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지리산이 품고 있는 대한민국 으뜸 예향, 남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 ▲ 성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가 깃든 광한루원은 남원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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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품이 가장 너른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은 남원(南原)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을이다. 춘향가 흥부가 등의 판소리가 이 고을에 전승되어온 이야기에 뿌리를 두었고, 내로라하는 수많은 명창들도 이 고을에 태를 묻었으니 판소리의 성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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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향으로도 불리는 남원 기행의 으뜸은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가 깃든 광한루원(廣寒樓苑)이다. 조선 숙종 때인 1675년 음력 사월초파일, 남원의 퇴기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 사이에서 태어난 성춘향은 16세가 되던 단옷날에 사또 아들 이도령과 사랑을 맺는다. 하지만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나간 후 춘향은 후임 사또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게 되고, 죽기 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찾아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코흘리개 아이들도 알고 있는 춘향전의 스토리다.
매년 늦봄 남원골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광한루원에서는 춘향을 기리는 춘향제가 열린다. 1931년 춘향사당을 짓고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것을 기념하는 단옷날 제사를 지낸 게 시초다. 당시 개성·진주·평양·동래·한양 등 전국 각지의 명기(名妓) 100명쯤이 모여 춘향의 정조를 기렸다. 그 후 제삿날은 춘향의 생일인 음력 사월초파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는 양력 5월5일을 전후해 지내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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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제를 빛내는 여러 행사 중에 전국명창대회는 실력을 인정받는 명창의 등용문으로 손꼽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상현 국창이 첫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신영희, 안숙선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많은 명창들이 이 대회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춘향제의 위상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난 광한루원은 언제 둘러봐도 참 좋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인이 만났던 이런 늦봄이 최고다. 광한루원은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표현한 공간이다. 광한루(보물 제281호) 앞 연못은 은하수요, 연못에 떠있는 섬들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의 상징이다. 그 앞에 춘향과 이도령이 신분을 초월한 만남을 이룬, 견우 직녀 전설이 서린 오작교가 있다. 광한루라는 이름도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월궁 속에 있는 정자’와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연못에 걸린 작은 다리를 건너 영주산 대숲을 지나면 봉래산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작교가 지척인 방장산에 도달한다. 호젓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일품인 방장산 정자에 앉으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 시간 흐르는 줄 모른다.
오작교나 광한루 앞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옷을 빌려주는 장사는 언제나 짭짤해 보인다.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관광지의 사진사. 디지털카메라가 개인화되는 바람에 웬만한 곳에선 거의 사라져 버렸으나 이곳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봐요, 할멈. 그렇게 하니 진짜 춘향이 같구먼.”
“어이구, 우리 영감도 이도령 뺨치는구려.”
서울서 온 노부부는 두 손을 꼭 잡고 미소를 지으며 춘향과 이도령처럼 포즈를 취한다. 한복 잠깐 빌려 입고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얻는 데, 절약이 몸에 밴 세대가 개인당 5,000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면서도 흥겹게 웃을 수 있는 건 너무도 유명한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
- ▲ 춘향제는 남원 시민 전체가 한바탕 어울리는 큰 축제다.
- 그네뛰기도 놓칠 수 없다. 춘향제에서 특별히 선발된 ‘그네춘향’이 시범을 보일 땐 모두 넋을 잃고 그녀가 연분홍 치마를 휘날리며 허공으로 다가왔다 멀어지는 광경을 감탄하며 바라본다. 또 춘향제 때 벌어지는 춘향그네뛰기대회엔 서울 부산 등 타지에서 온 관광객들의 신청도 줄을 잇는다. 한번쯤 춘향이가 되어 ‘향단아, 그네를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서정주 시인의 ‘추천사’ 중에서) 하고 노래하고 싶은 건 대부분의 여인들이 가진 소망일 터이니.
실제로 전통적으로 주로 여성들의 놀이였던 그네에는 남정네들의 간장을 녹이는 은근함이 있다. 젊은 여인들이 그네를 구를 때마다 연분홍 치마폭은 허공에서 부풀어 오르고, 저고리고름은 바람에 나부끼며, 빨간 댕기꼬리는 이리저리 펄렁거리니 젊은 총각들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이도령 또한 춘향이 그네 뛰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 아니겠는가. 하기야 춘향이 같이 어여쁜 여인이 그네를 타면 뉘라서 반하지 않을까. 그것도 봄 햇살 맑은 날 호남제일루라는 광한루원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춘향이 그녀가 앞에 있다면 긴 사연 들으며 술 한 잔 나누고 싶은 봄밤에 지리산 기슭 육모정 앞에 자리한 춘향묘를 찾아가 봉분에 동동주 한 잔 뿌려준들 어떠랴. 이쯤에 이르면 일부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춘향이 묘가 있었어? 그럼 실제 인물이란 말야?’ 그렇다. 실제로 남원 지역 노인들은 대부분 춘향이 실제 인물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춘향묘는 1966년 주천면 호경리에서 춘향과 관련된 지석이 발견돼 1990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만든 가묘다.
여기서 잠깐 춘향의 실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춘향과 이도령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되다가 판소리로 전해져 춘향가가 되었고, 소설로도 씌어졌다. 그런데 춘향전의 구전설화는 매우 다양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백제왕으로부터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는 지리산녀 설화를 비롯해 박색 설화, 김우항 설화, 노진의 설화, 성이성 설화, 양진사 설화 등이다. 이중에서 성이성 설화가 가장 그럴 듯하지만, 춘향전은 여러 설화들이 씨줄과 날줄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이루어진 명작이다.
여러 설화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춘향이 추녀였다는 박색 설화다. 잠시 사연을 들어보자. 차정언이 지은 해동염사(海東艶史)에는 춘향은 아주 박색이고, 춘향의 몸종인 향단이의 용모가 훨씬 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춘향은 삼십이 넘도록 통혼하는 사람조차 없었는데, 어느 날 요천에서 빨래를 하다가 이도령을 보고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춘향 어머니 월매는 계책을 세웠다. 이도령을 광한루로 유인해 예쁘게 단장한 향단이로 하여금 이도령에게 술을 권하게 한 것이다. 그리곤 술 취한 이도령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 춘향과 잠자리를 하게 하였다. 월매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도령에게 정표(情標)를 달라고 하자 이도령은 소매 속에 있던 비단 수건을 주었다.
그 뒤 이도령은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고, 춘향은 이도령을 기다리다 못해 광한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남원 사람들은 이도령이 떠난 고개에다 장사지내고, 춘향의 영혼이 편히 쉬도록 자갈로 덮어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춘향이고개라고도 불리는 박석고개 전설이다.
박석고개 주변에는 춘향의 이야기가 유래하는 지명이 여럿 전한다. 오리정은 이도령이 한양으로 떠날 때 이곳까지 따라온 춘향이가 눈물로써 보낸 곳이라 한다. 또 오리정 북쪽으로 500m 지점에는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한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던져 버린 곳이라는 ‘춘향버선밭’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어디 옛 고전뿐일까. 남원 북서쪽의 사매면 노봉리는 작가 최명희(1947-1998)가 만 17년 동안 혼신을 바쳐 집필한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다. 1930년대부터 1943년을 배경으로 남원 양반 가문의 몰락과정을 그리면서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난의 시대를 이겨나가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혼불’의 미덕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의 재인식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언급했듯이 ‘혼불’은 당시의 풍속사를 세밀하게 정리했고, 우리말의 아
‘혼불’의 무대를 더듬고 나면 남원 서부를 얼추 돌아본 셈이다. 이젠 동부로 가보자. 남원은 서부와 동부가 각각 평야지대와 산간지대로 극명하게 나뉜다. 바로 백두대간 분수령 때문인데, 남원에서 운봉 가는 길목의 여원재(480m·女院峙)는 백두대간 가장 남쪽에 있는 큰 고개다. 이곳은 영호남을 잇는 중요 길목이면서 비옥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으니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왜구가 운봉을 침략했을 당시 여원재 고갯마루 주막엔 젊고 아리따운 주모가 있었다. 이 여인은 왜구가 자신을 범하려 하자 왜구의 손에 더렵혀진 왼쪽 젖가슴을 벼린 칼로 도려내고 자결하고 말았다.
- ▲ (왼쪽) 황산대첩 당시 왜구들의 시체가 피를 이뤘다는 피바위. (오른쪽) 1380년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기념으로 세운 황산대첩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황산대첩을 어젯일처럼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이성계가 활로 쏘아 떨어뜨린 왜장 아지발도의 이름도 노인의 입에서 술술 새어나온다. 아지발도의 피가 묻었다는 광천 물가의 피바위는 여전히 붉은 빛이고, 운봉고원서 팔량치 가는 길목에 솟은 황산은 예나 지금이나 뾰족한 생김새로 오가는 이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지금도 여원재 암벽엔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 전설의 여인과 마애불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인적 드문 고갯마루 그 마애불 앞에 서 있으면 문득 차가운 암벽에서 전설의 여인이 튀어나와 옛 이야기를 전해줄 듯 생생하다.
운봉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고원이다. 백두대간 분수령과 지리산 태극능선 끝자락에 싸안긴 지세는 펑퍼짐하고, 그 안엔 나지막한 언덕들이 정겹다. 그래서 험한 산골이 아니라 마치 호남평야에 들어선 것만 같다. 보통 운봉고원이라 말할 땐 운봉읍 한 고을만 일컫지 않는다. 맏형격인 운봉읍을 포함하여 아영·인월·산내면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남원은 백두대간 분수령을 경계로 수계가 갈린다. 서부는 요천으로 해서 섬진강으로, 운봉고원은 임천강으로 해서 남강으로 흘러든 뒤 낙동강에 합류된다. 옛말에 ‘물은 사람을 모으고 산은 가른다’고 했는데, 이런 까닭에 양쪽 지역은 생활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운봉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전라도에 속하면서도 경상도적인 색채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 ▲ 이성계가 왜구와 황산전투를 벌일 때 도와준 여인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여원치 마애불.
- 가장 큰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말씨일 것이다. 운봉고원 토박이 말씨엔 경상도 억양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곳 토박이가 타지로 가면 사람들이 ‘고향이 경상도 어디냐’고 묻는 일이 있다고 한다. 즉 운봉 말씨에선 경상도 말씨의 중요한 특성인 높은 억양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논에서 일하다 보면 경상도 말씨와 전라도 말씨가 섞여 정겹게 들려오는 게 바로 이 운봉고원인 것이다.
- 그래서 운봉 말씨가 삼도의 합류지점인 충북 황간 말씨, 삼국시대 국경의 잔재인 전북 무풍 말씨 등과 함께 언어학자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팔도에서 아주 유명한 만석꾼도 냈다는 운봉고원은 정말로 들판이 넓다. 이 지역은 동학군이 못 넘었던 여원치 부근에 널려있는 동학혁명의 파편들,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찔러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황산싸움터 등 보이는 것마다 주저리주저리 사연을 들려주는 곳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 지역의 보배는 판소리다.
-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가 이곳 운봉에서 발생했으며,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부가의 배경이 된 마을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중한 민족문화유산인 판소리의 성지(聖地)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지역인 것이다.
또 목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남원목기는 특유의 향기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 단단한 나무재질에다가 벗겨지지 않는 옻칠로 오래 전부터 운봉의 특산품으로 꼽혔다. 제사 때마다 젯상을 차리는 보통 집이라면 한 벌씩 준비해 두게 마련인 제기(祭器)는 전국 수요량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공급하고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운봉고원을 동서로 지나는 24번 국도 주변엔 여러 개의 목기공장과 전시장이 있어 길손의 눈길을 끈다.
- ▲ 통일신라시대인 828년 구산선문의 하나로 창건된 실상사. 경내엔 삼층석탑 등 수많은 보물이 남아 있다.
- 물론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웅장한 지리산이 키워낸 나무 덕이다. 게다가 인근에 실상사 같은 큰 절집과 산 골짝 골짝마다 암자가 많았으니 스님이 사용하는 그릇의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운봉 동쪽의 봉우리를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 같다 하여 바래봉(1,165m)이라 이름 지어줬을까.
또 운봉고원에선 마을 입구마다 석장승(벅수)이 서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운봉읍엔 서천리와 북천리에 있고, 고남산 가는 권포리 마을 입구에도 퉁방울눈을 크게 뜨고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소박한 석장승을 만난다.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송흥록(宋興祿·1780년경-1860년경) 명창이 이 비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송흥록은 춘향묘와 가까운 주천면의 구룡폭포에서 득음하였고, 귀곡성(鬼哭聲)을 얻으려 가랑비 내리는 음침한 날 밤이면 아장터를 찾아가 밤새우기를 3년, 결국 접신이 되어 귀신의 소리를 뛰어나게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사가 떼죽음을 당한 원귀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대목을 귀곡성으로 하면 듣는 사람들은 소름이 끼치고, 춘향가 옥중 장면의 귀곡성도 청중으로 하여금 겁을 먹게 했다. 또 어느 여름밤엔 진주 촉석루에 가서 그가 혼곡성을 풀어놓으니 별안간 촛불이 꺼져 좌중은 모두 등골이 오싹했다고 전한다.
판소리의 대천재 송만갑(宋萬甲·1865-1939)도 가문의 영향으로 일곱 살에 소리에 입문했다. 그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보래~박봉술로 이어지는 200년 판소리 역사 속의 허리 역할을 단단하게 해낸 인물로 꼽힌다. 이중 가장 많은 제자를 가진 송만갑의 가풍(歌風)은 요즘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적벽가 중 새타령이나 흥부가 중 박타령, 춘향가 중 십장가 등을 잘 불렀다는 송만갑은 구김살 없는 꼬장꼬장한 통성으로 힘찬 일구 일절은 명필의 붓놀림과 같았다. 많은 제자들은 송만갑의 음반을 앞에 놓고도 그 가법을 흉내 못낼 정도로 신비로움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또 수궁가의 박초월(朴初月·1913-1983)은 아영면 청계리에서 비전 마을로 이사를 왔다. 박초월은 최근의 명창이기에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박초월의 소리를 잘 기억한다.
운봉의 이런 문화적 자원은 지리산의 예술적인 기운과 사람 살기 좋은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넉넉한 물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 그러고 보면 통일신라 때 옥보고가 거문고를 가지고 50년 동안 제자를 가르쳤다고 전하는 곳이 바로 이 운봉(운상원)이라 하는 사실에선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된다.
자, 이번엔 흥부마을로 찾아가보자. 운봉고원 북쪽에 있는 인월면의 성산 마을은 흥부와 놀부 형제의 고향이요, 아영면의 성리 마을은 쫓겨난 흥부가 들어갔다가 부자가 된 마을이다. 1990년대 초 연구 결과 성산 마을의 박첨지 설화와 성리 마을의 춘보 설화가 흥부전의 근원 설화로 밝혀졌다.
성리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 자시, 당산제를 모시고 난 후 별도로 춘보의 묘에 제물을 차려놓고 추모제를 올리고 주민이 마당밟이 굿을 쳤는데, 이 행사는 일제강점기 말기 식량난으로 중단되었다가 1992년 정월에 다시 부활되었다.
또 성리 마을에는 흥부와 관련 있는 고유 지명이 수십 개나 된다. 즉, 제비가 하늘을 나는 형상의 연산등,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골,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가다 쉬었다는 화초장바위거리, 사실은 흥부가 여기서 순금을 주워 부자가 됐을 거라는 생금모퉁이, 놀부가 지고 가던 화초장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래 생각했다는 장구목, 흥부가 어렵게 살 때 허기져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 마을의 웬만한 이름은 모두 흥부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다.
초기 흥부가엔 지명이나 인명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놀부 형제의 성도 박씨와 연씨로 본마다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흥부의 정착지가 구체적인 행정구역명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서편제 명창 김창환의 흥부가부터라 한다. 제비가 흥부네 집을 찾아오는 대목인 흥보제비노정기엔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로 되어 있다. 현재의 모든 판소리 창본은 이 ‘흥보제비노정기’를 따르고 있다.
또 놀부집이 있는 곳만을 따로 밝혀주는 동편제의 명창 장판개의 놀보제비노정기엔 놀부의 집을 비교적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놀보가 사는지라. 저 제비 거동을 보아, (중략) 전라감영을 당도하야 완산 칠봉을 구경하고, 거기서 짓쳐 달라 남원 광한루를 구경하고, 운봉 연재를 얼른 넘어 놀보집을 당도. 놀보가 보고서 좋아라.’
연재는 지금의 여원재다. 이 고개를 넘은 놀부제비가 운봉과 함양의 가르는 팔량재 직전의 ‘운봉 함양 두 얼품’의 전라도 땅 성산 마을로 들어갔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산 마을이 흥부와 놀부 형제의 고향이 되었다. 90년대 초 이 지역에서는 흥부가의 발상지를 찾느라 성리 마을과 성산 마을 주민들이 서로 얼굴 붉히며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면서 남원 고을이 다 들썩거렸다. 길손이 처음 찾아갔던 1990년대 중반에도 앙금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흥부 출생지와 흥부 발복지로 사이좋게 정리가 되었다.
남원의 마지막 여정은 실상사(實相寺)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이 올려다보이는 남원 만수천 기슭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구산선문의 탯자리로 이름 높은 절집이다. 도로가 잘 뚫린 21세기에도 지리산 기슭의 실상사까지 접근하는 게 만만치 않은데, 이 절집이 들어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인적 거의 없는 첩첩산중이었으리. 그러나 실상사의 미덕은 근접하기 힘든 높다란 산중턱이 아니라 펑퍼짐한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 평지사찰이란 사실에 있다.
실상사로 들어서는 길손을 처음으로 반겨주는 것은 만수천에 걸린 해탈교 양쪽에 서있는 3기의 석장승이다. 1725년 무렵에 세워졌으니 거의 300년 가까이 그렇게 실상사를 지켜온 셈이다. 본래 4기가 있었으나 1936년 대홍수 때 한 기가 떠내려가고 말았다고 한다. 보통 장승은 남녀 한 쌍으로 세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도 이 장승들은 모두 남성이다.
세 장승은 생김새도 모두 비슷하다. 머리엔 헐렁한 벙거지를 썼으며, 툭 튀어나온 퉁방울눈에 코는 뭉툭한 주먹코다. 거기에 윗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보이지만 입가의 미소는 유순한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기보다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장승은 주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면서 잡귀의 침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도 한다. 이 장승 역시 절집의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그러니 장승과 눈 맞추면 경내로 들어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상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도 없고, 권위와 깨달음 순서의 상징이라는 높다란 계단도 없다. 모든 전각들이 비슷한 높이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교종의 절집은 계단식, 찰나에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절집은 평지에 터를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듯 웬만한 석물과 전각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절집이지만 둘러보려면 의외로 시간이 꽤 걸린다. 우선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 있어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이 탑의 상륜부를 참고했다는 동서 삼층석탑, 그리고 석등에 불을 지피기 위해 올라서는 계단석이 남아 있는 석등에 눈길이 간다.
그 너머의 보광전은 실상사의 중심이 되는 전각이지만, 실상사의 명성이나 역사성에 비해 작고 소박하다. 조선시대에 중건하면서 옛 위세를 찾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 보광전 안에 걸려 있는 범종에는 호국사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연이 전한다. 즉 종을 치는 자리엔 마치 일본 지도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 있는데, 이곳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약사전에 모셔진 철제여래좌상은 2.7m 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철불이다. 창건주 홍척 스님의 제자인 수철 스님이 4천 근이나 되는 철을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철불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것만 같은 산’이라는 지리산과 같은 무게로 결가부좌 자세를 취한 채 동남쪽에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이 철불이 연꽃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계신 까닭은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한반도의 지기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보광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이 있는데, 이곳에 실상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 스님, 그리고 제자인 수철 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역시 모두 빼어난 조각 솜씨 덕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옛 조계암터에서 만나는 편운화상의 부도도 놓칠 수 없다. 한편, 실상사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의 산중턱에 있는 백장암도 한번쯤 둘러봐야 할 곳이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예술품이기도 하다.
- ▲ (왼쪽)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한반도의 기운을 막고 있다는 실상사 철불. 창건 때부터 이 절집을 듬직하게 지켜오고 있다. (오른쪽) 뱀사골계곡 안쪽의 와운마을엔 신령스런 기운이 넘치는 ‘지리산 천년송’이 자라고 있다.
- 실상사를 빠져나오면 발길은 저절로 정령치쪽으로 향한다. 뱀사골계곡 안쪽에 자리 잡은 와운 마을 지리산 천년송의 신령스런 자태를 감상하고, 한때 ‘하늘 아래 첫동네’라 하여 오지마을의 상징으로도 알려졌던 달궁 마을을 스치면 마한의 정장군(鄭將軍)이 지키던 정령치 고갯마루다.
변방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리움으로 밤을 새웠을 그 고갯마루에 서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백두대간 산줄기 너머로 남원 고을이 아련하다. 이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춘향가의 흥겨운 중중모리 한 대목.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 나….”
그렇다. 비록 이 소리가 봄날의 환청이라 해도 어찌 “얼-쑤”하고 추임새를 넣지 않을 수 있으랴.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예향이요,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이 아니던가.
- 남원, 어떤곳인가
전라북도 남동부에 있는 남원시(南原市)는 동쪽으로 경남 함양·하동군, 서쪽으로 임실·순창군, 북쪽으로 장수군, 남쪽으로 전남 구례·곡성군에 접한다. 동부는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덕두산(德頭山·1,150m)·바래봉(1,165m)·삼봉산(三峰山·1,187m)·명선봉(明善峰·1,586m)·반야봉(般若峰·1,732m)·노고단(老姑壇·1,507m)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는 산지로, 그 아래에는 해발 450~650m에 달하는 운봉고원 등이 넓게 펼쳐져 있다. 운봉읍·인월면·산내면·아영면에 걸쳐 있는 운봉고원은 정령치·등구재·다리재·꼬부랑재·여원재·팔랑치 등 험한 고개들이 많다.
장수·함양군으로부터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요천(蓼川)은 남원의 중앙부를 지나 서남부의 곡성군 고달면에서 섬진강으로 합류한다. 운봉면 일대에서 발원하는 광천은 동부로 흐르다가 노고단·만복대(萬福臺·1,433m) 등지에서 발원하는 달궁계곡과 반야봉에서 발원하는 뱀사골계곡의 계류와 합류하여 만수천을 이룬 다음 임천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2.7℃ 내외, 연강수량 1,660mm 내외, 1월 평균기온 0.4℃ 내외, 7월 평균기온 25.9℃ 내외로 남부내륙형 기후에 속하나, 지형이 분지·고원상분지·고산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지역에 따라 기후차가 심하다.
남원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다. 16년(백제 온조왕 34)에는 고룡군(古龍郡)이라 했다가, 196년(초고왕 31) 대방군(帶方郡)으로 바뀌었다. 660년 신라가 남원에 대방도독부(帶方都督府)를 두었으며, 685년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남원이라 부르고 전주에 예속시켰다. 940년(고려 태조 23) 남원부가 됐으며, 1018년 지부사(知府事)로 고쳤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남원과 운봉은 군이 되어 남원부 관할 아래 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북도에 소속됐다. 2007년 현재 1읍 9동 15면을 관할한다.
남원의 면적은 넓지만 백두대간이 통과하여 임야가 64%를 차지하고 경지는 24%에 불과하다. 그러나 요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논의 비율이 74%나 된다. 동부산간지대는 고랭지농업으로 농가소득수준이 높다. 임야가 넓어 밤·산수유·토종꿀과 약초·산나물을 비롯해 소·돼지·면양 등 가축이 많이 사육되고 있다. 지리산의 목재를 원료로 한 목기공업이 발달했으며, 운봉읍은 전국적인 제기 생산지로 이름 높다.
전주·진주·장수·광주·순천·곡성 등 남원시 주변의 도시들을 잇는 국도와 지방도가 통과한다. 남원시 관내의 면까지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물류 조건의 핵심인 전라선 철도, 88올림픽고속도로, 남원~광양 간 산업도로가 관통하는 교통요충지다.
- ▲ 광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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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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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보물 제281호)는 조선 세종 때 명재상인 황희가 처음 세웠다. 당시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으나 1434년(세종 16) 정인지가 중건하고 광한루(廣寒樓)라 개칭했다. 전설의 달나라 궁궐 ‘광한청허부’와 닮았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재건했다. 건물은 남향으로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각지붕의 누각이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았다. 후면(後面) 중앙칸에는 누마루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이는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든 것이다. 입장료 어른 1,600원, 어린이 600원. 관람시간 08:00~19:00. 전화 063-620-6831~3.
춘향테마파크
광한루 맞은편 언덕에 자리한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전 내용을 토대로 꾸며놓은 테마공원으로 최근 남원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언덕길을 따라 구불구불 연결된 산책로를 따르다보면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부터 한양으로 올라가는 이도령의 말고삐를 부여잡고 애원하는 춘향,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해 동헌에서 고초를 당하는 춘향 등 다양한 인형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는 향토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남원의 유구한 역사와 판소리 등의 문화유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공간이다. 테마파크 출구 옆길로 300m 가량 올라가면 조망 좋은 덕음정으로 가는 오솔길이 이어진다.
개장시간 09:00~22:00(폐장 30분 전까지 입장). 입장료 어른 1,500원, 어린이 500원. 주차료는 없다. 전화 063-620-6836.
혼불문학관
사매면 노봉리는 대하소설 ‘혼불‘의 고향이다. ‘혼불’은 작가 최명희(1947-1998)가 만 17년 동안 혼신을 바쳐 집필한 작품으로, 1930년대를 배경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청암부인’이라는 주인공의 주체적인 의지에 승화시켰다.
2004년에 문을 연 문학관은 6천여 평 규모. 널따란 마당 한쪽에 멋들어진 한옥 두 채가 있는데, 오른쪽은 관리사무소, 왼쪽은 전시관이다. 주변에 양반집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종가집을 복원했다. 관람시간 09: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입장료는 없다. 전화 063-620-6788.
바래봉 철쭉
지리산 서쪽 줄기인 바래봉은 우리나라 최고의 철쭉 군락지다. 여느 군락지와 달리 목장 풍경의 푸른 초원에 피어난 붉은 철쭉꽃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철쭉꽃 군락은 1123m봉에서 바래봉 서쪽 아래까지 4km 이상 넓게 퍼져 있는데, 팔랑치에서 오두막까지 1.5km쯤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운봉읍사무소 전화 063-620-6601.
만복사지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만복사지(萬福寺址·사적 제349호)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만복사가 있던 절터다. 통일신라 후기에 도선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만복사는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가람배치는 1탑 3금당식(金堂式). 본탑을 중심으로 북·동·서에 각각 금당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강당·중문이 있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동탑서전(東塔西殿) 가람배치와 조선시대의 1탑 3금당 가람배치가 중복되어 있다. 경내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만복사지 5층석탑
만복사지 5층석탑(보물 제30호)은 높은 기단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현재 남아있는 탑의 높이는 5.75m다. 각층 몸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 올렸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만복사지 당간지주
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32호)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기둥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다.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긴다. 높이는 흙에 묻힌 받침부를 포함해 5m 정도에 이른다. 만복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만복사지 석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인 만복사지 석좌(보물 제31호)는 고려시대 작품이다.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을 조각했다. 중간부분은 모서리마다 짧은 기둥을 새겼다. 윗부분은 옆면에 연꽃으로 장식했던 듯하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석불입상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3호)은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바위에 조각한 작품이다. 머리 윤곽은 뚜렷하고 고수머리는 간략하게 표현했다.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깨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원만한 굴곡을 이루는 몸매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고도 우아하지만 옷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어색하고 위축된 면이 보인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광배는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광배 뒷면에는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실상사
산내면의 지리산 기슭 평지에 있는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구산선문의 하나로 창건했고, 그의 제자 수철·편운 스님이 크게 번창시켰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사찰 건물이 소실됐다가 다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을 비롯해 10여 점의 보물이 있다. 입장료 어른 1,500원, 어린이 800원. 전화 063-636-3031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은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탑의 구조와 장식이 일반적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높이는 5m. 탑의 장식 역시 독특하여, 층마다 탑의 몸체에 보살·선녀·천왕 등 다양한 인물상을 화려하고도 자유분방하게 새겨 놓았다. 지붕 아래에는 일반 석탑과 달리 연꽃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마치 나무 다루듯 돌을 섬세하게 조각한 솜씨가 돋보인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실상사 경내에 있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은 통일신라시대인 893년(진성여왕 7) 수철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행적과 뜻을 기려 세운 부도탑이다. 팔각형을 기본 형태로 삼고 있으며, 탑 몸체 각 면에는 사천왕의 모습을 새겼다. 목조탑 형식으로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지붕에서 석공의 뛰어난 조각술을 엿볼 수 있다. 높이 3m에 이른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제 34호)는 수철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부도탑과 함께 세운 비석이다. 높이 2.9m로 비머리에는 구슬을 다루는 용을 조각했다. 비에는 수철 스님이 태어나 불가에 귀의·득도하여 세상을 교화한 후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과 그를 기려 탑을 세운 경위를 차례로 적어 놓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글자가 거의 닳아 없어져 판독이 어렵다.
실상사 석등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은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 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꽃과 꽃잎 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부도
실상사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잔디밭에 세워진 실상사 부도(보물 제36호)는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었으나 구성이나 조각을 다소 간략하게 처리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팔각 받침돌 아래쪽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를 조각했다. 중간부분은 무늬 없이 다듬었고, 윗부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몸체의 여덟 면 중 한 면에만 문 모양을 조각하고 나머지 면은 전혀 장식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간소하고 소박하나 절제되고 균형 잡힌 느낌을 준다.
실상사 삼층석탑
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은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증각대사 응료탑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증각대사 응료탑(보물 제38호)은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다. 기단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 뚜렷하다. 탑신의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했다. 탑신의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증각대사 응료탑비
증각대사 응료탑비(보물 제39호)는 홍척 스님을 추모하여 부도탑과 함께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준다.
실상사 백장암 석등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은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과 함께 있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루뭉술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의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라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
약수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는 가운데 자리한 아미타불과 그를 둘러싼 열 분의 보살 및 제자를 나무판에 조각한 조선 후기의 작품이다. 높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세 겹의 둥근 연꽃무늬 테두리를 두르고 있고, 그 양옆에는 네 보살을 배치했다. 위쪽에는 가운데에 부처의 두 제자를, 그 양옆으로 다시 네 보살을 배치했다.
탱화 가장자리와 불상 사이사이에 섬세한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각진 얼굴과 신체, 두텁게 표현된 옷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엿볼 수 있다. 1782년(정조 6) 제작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원만한 불상들의 모습과 배치구조, 정교한 세부조각 등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상사 석장승
실상사 입구의 다리 주변에 있는 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5호)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이다. 원래 이곳 냇가 양쪽에 각각 2개씩 모두 4개가 있었으나 그중 하나가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장승들은 대략 높이 2.5~2.9m, 너비 40~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을 보아 같은 시기인 1725년(영조 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용담사지 석불입상
주천면 용담리의 용담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2호)은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에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거구의 석불입상으로 높이가 6m에 이른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많이 손상됐으나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목에는 형식적으로 새긴 세 줄 주름인 삼도(三道)가 있다. 몸은 어깨와 가슴이 떡 벌어져 있고, 다리는 돌기둥처럼 강인해 보인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깨어진 곳이 많아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불꽃무늬를 조각한 흔적이 남아있다.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도통동 선원사에 모셔져 있는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22호)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철불로서 높이는 1.2m, 무릎폭 90cm다.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신체는 부드러운 어깨선, 듬직한 가슴, 좁은 허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책상다리를 한 하체로 비교적 사실적이다. 옷은 법의를 표현했는데,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옷가슴을 V자로 여민 것이 특이하다. 얼굴은 다소 과장되어 온화함과 우아함을 잃어버린 반면 신체는 자연스럽게 안정을 이루고 있다. 손은 근래에 새로이 만들어 끼웠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대산면 신계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23호)은 거대한 바위를 몸체 뒤의 광배로 삼고 자연 암반을 대좌로 삼은 고려시대 마애불로서 매우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부피감이 풍부하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왼쪽 어깨에 걸친 옷은 단순한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이목구비를 비교적 생동감 있게 조각했다. 넓은 어깨, 불룩한 가슴, 통통한 팔·다리에도 입체감이 실려 있어 역동적인 모습이다. 구슬처럼 둥글게 표현한 머리광배에는 특이하게도 연꽃잎을 표현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정령치 북쪽 고리봉 아래의 개령암터 바위에 새겨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제1123호)은 여러 부처의 모습을 돋을새김한 불상들이 모두 12구에 달한다.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4m로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에서 고려시대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하다.
여원치 마애불상
이백면 양가리 여원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긴 이 마애불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가슴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기는 하지만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 귀, 또렷한 코는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불상의 보호각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불상 옆에는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이 지은 글을 새겼다. 글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다 이성계가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 불상은 그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조각했다 한다.
황산대첩비지
운봉읍 화수리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는 고려 말인 1380년(우왕 6)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다. 이를 기념해 1577년(선조 10)에 김귀영(金貴榮)의 글을 짓고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에 재건했으나 비석을 완전 복원하기 어려워 대신 그 터를 사적으로 지정했다. 주변에 왜구들의 시체가 피를 이뤘다는 피바위 등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다.
남원성
동충동의 남원성(사적 제298호)은 통일신라시대에 지방행정중심인 소경이 있던 자리다. 조선 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떠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 이후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했다.
<출처> 월간산 451호(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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