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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退溪李滉) 학문의 산실

by 혜강(惠江) 2007. 9. 18.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退溪李滉) 학문의 산실

 

·사진  남상학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은 조선 유학의 대표적 성현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574년에 세워진 서원이다. 영남 유림의 중심지이자 한국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명소 중의 하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된 몇 안 되는 서원 중 하나로도 이름이 높다.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에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주요저서로는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활인심방,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이황은 율곡 이이(栗谷李珥)와 함께 조선조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학자였다.  퇴계 선생의 철학 사상은 이기이원론적 주리론(理氣二元論的 主理論)이다. 이는 '이(理:四端)'로서 '기(氣:七情)'를 다스려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며, 칠정(七情)이란 희(喜), 로(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이른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대제학에서 물러난 1557년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1561년(명16년)에 세웠던 작은 규모의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서생들의 기숙사였던 농운정사(隴雲精舍)에서 비롯된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4년 후인 1574년 7월 제자와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숭모하고 영남학파의 위세를 키우기 위해 본래 있던 도산서당 뒤편에 창건되어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에 서원 건물이 낙성됨과 함께 선조가 '도산'이라는 현판을 내려줌으로써 왕실과 유림의 존중을 받는 곳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학자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선양하고자 1970년 정부에서는 서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성역화하였다. 

 

 

* 도산별과를 치렀던 시시단 *

 

   도산서원을 찾으면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서원 앞의 운영대와 바로 앞의 안동댐 안에 동그랗게 떠 있는 인공 섬. 그곳은 정조가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렀던 시사단(試士壇)이다. 본래의 터가 안동 댐에 수몰되어 지금처럼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물이 많을 때에는 서원 앞에서 나룻배가 건너다닌다. 

 

  서원 앞의 큰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면 도산서원이다. 서원은 영지산을 조산으로 하고 도산을 주산으로 하여, 왼쪽은 청량산에서 흘러나온 동취병(東翠屛)이, 오른쪽에는 영지산에서 흘러나온 서취병이 감싸고, 남으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마한 골에 자리를 잡았다.

 

  '도산'이란 지명 유래는 옛날에 도산서원이 있는 이 산속에서 옹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옹기 굽는 산'이라 해서 '질그릇 도(陶)'자, '뫼 산(山)자'를 함하여 '도산'이라 불렀다. 서원 주위는 그리 높거나 크지도 않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산수의 맑고 아름다움을 보아 학문을 닦기에는 아주 적당한 장소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 도산서원의 근간이 되는 도산서원(상)과 농운정사(하) *

 

   서원은 크게 12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서생들의 기숙사였던 농운정사가 工자 모양으로 서 있고, 오른쪽으로 낮은 대 위에 도산서당이 앉아 있다. 서당은 세 칸인데, 서쪽 한 칸은  부엌이 딸린 골방이고, 학생들을 대면하여 학문을 지도하던 서당의 단칸방(중앙)에는 완락재(玩樂齋), 휴식을 취하던 마루(동쪽)는 암서헌(巖棲軒)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이처럼 도산서당에는 각각의 마루와 방 한 칸 마다에도 저마다 뜻을 담은 이름이 있다. 

 

 서당의 향을 정남으로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다. 또 서당 앞 마당에 연못 정우당(淨友塘)을 만들어 이곳에 연(蓮)을 심어 더러운 흙과 물속에 자라면서도 때묻지 않는 연을 하나의 벗으로 생각하였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뒤로 보이는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광명실.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여러 임금이 내려준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서고(書庫)다. 동서 광명실 사이로 나 있는 문이 진도문(眞道門), 도를 찾아 나아간다는 뜻을 가진 문이다.  

 

 

 * 광명당과 전교당 *

 

 

   진도문을 지나야 서원의 중심이 되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 앞에 서게 된다.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던 집회장소다. 이곳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조선조 최고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이 어전에서 쓴 친필 글씨다. 

 

   전교당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서쪽으로만 한존재라 불리는 한 칸의 온돌방이 있다. 강당 대청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전면 뜰아래에는 정교대가 설치되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유생이 묵었던 동재의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가 마주보고 서 있다. 강학공간을 형성하는 이 일곽은 엄격한 좌우대칭을 한 배치를 하여 강학공간으로서의 규범을 보이고 있다.이들은 각각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교당 동쪽에는 퇴계문집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였던 장판각(藏板刻)이 있는데, 이 장판각에는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선조 어필, 퇴계선생 문집, 유묵(遺墨), 언행록(言行錄),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었다가 2003년 5월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 장판각 *

 

 

  그리고 전교당 뒤 동족으로 서원의 제향공간인 상덕사(尙德祠)가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이곳에는 퇴계선생의 위패와 월천 조목(月川趙穆)의 위패가 함께 모져 있다. 상덕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사당 서남쪽아래에는 향례를 보조하며 제수를 마련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상)와 전사청 *

 

  전사청을 지나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 쪽으로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들의 살림집인 상․하고직사(上下庫直舍)가 있고, 서원과는 동떨어진 듯이 농운정사 뒤쪽에 서있는 옥진각은 이황 선생의 유물관이다. 이곳에는 선생의 행적과 지팡이, 매화연,(梅花硯), 투호(投壺), 혼천의(渾天儀), 언행록, 자성록, 도산십이곡의 책자 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유물전시관인 옥진각 *

 

 

* 옥진각에 진열된 각종 유물 *

 

 

   유물전시관에서 내려오면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다.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鄭士誠)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건물이다.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품격과 위학자세(僞學姿勢)를 잘 반영한 듯, 전체적으로 성리학적인 당당함과 맑음을 건축으로 승화시킨 배치와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 연락서재 *

 

   따라서 도산서원은 지금도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의 문화 활동과 교육의 중심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옛 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매해 전교당 마당에서 도산별시(陶山別試)를 열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글 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 먹을거리 - 헛제사밥과 간고등어

 

 

  안동의 전통음식을 들라면 헛제삿밥이나 간고등어를 들 수 있다.   헛제삿밥은 말 그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먹는 밥이다. 원래 안동 양반들이 밤참으로 먹던 음식이었는데  21년 전 월영교 앞에 ‘까치구멍집’(까치구멍이 있는 초가집을 가리키는 말) 손차행(86) 할머니가 손님용 상차림으로 내놓아 큰 인기를 끌면서 안동 명물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며느리 서영애(51)씨가 까치구멍집(054-821-1056)의 대를 잇고 있다. 

   또 몇 년 전부터 간고등어가 새롭게 안동명물로 떠올랐다.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구워먹고 쪄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하랴 싶지만 잘 구운 고등어 한 마리와 고추장으로 묻힌 장떡, 날배추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밀가루를 묻히고 살짝 기름을 둘러 부친 김치전을 곁들이면 어느새 수몰된 고향집 생각에 울적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안동간고등어는 안동댐 월영교 부근에 있는 양반밥상(054-855-9900-5)이 유명하다.


* 교통편 : 서울출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라-만종IC-중앙고속도로-서안동 IC로 나와 안동 시내-35번국도-와룡-도산서부검문소를 거쳐 도산서원에 이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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