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하순, 섬진강
지금 섬진강변에 봄이 흐르고 있다
섬진강의 봄은 동시다발적으로 온다. 선발대로 전남 광양 소학정의 첫 매화가 피면 남해 망덕포구에서 황어 떼들이 매화 향기를 맡으며 거슬러 오른다. 경남 하동 남도대교에 도착하면 지리산 자락의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개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이 흐르는 강이다.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서 태어난 강은 전남 곡성에서 요천과 합류해 폭을 넓힌다. 이어 전라선 폐선, 17번 국도와 어깨동무하며 달린다. 옛 곡성역사에서 가정역까지 10㎞의 폐선 구간을 달리는 관광용 증기기관차가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강마을 풍경이 두루마리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흐르다 흐르다 목멘 섬진강은 곡성에서 애절한 서편제 가락으로 심청가를 노래하다 구례 들판을 향해 물줄기를 틀면서 동편제의 호탕한 목소리로 봄을 부른다. 한껏 물오른 버드나무가 푸른 강물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물오리 떼는 유난히 바위가 많은 강심에서 한가롭게 자맥질을 한다.
섬진강은 우리 집 장독대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답다. 구례 죽연마을에서 지그재그로 가파른 산길을 달려 해발 531m의 오산 능선에 오르면 절벽에 위태롭게 걸린 사성암이 나온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변에 자리 잡은 촌락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오직 사성암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성암 건너편 지리산 노고단에서 굽어보는 섬진강의 곡선은 여인의 어깨선처럼 부드럽다. 꽃샘추위에 핀 상고대 능선 아래로 지리산 자락을 감고 돌아가는 푸른빛의 강줄기가 밥 짓는 연기처럼 아스라하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에는 산수유나무가 샛노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할 무렵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 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 그을린 이마 훤하게 / 꽃등도 달아준다 //…/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시 ‘섬진강’ 중에서)
구례 들판을 적시며 굽이굽이 흘러온 섬진강은 십 리 벚꽃길로 유명한 경남 하동의 화개천과 하나가 되면서 짙은 녹색을 띤다. 2003년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남도대교가 섬진강을 가로지르면서 화개나루의 나룻배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섬진강의 봄은 가수 조영남의 노래처럼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에서 무르익는다. 겨우내 논두렁 밭두렁에서 엎드려 있던 푸성귀가 좌판을 채우고 있다. 화개장은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의 무대. ‘옥화네 주막’이라고 간판을 내건 음식점에선 소설 속 계연이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을 말아 내올 것만 같다. 봄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뒤뜰에서도 자라고 있다. 지리산 형제봉 자락에 둥지를 튼 최참판댁은 평사리 넓은 들판과 섬진강을 내다보고 있다. 소설에서 서희가 거처하던 곳인 별당의 뒤뜰에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의 꽃망울이 통통해졌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는 동쪽의 19번 국도와 서쪽의 861번 지방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전남 구례에서 광양까지 달리는 861번 지방도는 이른 봄 매화가 뭉게구름처럼 피는 꽃길이다. 섬진강 푸른 강줄기와 하얀 모래톱, 그리고 녹색의 대숲과 차밭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편의 시요, 한 폭의 그림이다. 오랜 추위와 가뭄으로 애를 태우던 매화나무는 기어코 내 손때가 묻은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에서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홍쌍리의 청매실농원
섬진강에 시집온 지 어느새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화가 지천으로 핀다고 지명조차 매화마을로 바뀐 섬진마을엔 원래 밤나무가 무성했다. 1930년대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다. 하지만 매화꽃의 아름다움에 반한 새댁은 날마다 시아버지를 졸라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꽃중의 꽃 매화꽃아
수야 엄마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
영원히 피어라
섬진강 언덕 위에 삼박재 골짝마다
섬진 주민 가슴마다
영원히 피어라’
1967년 봄날 돌산에 매화나무를 심으며 썼던 빛바랜 일기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농사를 지었지만 매화나무는 늙은 농사꾼의 더 많은 눈물과 땀을 요구했다. 극심한 가뭄에 꽃봉오리가 말라버릴 땐 하늘이 야속하기도 했다.
‘매화야 매실아 아들딸들아 / 이 에미 눈물이 빗방울만 될 수 있다면 / 너의 입술이라도 적셔 주련만 / 이 에미 가슴이 말랐으니 너희 목을 적셔 주지 못하는 / 이 에미 심정을 너희들은 아느냐 / 하나님 빨리 비를 주시어 / 내 자식들을 목욕시켜 주소서……’
이렇게 애달파하기도 했다. 백운산 자락 섬진마을을 하얀 매화로 단장하기 시작한 섬진강은 섬진교를 지나 하동송림과 하동포구공원 솔밭에서 강바람과 함께 봄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섬진대교 아래에서 비로소 600리 여정을 마감하고 바다가 된다.
■ 여행메모
= 섬진강 봄나들이를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곡성IC에서 내려 60번 국도를 타고 곡성읍내의 섬진강 기차마을을 찾는다. 이곳에서 17번 국도를 타면 호곡나루터, 두가현수교, 압록유원지가 차례로 나온다. 구례구역에서 용문교를 건너 9번 군도를 타면 사성암을 거쳐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861번 지방도를 만난다. 남도대교를 지나 줄곧 달리면 섬진마을의 청매실농원이다.
구례에서 섬진강 동쪽의 19번 국도를 타면 화개장터와 최참판댁, 하동송림, 하동포구공원이 나온다. 화개 5일장은 끝자리가 1, 6일인 날에 열리지만 장날보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 더 붐빈다. 하동읍내의 여여식당(055-884-0080)과 다압면의 청해진가든(061-772-4925)은 재첩국 전문식당.
광양시와 청매실농원은 3월 7∼16일에 청매실농원이 위치한 광양 매화마을에서 문화축제를 연다. 매화꽃밭에서는 꽃길음악회, 매실음식 시식회, 사진촬영대회, 백일장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열린다. 청매실농원 061-772-4066.
■ 홍쌍리 여사는=1930년 밀양 출생. 백운산 자락에 매화나무를 심고 다양한 매실 제품을 개발해 새농민상(1996년), 석탑산업훈장 포장(1998년), 대산농촌 문화대상(2001년), 우수여성발명인상(2002년) 등을 받았다. 1995년에 첫 선을 보인 청매실농원 매화축제는 매년 100여 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축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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