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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지리산 피아골 입구에 자리 잡은 연곡사(燕谷寺)

by 혜강(惠江) 2008. 4. 4.

 

구례 연곡사

피아골 입구에 자리 잡은 연곡사(燕谷寺)

 

- 민족 수난의 자리엔 무심한 매화꽃이 흐드러져 -

 

 

글·사진 남상학

 

 

 

 

 

  구례나 하동에 갈 때마다 연곡사는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일쑤여서 이번엔 연곡사를 들르기로 계획했다. 연곡사는 구례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화개에 이르기 전 외곡리에서 좌회전 피아골로 접어들어 약 8.5㎞ 들어가면 닿는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이른 봄이라 길 양 옆의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있고 드문드문 벚나무 꽃이 막 피어날 태세로 꽃망울을 달고 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단식 논밭을 만난다. 산비탈을 다라 층층이 쌓아 만든 논두렁의 다랑논은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랑논의 대명사는 남해 가천마을이지만 이곳의 논두렁과 다랑논의 운치도 가천마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느낌이다. 특히 높은 산비탈에는 계단식으로 대단위 차밭을 조성한 모습이 경이롭게 보인다.

 

 

 

   계단식 차밭에 정신을 팔다보면 어느새 연곡사에 닿는다. 연곡사가 있는 이것 전체를 피아골이라 하는데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의 계곡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이 피아골로 하산하다 보면, 봄에는 각종 야생화 천국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청청한 계류, 가을이면 단풍으로 황홀한 풍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피아골에는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우선 피아골이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피’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본래 피아골의 어원은 오곡(五穀) 중 하나인 ‘피’가 많이 난다는 ‘피밭골’에서 ‘피아골’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이 ‘직전리(稷田里)’라고 하는 피아골 입구 마을의 지명이다. 직(稷)은 ‘피(기장)’이기 때문이다. 또 피아골 단풍은 ‘직전단풍(稷田丹楓)’이라 하여 지리 10경 중의 하나이다.

 

   피아골 입구에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4년(543년) 화엄사 종주 연기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중 그 가운데부분에서 물이 용솟음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연못을 메워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제비연(燕)’ 자를 써서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연곡사의 역사는 피 튀기는 피의 역사다. 연곡사의 스님들은 임진왜란 때 700명의 승병을 일으켜 섬진강변의 천연요새인 석주관(石柱館)에 나가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한 성으로 축조 당시 성문이 거대한 돌기둥으로 되어 있어 석주관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정유재란 때도 150명의 승병과 일반 의병 3.500명과 합세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국했다. 이처럼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복구했으나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고, 제2차 의병운동 때 일본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한국전쟁 이후에 연곡사는 빨치산의 아지트였다. 따라서 빨치산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그런 이유로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때 죽은 이들의 피가 땅에 스며들어 가을 피아골의 단풍이 유난히 붉다고들 한다. 이름은 미래를 예측하는 하나의 어휘라고 하는 말이 시실인 듯 싶다.

 

 

 

 

   애초에는 경내였을 법한 공터에 심어놓은 매화와 산수유꽃이 한창이다.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에서 향기가 진동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선(禪)을 닦는 절로 유명했다. 따라서 선과 관련된 부도 국보 2개 - 동부도(국보 53호), 북부도(국보 54호)가 있다. 보물로는 연곡사삼층석탑(보물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152호), 동부도비(보물153호), 서부도(보물164호)가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서 먼저 만나는 것이 법당 남쪽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3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마다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다. 또한 윗면에는 경쾌한 곡선이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도 우아하다. 탑에 사용된 돌의 구성양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후기로 짐작된다.

 

 

 

 

 

   대적광전 우측으로 돌아 언덕으로 올라가면 연곡사동부도비(鷰谷寺東浮屠碑)와 동부도를 만난다. 연곡사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가 3개 있는데, 이 동부도비는 동부도 앞쪽에 서 있는 비로, 비의 몸돌이 없어진 채 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다.

 

   받침돌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엎드린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성이 떨어지며, 잘려진 것을 복구해 놓아 부자연스럽다. 용의 등에는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아 새로운 느낌이다.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머릿돌은 용무늬를 생략하고 구름무늬만을 새겼으며,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놓았다. 작고 아담해진 규모와 통념을 벗어난 조각형태를 지닌 고려시대의 비로, 통일신라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인다.

 

 

 

 

   동부도비 옆에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의 동부도가 서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위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위 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부도에서 비탈길을 조금만 오르면 북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북부도는 형태가 아름다운 동부도를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부도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부도’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부도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부도는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부도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연곡사 서부도는 연곡사 서쪽에 있어서 ‘서부도’라고 하며, 소요대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서부도는 경내 다른 2기의 부도에 비해 조형이나 조식은 우미(優美)하지 못하나 상·하 각부의 비례는 우아하다.

 

 

 

 

   연곡사현각선사탑비(연谷寺玄覺禪師塔碑)는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비몸돌이 없어져 현재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이 웅장하며,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안상(眼象)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다.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앞면의 가운데에는 탑 이름이 새겨져 있어, 현각선사의 탑비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고려 경종 4년(979)에 만들어졌다.

 

 

 

   이렇듯 연곡사는 국보와 보물이 많은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법당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허전해 보였다. 1981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당시 주지인 장숭부 스님이 정부 지원과 시주로 옛날 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강석과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한 이후 복원 불사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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