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김제
- 높푸른 하늘과 맞닿은 황금빛 지평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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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민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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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판의 곡식이 누릇누릇 익어가는 가을날의 김제 들판
- 시간은 흘러 무더운 여름은 가고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 계절이 되면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들판에는 누릇누릇 곡식들이 익어간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상찬이다. 사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들녘만큼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또 있으랴.
- 아무리 시절이 좋아졌다 해도 겨울을 지내야 하는 인간에게 넉넉한 곡식은 생존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계절을 앞두고 있으면 문득 생각나는 고을이 있으니 바로 우리 한반도에서 가장 너른 들판이 있는 김제(金堤)다.
김제의 첫인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 길손이 김제란 곳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반의 어느 늦가을이다. 김제를 거쳐 부안땅으로 가는 길이었다. 대전을 벗어난 시외버스가 전주를 지나자 차창 밖의 경관에서 산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 버스가 만경강을 지나 김제로 들어섰을 때 한순간 산은 보이지 않고 널따란 들판만 두 눈에 가득 찼다. 땅 위에 솟은 것이라 해야 나지막한 언덕뿐이었다. 길손이 그때까지 보아왔던 산간분지의 들판과는 전혀 다른 풍광은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호남평야였다.
충격도 익숙해지면 일상으로 바뀌는 법인가 보다. 김제를 들르는 횟수도 늘어 읍내 시장 골목길도 대충 익힐 무렵이 되자 그 너른 들판은 마치 고향 풍경인 듯 여겨졌다. 그러다 이상한 광경을 만났다. 아마 그 이듬해 추수가 끝난 늦가을인 듯싶었는데, 들이란 들은 온통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 처음에는 객토작업을 하는가 싶었으나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단순한 객토가 아니라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아마 수년간 가을마다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후 너른 들녘과 사금, 이 두 가지는 김제의 상징이 되어 평생 길손의 머릿속에 각인된 채 존재해왔다. 모악산 금산사와 함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금산사 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평야지대를 보듬고 있는 산이 동쪽으로 보인다. 호남정맥의 묵방산(538m)에서 갈라져 나와 김제를 거쳐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봉화산(85m)에서 세력을 다하는 산줄기인 모악지맥(母岳支脈)의 맹주 모악산(母岳山·794m)이다. 이 산군을 제외하고 평야지대를 지나는 모악지맥 분수령의 높이는 50m 내외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김제 고을의 뼈대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제 동쪽을 이루는 모악산 지역의 금산면, 황산면, 봉남면, 금구면 일원은 과거 금구군(金溝郡)에 속했다.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신라 때부터 사금이 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1930년대 이후 금광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당시 김제지역의 금광은 모두 9군데. 일인들은 이곳에서 채취한 광석을 장항제련소에서 정제하였다. 김제 사금은 한때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는 금맥을 찾는 노다지꾼들로 넘쳐났다.
▲ 붉은 백일홍 그늘에서 바라본 금산사 미륵전. - 일확천금의 꿈을 좇던 노다지꾼들이 술잔을 기울이던 금산면의 원평장터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이내 김만평야의 넓고 기름진 들판을 보듬어 안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모악산은 ‘엄뫼’, 곧 ‘어미산’이란 우리말을 한자로 바꾼 것이니, 평야지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이 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때 모악산 기슭에는 금산사, 귀신사, 대원사, 수왕사 등 사찰을 비롯해 무려 80여 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품은 여느 산에 견주어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평야지대 백성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음을 알 수 있다. 1930~40년대에는 공주 계룡산과 쌍벽을 이루는 신흥종교 발흥지로 숱한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다. - 모악산에 크게 발자취를 남긴 인물은 신라 말기의 고승인 진표(眞表·?-?) 율사, 후백제의 견훤(甄萱·867-936),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다. 이중에서 모악산 정신의 근원은 진표율사와 금산사다. 599년에 창건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66년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불의 출현을 염원하는 민초의 꿈이 서려있는 사찰로 변모했다.
율사는 옛 백제땅인 김만평야의 만경 고을에서 태어나 8세기 중반에 활약한 고승이다. 숭제법사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하였고, 그 뒤 변산의 불사의방에서 3년 동안 온몸을 바위에 두들기는 망신참(亡身懺)을 한 끝에 미륵과 지장보살을 친견했다. 그리고 지장보살에게는 계본을, 미륵보살에게는 나무 간자(簡子)를 받았다. 금산사로 돌아온 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금산사를 미륵신앙의 터로 다졌다. - 율사는 미륵신앙에서도 석가모니가 입멸한 56억7천만 년이 흐른 뒤 미륵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을 설파했다. 이후 금산사는 미륵신앙, 즉 법상종(法相宗)의 대표적인 근본 도량이 되었다.
백제 후예의 한과 꿈이 서린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을 깨치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도모하던 그에게 당시 백성들의 희망이던 미륵불의 보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미륵도량인 금산사에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러나 맏아들 신검에 의해 미륵전 지하에 유폐되고 말았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신검과 둘째 아들 양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견훤을 가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석 달 동안 미륵전 지하에 감금당했던 견훤은 이곳을 탈출한 다음 왕건에게 투항해 신검을 쳐줄 것을 종용했다. 왕건과 함께 내려온 견훤은 왕건이 황산벌에서 신검의 군대를 무찌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후백제의 허망한 최후였다. 견훤은 울화병으로 등창이 나 논산의 황산사라는 절에서 죽었고, 논산에 있는 그의 묘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고려시대인 1069년에 혜덕왕사가 절을 중수하여 88당 711칸의 대사찰로 변모시키면서 금산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왕사는 원래의 절을 대사구(大寺區)로 하고, 그 남쪽에는 경전 강의와 수련 법회를 여는 광교원(廣敎院), 동북쪽에는 대덕들이 주석하는 봉천원(奉天院)을 증설해 사찰 구역을 합리적인 공간으로 삼분했다.
하지만 현재 금산사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축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구국 3화상이라 불리는 처영(處英·?-?)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하자 왜군이 정유재란 때 금산사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금산사 입구로 들어서다 보면 견훤이 쌓았다고 해서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석성문을 지난다. 이 성문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주문이 나오니 한때 대단했을 금산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널따란 절마당은 미륵하생을 기원하는 자들을 위한 광장이다. 경내에는 국보와 보물 등 나라에서 지정한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 심포항의 저녁노을. 새만금사업이 완성되면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를 풍경이다. - 미륵전은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쪽은 하나로 트인 통층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린 게 특이하다.
- 미륵은 본래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중 하나로 자씨(慈氏)보살이라 불리기도 하니 대자보전이 되었고, 용화지회는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미륵불이 된 후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龍華三會)'의 다른 표현이다. 모두 미륵을 모신 법당이란 뜻임을 알 수 있다.
법당으로 들어가 삼배를 올린 뒤 미륵불을 우러른다. 이곳 미륵보살상은 양쪽에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계신데, 삼존불 가운데 미륵불상이 11.82m, 좌우불상은 8.8m나 된다. 옥내 입불로는 세계 최대라 한다. 통층이라 이렇게 큰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것이리라.
미륵전을 나와 왼쪽에 있는 언덕을 오른다. 미륵산 주봉의 정기가 흘러와 맺힌 송대(松臺)라는 곳으로, 여기서 보면 널찍한 금산사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절에서는 이를 방등계단(方等戒檀)이라 한다. 이곳은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승려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했던 장소로, 율종사찰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계단 한가운데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석종형부도(보물 제26호)가 있고, 앞에는 일반적으로 들어서는 석등 대신에 오층석탑(보물 제25호)이 서 있다.
방등계단 아래쪽 절마당에 위치한 석련대(보물 제23호)는 불상 받침대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작품으로 하늘을 향해 피어오른 두 겹의 연꽃이 매우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는데도 마치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조각이 정교하다. 전문가 중에는 진표율사가 조성했던 미륵장륙상이 서 있었던 곳으로서 이 자리가 원래의 미륵전이 있던 곳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경우 금산사의 가람배치는 지금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석련대 한쪽에 있는 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은 재료가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라 점판암인 게 눈길을 끈다. 원래는 원로대덕들의 주석처였던 봉천원의 정중탑(庭中塔)이었는데, 인조 때 복구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섬세하며 균형감이 잘 잡혔다는 평을 듣고 있다.
대적광전은 미륵전과 함께 금산사의 또 하나의 중심법당으로 7칸이나 되는 긴 건물이라서 장중한 맛이 있어 미륵전과 함께 가로와 세로의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원래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86년 실측과정 중 불이 나 전소되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 벽골제에 꾸며놓은 연못에는 물을 퍼 올리는 농기구인 무자위를 비롯한 여러 농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숭상해온 5부처(아미타, 석가, 비로자나, 노사나, 약사여래)와 6보살(대세지, 관음, 문수, 보현, 일광, 월광)을 나란히 모시고 있다. 이는 대웅보전과 대적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전각들이 한 군데 합쳐진 것과 같다. 금산사가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춘 종합사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불교학자들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여러 기능의 법당을 한 건물 안에 통합시켜 놓은 의미라 짐작하고 있다.
- 대장전(보물 제827호)은 절마당 서쪽 끝 멀리서 미륵전을 마주보고 있는 아담한 불전이다. 본래 이 건물은 진표율사가 중창할 때 건립한 목탑으로서 미륵전 뜰 앞 우측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2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목탑 상륜부를 장식했던 흔적인 복발과 보주가 남아 있는 게 확연하다. 이렇게 넓은 절마당을 한 바퀴 돈 다음, 절 뒤편으로 돌아가 옛 봉천원이 있던 부도전에서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의 거북이 조각을 들여다보면 금산사에 위치한 주요 문화재는 대부분 훑어본 게 된다. 길손은 이번에 부도전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감동 깊게 바라봤다. 이 세상을 밝게 비춰줄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며-.
흔히 금산사만 보고 길을 떠나지만 모악산 기슭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절집이 하나 있다. 바로 귀신사(歸信寺)다. 금산사 사하촌인 용화동에서 712번 지방도를 타고 전주 방향으로 3km 정도 달리면 왼쪽으로 귀신사로 들어가는 좁은 마을길이 나온다. 이정표도 변변치 않은 이 절집은 의상이 676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귀신사라! 절집 이름이 왠지 으스스한 느낌을 들게 하지만, 한자를 해석하면 ‘믿음으로 돌아오는 도량’이니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 귀신사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긴 사찰명의 변천을 짚어보는 재미도 있다. 이 절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 10찰’ 중 하나로,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였다. 화엄 10찰이란 삼국통일을 이룬 통일신라가 지배이념으로 삼은 화엄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사찰로서, 태백산 부석사, 지리산 화엄사, 계룡산 갑사, 가야산 해인사, 금정산 범어사, 모악산 국신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는 수도인 경주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단점을 보완해 국토 경영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의도로서 정복지 백성들을 교화하고 회유하는 역할도 했다. 국신사라는 거창한 이름은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구순사(狗脣寺) 바뀌었고, 조선 말기인 1873년 고쳐 지으며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귀신사는 호남평야를 관장하던 대찰이었다. 지금은 옛 경내로 지방도로가 지나고, 법당 바로 옆에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어 한때 금산사를 말사로 삼을 정도였다는 옛 영화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가람의 모습도 계단으로 조성한 화엄 10찰답게 당당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 심포항에서 망둥이를 낚는 가족. 여자 아이도 손맛을 볼 수 있을 만큼 잘 걸려든다. - 많은 답사 마니아들은 이 절집을 특별히 사랑한다. 법당 지붕의 기와에 이끼 가득한 쇠락한 절집에서 누구는 옛 고향집을 보기도 했고, 누구는 금산사에서 느끼게 되는 거창함과는 정반대의 소박함을 즐겼다. 정말 미륵전의 백일홍이나 귀신사의 백일홍이 다 같이 붉은 빛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이곳 백일홍에 더 정감이 갔다. 그러나 이것도 지난 일. 지금의 모습은 예전에 마니아들이 사랑했던 그 절이 아니다. 편안하고 조용하던 절집이 보수와 확장공사로 산만하게 바뀐 것이다.
최근 새롭게 단장한 대적광전(보물 제826호)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계승한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귀신사는 임진왜란 때 금산사와 함께 호남 승병의 근거지였는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금산사와 더불어 이곳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 법당은 당시에 불탄 것을 전쟁이 끝난 후인 17세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법당 안에는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다. 법당의 규모에 비해 부처님이 지나치게 큰 까닭은 전쟁 이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현상이라 한다.
대적광전 뒤로 가면 나지막한 언덕이 나온다. 주변이 모두 한눈에 보이는 귀신사의 명당이다. 언덕 위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로는 3층석탑 하나가 서있다. 높이 4.5m로 적당한 크기의 이 석탑은 백제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그런데, 탑이 법당 앞이 아니라 가람 배치와는 연관이 없는 법당 뒤쪽 언덕 위에 세워진 까닭은 풍수상 기가 허한 곳을 비보하기 위해서다.
석탑 앞에 있는 돌짐승도 그런 이유로 조성된 것이다. 석탑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는 이 돌짐승은 갈기가 달린 사자다. 눈길을 끄는 것은 등 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돌기둥. 사람들은 이것을 남근석이라 부른다. 지엄한 화엄의 도량에 웬 남근석? 전문가들은 남근숭배사상이 불교사상과 어우러진 특이한 경우라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돌짐승을 개로 보기도 한다.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곧 개의 음부를 닮은 형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절터의 센 기를 제압하기 위해 이에 조응하는 개의 양물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한때 절 이름이 구순사(狗脣寺)였던 것도 이런 풍수적 해석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주지 스님이 절 이름을 창건 당시의 국신사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이유를 얼핏 알 것 같다.
이렇듯 모악산에서 금산사·귀신사를 보고 난 뒤 금평저수지 옆에서 증산법종교 교당과 강증산이 도를 펴던 구릿골 약방을 들른 다음, 1905년 세워진 금산교회를 둘러봤다면 김제 동부는 얼추 섭렵한 게 된다. 그렇다면 다음 여정은 볼 것 없이 벽골제(碧骨堤)다.
-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중앙 관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이 글에는 여러 함축적인 뜻이 들어있으나, 호남지방이 군량미의 보급 역할을 하는 조선의 곡창이란 점을 높이 산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리던 호남평야에서도 김제·만경의 들판, 즉 김만평야는 노른자 중의 노른자로 대접받았다. 주민들은 이 평야를 ‘징게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부른다. 김만평야의 너른 들을 일컫는 말이다. 거기에 벽골제가 다.
벽골제의 수원(水原)은 모악산 남쪽의 국사봉(541m)에서 발원한 원평천, 그리고 북쪽의 매봉산(250m) 기슭에서 발원한 두월천이다. 이렇듯 모악지맥 분수령에서 발원해 서해로 향하던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을 막아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두어 둔 것이다.
김만평야의 영역은 금남정맥의 운장산(1,126m) 남쪽에서 발원한 만경강, 그리고 호남정맥의 묵방산(538m)에서 발원해 서해로 흐르는 동진강이 이 벽골제를 중심에 두고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감싸고 있는 하류 지역의 평야지대다. 그러나 이렇듯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는 평야의 면적에 비해서 만경·동진강 두 하천은 규모가 작아서 김만평야 전 지역에 물을 공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게 벽골제다.
충북 제천의 의림제(義林堤), 경남 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의 3대 수리시설에 속하는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조된 최고(最古), 최대의 수리시설이기도 하다. 백제 비류왕 때인 330년에 만들어졌으니 1,700년이 훌쩍 넘었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때 중수했고 조선 태종 때 대대적인 보수를 했지만, 세종 때 심한 장마로 무너져 제방에 가둔 물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 벽골제의 수문은 원래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이렇게 5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2개로 잘려졌고, 수문도 3개가 사라져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만 남아있다. 돌기둥 너머는 벼가 익어 가는 지평선이다.
김제의 옛 이름인 마한의 ‘벽비리’, 백제의 ‘벽골’은 모두 ‘벼의 고을’이란 뜻. 농경문화의 요람이며 쌀의 본고장답게 김제의 민속과 문화 유적도 벼농사와 관련된 것이 많다. 벽골제에 전해오는 쌍룡놀이, 입석동 월촌 마을의 선돌, 장화동 후장 마을 고가에 있는 쌀뒤주 등이 그것이다. 또 둑을 쌓고 세를 거두면서 생기는 각종 폐단을 없애라는 숙종의 명령을 실행하는 과정을 적은 오정동의 전교비도 도작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다.
한편,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김만평야는 민초의 땀과 눈물이 촘촘히 배어 있는 땅이기도 하다. 저토록 넉넉한 2,000년 도작문화의 성지가 식민지의 수탈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3년부터 35년 간의 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전까지 이 평야에서 온갖 착취를 자행했다. 당시의 지평선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밥이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민초들의 목을 겨눴다. 일제의 폭압에 맞선 인물들이 군산항을 비롯해 만주, 블라디보스톡, 동경, 하와이 등지로 옮겨서 40여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바로 김제 너른 들녘이다.
바다 건너까지 펼쳐지는 대하소설 ‘아리랑’의 전 공간을 둘러보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 해도 벽골제 맞은편에 있는 아리랑 문학관을 빼놓으면 지평선의 겉만 본 게 된다. 김제 들판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는 역사에서 가장 먼저 수탈을 당하고 마지막까지 수탈을 당한 고을이다. 일제는 이곳의 들판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고, 러일전쟁 때 군량미로 쓰기도 했다.
일제의 착취는 갯벌을 메우는 간척으로도 이루어졌다. 조선인들은 썰물 때 등짐으로 돌을 나르며 힘든 노동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두서너 마지기에 이르는 농토를 불하받아 소작으로 부쳤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북 지역에는 모두 9개의 일인 농장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이곳 김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죽산면에 남아있는 하시모토농장 사무실은 도작문화의 슬픈 유적이 되는 셈이다.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을 보고 나서면 죽산을 거쳐 진봉반도로 이어진다. 반도를 한 바퀴 도는 702번 지방도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면 먼저 눈을 붙잡는 것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다. 이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거의 일직선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는 맛이 일품이다. 그렇게 한없이 달리다가 차를 세우고 논둑길을 걸으면 사람은 지평선의 한 점이 된다.
들녘 한복판에 있는 집은 너무 평화롭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는 여행객의 심사일 뿐이다. 광활면은 일제 강점기 때 동진강 하구에 방조제를 쌓고 경작지로 만든 수탈의 현장이었다. 들판에 자리한 집들은 모두 소작농의 마을이었고, 나지막한 언덕을 등지고 들판을 거느린 기와집은 전부 지주의 집이었다. 1970년대의 새마을사업으로 초가가 없어지면서 소작인과 지주의 집이 잘 구분되지 않지만 지금도 들판에 있는 집은 일제 때 소작인의 집터로 보면 된다고 한다.
갖은 상념으로 달려간 지평선 끄트머리. 바다로 이어지는 거기에 진봉산(72m)이 솟았고, 그 품안에 ‘바다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望海寺)가 있다. 망해사는 백제 때인 642년에 부설거사가 처음으로 머물렀다고 전하다. 그 뒤 당나라 승려 중도법사가 중창하였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기면서 잊힌 것을 조선시대인 1589년(선조 22)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세우고 수도하면서 비로소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1933년에 중수하고 1991년에 극락전을 중창했으나 사찰이라기보다는 암자에 가까운 소박한 절집이다. 그래서 거창한 규모나 유서 깊은 문화재를 염두에 둔 방문객이라면 첫 만남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해 지는 서쪽을 즐긴다’는 뜻의 낙서전(樂西殿)과 범종각 사이의 아름드리 팽나무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팽나무 아래의 평평한 돌에 앉으면 바람 불 때마다 종소리 울릴 듯한 범종 너머로 바다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썰물 때면 끝을 알 수 없는 갯벌이, 밀물 때면 깊이를 알지 못할 바다가.
- 불국사에서 출가한 부설거사는 지리산·천관산 등지서 수행하다가 문수도량으로 가기 위해 오대산으로 향했다. 가던 길에 거사는 김제에서 구무원이라는 사람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때 18살이 되도록 벙어리로 살던 구씨의 딸 묘화(妙花)가 거사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터졌다. 묘화는 거사와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거사는 거절했고, 묘화는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거사는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깨달음을 실천하기로 하고 그녀를 받아들였다.
부부는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으나 거사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가족 모두 수도에 전념했다. 거사 가족이 모두 성불한 도량은 변산의 월명암이다. 그 뒤 묘화부인은 장흥의 보림사를 창건했고, 아들 등운은 계룡산의 등운암을, 딸 월명은 변산의 월명암을, 그리고 거사는 망해사를 창건하고 나머지 생을 바다를 바라보며 보냈다.
팽나무 그늘서 바다를 감상하다 망해사를 빠져나와 ‘망해대’라 불리는 진봉산 전망대로 간다. 망해사에서 야트막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5분쯤 걸으면 3층짜리 콘크리트 전망대가 나타난다. 여기를 오르면 동쪽으로는 넉넉한 바다요, 서쪽으로는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지대인 김제만경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거닐던 평야지대를 독수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맛이 아주 색다르다.
망해사에서 1km만 더 가면 갯벌과 노을이 아름다운 작은 포구인 심포항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김제 여정의 마무리는 항상 이곳으로 삼는다. 한때 심포항은 ‘황금포구’로 불렸다. 부안 계화도와 함께 질 좋은 백합조개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고,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면서 바닷물이 얕아 물고기 산란장소였기 때문에 각종 물고기들이 넉넉하게 잡혔다. 또 바다 밖 석산에서는 돌을 캐다 팔아 돈을 벌 수 있어 부자가 유달리 많았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돈머리’로도 불린다.
방파제를 따라 들어선 횟집촌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각종 조개류를 파는 가게가 두엇 자리하고 있어 어시장이라 부르기는 뭣하지만, 어쨌든 주민들이 생합이라 부르는 백합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한쪽엔 백합 구이를 맛 볼 수 있는 식당들도 있다. 여기서는 밀물 때면 파돗소리를 들으며, 썰물 때면 갯벌을 바라보며 백합을 구워먹는 맛이 제법이다.
지금 여기서 망해사 범종 소리가 더욱 듣고 싶은 까닭은 이 앞 바다가 곧 메워지기 때문이다. 새만금 방조제공사가 끝나면 태어난 이래 한순간도 들고나는 일을 멈춘 적 없는 바다가 사라지게 된다. 주민들은 그나마 물을 완전히 가두는 게 아니라 통하게 한다는 데 작은 위안을 삼고 있지만 어찌 이를 바다라 할 수 있겠는가.
방조제 길이가 세계 최대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은 지형도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들의 삶의 형태도 바꿀 것이다. 실제로 동진강과 만경강에서 떠내려온 퇴적층이 8,000년 동안 쌓여 이루어진 심포항 갯벌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주민들은 새만금사업 전만 해도 이 갯벌에는 멀리 나가지 않아도 백합이 지천이었다고 말한다. 이들이 뻘땅이라고 부르는 갯벌에는 백합 잡는 사람들로 언제나 꽉 찼다. 대여섯 마리에 1kg이 될 만큼 큼직한 녀석들도 많았다. 그레(조개를 잡는 도구)를 끌면 그물망은 이내 가득 찼다. 그레질에 들려오는 “딸깍” 하는 소리는 어민들의 희망가였다.
그러나 새만금방조제가 바다를 가로막은 뒤에는 백합의 씨알도 서서히 작아졌고, 갯벌에는 죽어나가는 백합이 점점 늘어났다. 요즘 갯벌에서 백합을 잡는 어민들은 희망가 대신에 한숨만 내쉰다. 새만금사업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이 간절하다. 아니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 바다에 무심한 저녁노을이 드리워지고 있다. 다니다 보면 바다만큼 청승 떨기 좋은 곳도 없다. 절망 대신 희망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대합을 구입해 부둣가 한쪽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버너를 켰다. 졸깃졸깃하고 고소한 조갯살 하나에 소주 한 잔. 몇 번을 반복했을까. 발치까지 들어와 귀를 간질이던 파도가 어느새 저만치 물러났고, 붉은 잔영 사라진 바다는 곧 어두워졌다. 그사이 떠오른 달은 갯벌에 금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만평야에 못지않게 풍요로웠던 저 갯벌이 어찌된 일인지 오늘따라 야윈 모습으로 다가왔다. 취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출처> 월간산 4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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