문·참고서적·관련정보 등을 수집하고, 김치와 한국전통음식문화 관련 책자 발행 등 학술 활동도 겸하고 있다. 또 김치에 대해 관심 있는 일반인, 김치를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에게 열려있는 ‘김치 배움의 터’도 운영한다.  입장료 일반 3,000원, 초·중고생 2,000원, 유치원생 1,000원. 개관 시간 10:00~18:00(입장 17:30). 지하철 2호선 삼성역 5, 6번 출구 코엑스몰 지하 2층. 전화 02-6002-6456

 


한국자수박물관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한국자수박물관은 전통자수, 보자기, 침장, 종이공예품 등을 수집·보관·전시하기 위해 설립한 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전통자수 500여 점과 보자기 500여 점 등 1,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소장품 중에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가사인 이십오조가사(보물 제653호)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자수병풍인 자수사계분경도(보물 제653호)를 비롯해 십장생보료, 당의오조룡보, 대사헌해치흉배, 충정공 민영환의 부당대례견장, 왕비방석, 사조룡왕세자보, 박쥐문침장, 수목문수보, 화문수보, 버선본보, 수저집 등 희귀 자수품이 많다. 각종 전통공예와 관련된 출판물도 발간한다.  관람시간 10:00~16:00. 토·공휴일 휴관. 7호선 학동역 10번 출구. 전화 02-515-5114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강남구 신사동 스페이스씨 5·6층에 있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우리나라의 화장용기, 장신구¸ 여성 생활용품 등 화장 문화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코리아나 화장품 창업자인 송파 유상옥 박사가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궁중에서 서민들까지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사용하던 화장과 여성 관련 민속품 5,000여 점이 바탕이 됐다.  입장료 성인 3,000원, 학생 2,000원. 지하철 압구정역 3번 출구에서 극장 뒤편 세광길로 도보 5분. 전화 02-547-9177

 

 

서울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강남구 삼성동의 서울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은 기능·예능 보유자와 전승자들이 기예능을 연마하고 습득하는 전승 교육의 장소다.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전수회관 내에 12공방(공예품 제작 실연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방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공예 분야를 널리 알리고 후진양성을 위한 전수 교육도 지원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8번 출구에서 강남구청 방면으로 도보 10분. 7호선 강남구청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전화 02-566-6300

 

서울 송절주

  강남구 대치동에서 전해오는 송절주(松節酒·서울무형문화재 제2호)는 싱싱한 소나무 가지에서 잘라낸 마디와 솔잎, 그리고 한약재인 당귀 등을 넣고 삶은 물로 빚은 서울 지방의 민속주다. 관절염과 피부 습진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코올 도수는 16도. 임원십육지, 규합총서 등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조선 중엽인 16세기 이후 빚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절주를 대량생산할 수 없어 시작한 증류 소주인 한주(汗酒)는 현재 충북 옥천에서 생산하고 있다. 송절주는 1989년 시무형문화제 제2호로 지정됐다. 1991년 송절주 기능보유자인 박아지 여사가 별세하자 며느리 이성자씨가 기능 보유자로서 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면산

  서초구와 과천시 경계에 있는 우면산(牛眠山·293m)은 산세가 ‘소가 졸고 있는 형국’이라 해 우면산이라 이름이 붙었다. 서초구 우면동·서초동, 강남구 양재동 등지의 도심에서 쉽게 오를 수 있어 주민들의 휴식과 산책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2시간 정도 걸린다. 북쪽 기슭에 1987년에 개관한 예술의 전당이, 남쪽 기슭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다.

양재천

  한강 지류인 양재천(良才川)은 과천시 중앙동의 관악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해 북동류하며 서울 서초구·강남구를 가로질러 탄천(炭川)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양재천은 원래 한강으로 직접 흘러들었으나, 1970년대 초 수로변경공사를 하면서 탄천의 지류로 물줄기가 바뀌었다. 옛 이름은 공수천(公需川, 公須川)·학탄(鶴灘·학여울) 등이다. 총 길이 18.5 km. 이전에는 양재천 관리구역이 과천시·서초구·강남구 3개 지자체로 나뉘어져 있어 환경오염이 심각했으나 지금은 경기도 지역까지 포함해 6개 지자체가 탄천·양재천 환경행정협의회를 구성해 양재천을 관리하고 있다.


 

헌인릉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사적 제194호)은 동쪽의 헌릉(獻陵)과 서쪽의 인릉(仁陵)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릉은 조선 3대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으로 왼쪽이 태종 능이다. 헌릉 봉분 하부에는 병풍석을 만들어 각 방위별 12지신상을 조각했고, 둘레에는 혼유석·명등석·망주석 등 많은 석물들이 있다. 인릉은 조선 제23대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동원합봉 형식의 능으로 일반 단릉처럼 혼유석 1좌만 있는 2실로 합장했다.

  관람 09:00~17:30(하절기 18:3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매주 토요일 1회(14:00) 무료 문화재 안내. 지하철 3호선 양재역 7번 출구와 2호선 강남역 6번 출구에서 4422번, 140번, 407번, 462번, 471번, 9411번 버스 이용, 헌인릉에서 하차. 전화 02-445-0347

효령대군 사당과 묘소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청권사부묘소(淸權祠附墓所·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는 조선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제4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의 사당인 청권사(淸權祠)와 그가 묻힌 묘소를 말한다. 조선 후기 건물인 사당과 초기 유구로 추정되는 석물들이 있다. 신도비는 1902년에 제작된 것이다.

  청권(淸權)이란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 주나라 태왕의 장자인 태백, 차자인 우중이 셋째 계력의 아들 창에게 왕위를 전하고 스스로 도망함을 표현한 ‘위우중이일 은거방언 신중청 폐중권(謂虞仲夷逸 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술의 전당

  서초구 서초동 우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술의 전당은 한국 전통 문화 예술을 계승하고 창작 활성화에 기여하며 국제교류증진과 국민 문화 복지 향상을 위해 1982년 건립한 복합 예술센터다. 중심이 되는 오페라하우스는 한국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선비정신을 본 뜬 갓 모양의 원형건물이고, 음악당은 부채 모양으로 설계됐다. 또 미술관, 서예관, 디자인미술관, 야외극장 등이 있다. 인근에 자리한 종합예술학교, 국립국악원 등과 함께 복합문화예술센터를 이룬다. 02-580-1300 

 

 



국립국악원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국립국악원은 민족 음악의 계승 보존과 발전을 위해 1951년 설치한 기관이다. 현재 관리과·장악과·무대과·국악진흥과·국악연구실·국악연주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통 국악의 총본산으로서 각종 국악교육을 비롯해 국내외 연주, 보급 활동, 자료 제작과 연구·창작 활동 등을 하고 있다. 화·목·토요일에 상설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방배역 1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서초 07번, 15번, 17번 이용. 7호선 내방역 3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서초 07번, 서초 15번 이용. 3호선 남부터미널역 5번 출구 마을버스 서초 12번, 초록버스 4429번 이용. 주차무료

 

국악박물관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국립국악박물관은 우리 음악에서 역사적·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각종 국악 관련 자료와 유물 1,3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 전문박물관이다. 내부는 중앙홀을 중심으로 악기실·명인실·국악사실·고문헌실·죽헌실의 전시실과 3D 영상실, 그리고 체험실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국악사실은 한국 음악의 역사를 확인하는 곳으로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신라의 토우,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편경 등의 유물자료와, 조선 후기의 음악문화를 묘사한 그림 자료 등 7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관람시간은 09:00~18:00. 월요일과 1월1일 휴관. 관람 무료. 전화 02-580-3130

전기박물관

  서초구 서초동 전력문화회관 3층에 있는 전기박물관은 100년이 넘는 한국의 전기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보존하고 전기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건립한 전문 박물관이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전기 관련 유물 247점과 디오라마 모형 9점, 일반 모형 5점, 복제물 16점, 그래픽 패널 84점, 영상물 9점, 정보 검색 10점 등이 있다.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은 10:00~17:00(동절기 16:00). 월요일·신정·설·추석 명절에는 휴관. 주차 2시간 무료.

 

 

문화예술공원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문화예술공원은 양재 시민의 숲 공원에 딸린 공원으로 전시장·놀이마당·중앙광장·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유명 조각가의 작품 1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기획전시장에서는 꽃전시회와 애완동물박람회 등 각종 전시회가 열린다. 야외공연장은 690석 규모로 숲속 영화제와 음악회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도보 10분.  

 

 

 

 

분재박물관

  우면동 성촌 마을의 분재박물관은 한국분재연구소에 속한 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12,000여 종의 분재 중에는 수령 300년의 단풍나무와 500년 이상 된 노간주나무 분재를 비롯해 곰솔·매화나무·배롱나무 등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200여 점이나 된다. 정기적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분재 관리에 대한 실습과 체계적인 분재 관리 교육도 겸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하절기(3~10월) 평일 09:00~19:00 / 일요일 12:00~19:00, 동절기(11~2월) 09:00~17:00 / 12:00~17:00. 관람 무료. 지하철 3호선 양재역 7번 출구 / 2호선 강남역에서 나와 뉴욕제과 방면에서 3412번(우면동행) 버스 이용, 방앗간에서 하차. 02-577-0001~03



양재동 꽃시장

  서초구 양재동 꽃시장은 한국에서 가장 큰 화훼시장으로서 정식 명칭은 농수산물유통공사 화훼공판장이다. 국화·장미·백합·카네이션 등의 절화, 심비디움·호접란·동양란 등의 분화, 시클라멘·초화류 등 관엽식물 분화 등을 취급한다.

  경매 시간은 절화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01시부터 경매 종료까지, 난은 월요일·목요일 8시30분부터 경매 종료까지, 관엽류는 화요일·금요일 8시30분부터 경매 종료까지다. 현재 출하 농가수는 15,000여 곳. 출하단체는 290여 개, 중도매인은 320여 명으로 일일 평균 경매금액이 2억 원이 넘는다.  지하철 3호선 양재역 7번 출구에서 성남 과천 방향 버스 이용, 양재동 꽃시장에서 하차. 02-579-8100, www.yfmc.co.kr


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 대표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은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본관(지상 7층, 지하 1층)과 역삼동에 있는 분관(지상 4층, 지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이곳에는 17세기 이전에 간행된 귀중본 3,850여 책을 포함해 약 300만 권과 더불어 42만 점에 달하는 사진, 영상, CD-ROM, 마이크로필름, 음향자료, 지도자료 등이 첨단 전산화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또 일차적인 자료 제공 외에도 전시회·영화감상회·강연회·백일장 등 각종 문화행사 프로그램을 연중 개최해 종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서초역에서 반포대교 방면(법원·검찰청 방면) 도보 10분. 전화 02-535-4142, www.nl.go.kr

대한민국 예술원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대한민국 예술원은 역량 있는 예술가들의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예술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목적으로 1954년 설립했다.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무용분과와 각종 위원회로 구성된 예술원은 대한민국 예술원상 시상·국제예술심포지엄 개최·예술활동 조성비 지원·예술도서 발간·예술강연회 개최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전시·연구물·영상자료 등 예술 활동 관련 자료가 비치된 자료실도 운영한다. 02-596-6213~5

 

 

 

 

양재 시민의 숲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양재 시민의 숲은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경기를 위해 서울시의 관문인 양재 톨게이트 주변에 조성한 공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 칠엽수, 잣나무 등 70종 25만 그루의 수목이 울창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숭모비가 있다. 6·25전쟁 당시 비정규군 전투 부대로 참전해 희생된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1987년 미얀마 안다만 해협에서 북한의 테러로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의 희생자위령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502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삼풍사고 희생자 위령탑 등이 있다. 
지하철 양재역 7번 출구에서 성남 방면 버스 이용, 시민의 숲(양재 꽃시장)에서 하차. 10분 소요. 02-575-3895

 

 

 

 

 

 

윤봉길 의사 기념관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 남쪽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구공원(현재 노신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제거한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의 일생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1층은 서책·문구 등 당시 소지품과 훈장들을 볼 수 있는 유물 전시실, 2층은 무장투쟁 중심의 관계 사진을 볼 수 있는 독립운동 사진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잠실리 뽕나무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 16차 아파트 120동 앞에 있는 잠실리 뽕나무(시도기념물 제1호)는 원줄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자랐으나 지금은 가지 중간 부분이 잘린 고사목(枯死木)이다. 조선 전기에 심은 것이라 전해오는 이 나무는 이미 죽은 상태이지만 우리나라 누에치기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나무다. 잠실리는 세종 때부터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밭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시범을 보이던 왕실의 잠소(蠶所)가 있었던 곳으로 ‘잠실’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이곳이 잠소였음을 기념하기 위해 고사목 주변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고 있다.

대성사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 위쪽에 자리 잡은 대성사(大聖寺)는 384년(침류왕 1)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 의상조사, 현욱선사, 심희선사가 머물렀고,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 태고왕사 보우,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 자초, 보우대사 허응 등이 이 절에 머물면서 주석했다. 근대에는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 스님이 주석했다. 경내에 있는 전각들은 6·25전쟁 후 복원한 것이다. 대성사 목불좌상(시유형문화재 제92호)은 조선 후기 불상이다.

 

  <출처> 2008. 3 / 월간산 4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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