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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스크랩] 2007신춘문예 당선작

by 혜강(惠江) 2007. 1. 21.

2007신춘문예 당선시들



ㅇ 전북일보 / 늙어가는 판화 / 이현수
ㅇ 조선일보 /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ㅇ 경향신문 / 부레옥잠 /신미나
ㅇ 문화일보 /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ㅇ 서울신문 /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이산)
ㅇ 매일신문 / 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ㅇ 동아일보 / 당선작 없는 시 심사평

ㅇ 동아일보 / (시조)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 이민아
ㅇ 세계일보 / 근엄한 모자 / 이기홍
ㅇ 한국일보 / 엘리펀트맨 / 이용임
ㅇ 광주일보 / 몸의 저울눈 / 정재영
ㅇ 부산일보 / 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ㅇ 영남일보 / 떡갈나무 약국 / 임수련(임외자)
ㅇ 국제신문 / 타임켑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ㅇ 무등일보 / 팥죽을 끓이며 / 임혜주
ㅇ 경인일보 / 소금쟁이를 맛보다 / 한창석
ㅇ 동양일보 / 오월 / 김영식

ㅇ 한라일보 / 구포역 / 김재근
ㅇ 전남일보 / 냉장고, 요금실을 앓다 / 안오일
ㅇ 강원일보 / 소라여인숙 / 김영식
ㅇ 불교신문 / 겨울 내소사 / 김문주
ㅇ 전북도민일보 / 기다림은 우주입니다 / 김창래
ㅇ 대전일보 / 골목길 /최재영
ㅇ 경남신문 / 문 밖에는 봄 / 유행두
ㅇ 농민신문 / 호두, 그 기억의 방 / 최옥향
ㅇ 농민신문 / (시조) 구석집 / 김사계






[전북일보] “늙어 가는 판화”/ 이현수

조각도 앞에 손을 둔다
순간, 조각도가 날렵하게 손에 스쳤다
아직도 내 손에 깎아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어머니 얼굴은 남겨 둬야할 곳보다
파내야 할 곳이 더 많았다
얼굴 윤곽보다 뚜렷한 곡선을 여러 번 파내다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얼굴
그래서 더 어머니로 보였던 얼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조각도를 따라 비워지는 굴곡
그 허공에도 몇 겹의 층이 있어
잉크로 찍어내면 더욱 환해졌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주름의 공허

몇 번씩 그 결을 만지며
여백을 남기는 어머니
완성된 얼굴 판화가 내 어머니이기만 할까
하나면 충분할 것을 여러 장 찍어내며
확인하는 것이다

[심사평] 안도현, 이희중

 시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즐거움이다. 소통의 그물, 이른바 네트워크에 속한 기쁨은 이에 연루된 사람의 수가 적다고 작아지지 않는다.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두루 엮인 그물을 긴장하게 하는 높은 안테나는 세속과 타협 않는 비판정신 또는 일종의 반골정신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이 도저하게 올곧은 사람됨의 바탕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여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 학교를 졸업한 후 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은 차마 무서워서 다시 시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심사를 맡은 우리는, 심사를 통해 새로운 소통을 체험하게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고백한다. 이 소통이 더러 잔치의 성격을 띠기도 함을 우리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20여 예비시인이 쓴 70여 편의 시를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정재영, 문정희, 임상훈, 김정경, 최민영, 신은영, 이현수의 작품들을 남겨 거듭 읽어보았다. 정재영의 ‘손이 쥔 손’, 문정희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 임상훈의 ‘덕지덕지’ 등은 당선작으로 올려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는 데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신춘문예답다’고 말할 유형적 한계를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의구심을 다 지워 주지 못했다. 김정경의 ‘몸의 곶간’, 최민영의 ‘애벌레의 꿈’, 신은영의 ‘춤추는 애벌레’, 이현수의 ‘늙어 가는 판화’ 등은, 시의 전통적 미덕이 젊은 상상력으로 되살아나는 진경(珍景)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사람이 아니라 작품에 주는 격려라는 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편치 않았다.
 신은영과 이현수의 작품을 두고 고심하던 우리는 후자를 남기기로 결정했다. 신은영은 보낸 작품들의 전반적 수준에서는 더 나았으나, 집중된 한 편을 보여주는 데는 이현수에게 뒤졌다. 당선작은 상황의 개연성은 약했으나, 육친의 정으로 밥을 지어 세월과 삶의 양념으로 비벼낸 간단치 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한다. 또 낙선자들에게도 격려의 갈채를 보낸다. 낙선이야말로 뜻 있는 글꾼에게는 한때의 양식이 아니었던가. 시적 소통을 놓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시적 축복이 폭설처럼 내리기를!

[조선일보]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tracing paper 투사지, 透寫紙)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 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심사평] “사근사근 풀어내는 언어감각 돋보여” 문정희, 황지우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언어와 리듬이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 광활한 시대에 개성적이면서도 깊은 시 정신을 내포한 시인을 찾는 작업이 지난함을 느꼈다. 대체로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삶의 삼투압이 시 속에 스며들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는 곧 언어의 낭비로 이어졌다.
이주연의 ‘21세기, 실낙원’은 검은 비닐 속에 자라는 생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불임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마무리가 허전하여 읽는 이를 깊은 감동으로 이끌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박여주의 ‘신호대기’는 자연스러운 솜씨로써 삶을 투시하는 힘이 느껴졌지만, 관념어의 돌출과 몇 군데 표현이 클리쉐(cliche-판에 박은 문구, 진부한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선작 김윤이의 ‘트레이싱 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이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부레옥잠” /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공방(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 물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 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 낯을 보겠네.

[심사평] 김종해, 문정희

한 편의 시의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만큼 눈부신 일이다. 수많은 독자의 기대를 받으며 신춘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시는 분명 축복받은 시임에 틀림없다. 금년도에도 그런 시가 태어났다.
당선작으로 뽑힌 신미나의 ‘부레옥잠’은 부유성 수초인 ‘부레옥잠’이라는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서정성의 깊은 완성을 획득한 시이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시대와 삶을 투시하는 사상성이나 새로운 언어의 탐색은 없다 하더라도 사물에 대한 정감과 생명에 대한 여성적 상상력으로 넘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볼링장의 레인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절묘한 비유로 풀어낸 ‘흰 와이셔츠오리 떼’, 엎드린 당신의 발을 끈질기게 물고 있는 삶의 늪을 묘사한 ‘젖은 구두’, 작은 생명에 대한 놀라운 순간을 환희로 포착해낸 ‘자벌레’ 등은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는 가편이었다.
시는 언어 예술의 정점이다. 필연성 없는 산문성의 경향, 언어의 무절제한 낭비, 소통 불가의 시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치열한 시정신과 절제된 언어로서 서정시 본래의 감동을
획득하는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문화일보]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심사평] 천양희, 정호승

 김륭의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시적 발상과 그 상상력이 뛰어나다. 그의 상상력은 기발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현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될 정도로 마취 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에서 오는 이 위안의 마취력은 실은 현실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는 화자의 능청스러운 독백이 시종일관 시 전체를 끌고 가는데, 그 화자는 실은 대응력이 결핍된 실직자다. 실직 당한 이의 고통스러운 현실적 상상력이 이러한 역설적 상상력의 시를 낳은 것이다. 선자들은 그의 상상력의 뿌리가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스러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크게 신뢰가 갔다. 엄숙함과 진지함에서 벗어나 이토록 경쾌하게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주는 시도 드물다.

 

 

“詩는 지독한 슬픔의 일종,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해”
시 당선 소감-김륭

당신, 이젠 절망할 일만 남았군.”

마산 우무석 시인이 내게 한 첫마디다. 도대체 이건 또 뭔가? 역시 나보다 수가 높군. 빙그레 웃는 데는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당선소식을 푸드덕, 한 마리 새처럼 날려보냈더니 번쩍, 한 마리 물고기로 토막쳐 되돌려주는 솜씨란. 좀더 깊고 아프게 울어야겠다는 내 가슴을 뒤집어 절망이란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만들어주는 시인이 곁에 있다는 건 행복인가, 불행인가?

그러니까 최근 내가 알게 된 몇 가지를 말하자면 이렇다. 구름이 택시보다 빠르다는 것, 허공도 축구공 같은 공이어서 요리조리 잘 몰고 다녀야 한다는 것, 가끔씩은 발을 헛디뎌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나를 좀더 두들겨 패고 비워낼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 왔다. 얼마나 편한 일인가. 좀 상투적으로 말하자?죽음이 삶을 살살 달래가며 데리고 산다는 느낌이 당선통보와 함께 뒤통수를 쳤다. 고백건대 나는 아직도 시(詩)를 잘 모른다. 다만 삶도 죽음도 간섭할 수 없는 아주 지독한 슬픔의 일종이어서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한참을 울었다. 외롭다는 말이 뿔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웃었다. 겨울 하늘보다 꽁꽁 얼어붙은 가슴으로 웃는 일이란,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온몸에 돋아난 뿔부터 삭여야 했다.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들이 너무 많아 가뜩이나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복잡하다.

동국대 김선학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마산대 이성모 교수님, 시사랑경남지회 회원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한 내게 지리산의 힘을 안겨주신 지리산 시인들의 큰형님인 선덕형과 병우형께, 나의 보물 권갑점, 정경화 시인을 비롯한 함양문협 회원들과 지리산문학회 회원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단미, 문화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큰절 올리며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고 살 것을 약속드린다.

▲본명 김영건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
▲1989년 조선대 중국어과 졸업
▲2005년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


[서울신문]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이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 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 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심사평] “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신경림, 최동호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매일신문] “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strand : 좌초하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다, 사람을 무일푼이 되게 하다)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 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 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심사평] 권기호, 정호승

예심을 거쳐 올라온 40여 편의 작품을 검토한 결과 '스트랜딩 증후군' '에어워시' '비온 뒤' '타워버그' '길' '오래된 가족' '2007 봄, 누드 찍는 남자' '셋방' '젤리 시계를 차고 있는 소설가 P씨!' '장독대를 생각하며' '우물이 땀을 흘리네' '원진다방' '겨울 나방들의 초상'이다.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 구민숙의 '비온 뒤', 김미숙의 '타워버그'다. 신춘문예 특성상 참신성에 몰두한 나머지 제목부터 특이한 것을 들고 나온 것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시의 구조와는 겉도는 것들이어서 아쉬웠다. 현대적 의미의 묘사 능력은 돋보였으나 깊은 시적 비전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미숙의 '타워버그'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물을 그려내는 입심이 남다른 데가 있었으나 묘사 그것에 그쳐 시적 무게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다. 구미숙의 '비온 뒤'는 차분하게 처리하는 서정적 진행이 위트와 더불어 어떤 울림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참신성이 다른 작품에 비해 덜하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는 둘 다 당선권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한의준의 또 다른 작품 '보일 듯이 보일 듯이'도 '에어워시'와 더불어 충분히 매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래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무리 없이 연결시켜 나가는 '스트랜딩 증후군'이 상상력의 폭이 크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2007 동아일보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당선자 없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시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하필이면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 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릇 한 사람이 문학 작품, 그중에서도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 고뇌 속에서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자신만의 문장, 어법, 이미지를 발견하고 발명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임의 ‘해바라기 모텔’등은 시의 대상이 된 부조리한 상황을 능청스럽게 제시하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시에 나타난 국면들엔 구체성이 부족했다. 박혜정의 ‘흑백의 목련나무’등은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과 청각적 이미지가 눈에 띄었으나 인생에 대한 해석이 헤프거나 상투적 상상력의 전개가 있었다. 문정인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등은 외국인 노동자의 비감을 경쾌하게 다룬 부분이 눈에 띠었으나 상투적 비유들, 묘사를 위한 묘사 문장들이 시의 신선함을 가라앉혀 버렸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단 한 편의 완성도가 있는 작품,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작품, 가능성을 배태한 한 시인을 찾지 못했다. / 김명인 시인·고려대 교수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교수 (예심 최영미 장석남)

 

[동아일보] 시 당선작 없는 [심사평] 김명인, 김혜순

본심의 시들은 비슷했다.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하필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 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릇 한 사람이 문학 작품, 그 중에서도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 고뇌 속에서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자신만의 문장, 어법, 이미지를 발견, 발명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용임의 ‘해바라기 모텔’은 시의 대상이 된 부조리한 상황을 능청스럽게 제시하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시에 나타난 국면들엔 구체성이 부족했다. 박혜정의 ‘흑백의 목련나무’는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과 청각적 이미지가 눈에 띄었으나 인생에 대한 해석이 헤프거나 상투적 상상력의 전개가 있었다. 문정인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비감을 경쾌하게 다루었으나 상투적 비유들, 묘사를 위한 묘사 문장들이 시의 신선함을 가라앉혀 버렸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단 한 편의 완성도가 있는 작품,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작품, 가능성을 배태한 한 시인을 찾지 못했다.

[동아일보] (시조)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 이민아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 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 삽 한 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 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 땀 한 땀 기워낸다
.................................................................
*무제치늪 : 울산 울주군 삼동면 정족산(鼎足山)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습원(高層濕原). 6000여 년 전 생성됐으며, 지금도 수많은 습지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심사평] 이근배

땅속 깊이 뿌리박은 나무가 봄을 만나 꽃을 피우듯이 시조는 신춘문예를 만나 새 잎을 틔운다. 시조가 현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지 100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모국어의 가락이 크게 소용돌이쳤다. 그런 까닭일까, 응모작들이 예년에 비해 형식과 내용의 각도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소재와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며 앞서 달려오고 있었으나 의욕과 실험정신을 완성도 높게 채우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또한 시조는 시각적 형식미에서 자유시와 식별시켜야 함에도 의도적으로 구와 장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표기법을 쓰는 유형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가 자유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내재적 의미의 농축에 힘써야 하고, 글감잡기에서 형상화까지 치밀하게 결구(結構)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이민아)는 순수한 원형을 지닌 눈이라는 대상에서 상처를 만들고 그것을 도려내는 메스를 잡는 손이 능숙하다. 계절성을 띤 소재이면서 일상에서 끄집어내기 어려운 시의 줄기를 찾아가는 생각이 살아 있다. 명사 ‘삽’을 거듭 쓰는 것과 새 맛내기가 덜한 점이 있으나 발상의 깊이가 있고 감성의 칼끝에 날이 서 있어 시조에 한몫 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세계일보] “근엄한 모자” /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 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재 대한설비건설협회 근무

 


[심사평] 유종호, 신경림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하게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거나, 억지로 만든 흔적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적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대상을 주의 깊게 보려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널리 유행하는 시 창작 강좌 등의 부정적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시를 보는 눈이 바뀌어도 지극히 개성적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시각을 가졌을 때 좋은 시가 된다는 점만은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구민숙의 시들은 시의 전개도 날렵하고 말의 구사도 자못 신선하다. 특히 ‘자꾸 헛것처럼’ 같은 시는 흠잡을 데 없이 꽉 짜인 시로 읽히며, ‘귀가’ 같은 시도 기성 시인의 것이라면 충분히 우수한 시로 거론될 법하다. 하지만 투고돼온 다른 사람들의 시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가 않다. 문정인의 시 가운데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오카리나 부는 오빠’가 속도감도 있고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옥탑방 여자’도 밝고 환하면서 서글픈 분위기를 조성, 작자의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많이 들은 것 같은 이미지요 정서인 것이 흠이다. 이들 둘에 비해 최찬상의 시들은 덜 다듬어진 듯 하면서도 개성적이다. 그러나 ‘쿵’이 발상이나 시법에 있어 아주 새로운 데 반하여, ‘자전거’나 ‘희망의 길’ 같은 시는 아직 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기홍의 시도 개성적이라는 점이 먼저 호감을 갖게 한다. 특히 ‘근엄한 모자’는 속물화돼 가고 있는 주변에 대한 야유이면서 동시에 똑같이 속물화돼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야유이기도 함으로써 감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색과 고뇌의 궤적도 엿보일 뿐더러 문명비평적인 시각까지 담보하고 있는 수작이다. 이에 비해서 ‘푸른 바람의 집’이나 ‘내 몸속을 구르는 돌’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미흡하다.
이상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끝에, 작품의 편차가 좀 불안하기는 했으나, 드물게 개성적이라는 점, 동세대 시인에게 결여돼 있는 사색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서, 어쩌면 모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사자들은 이기홍의 ‘근엄한 모자’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한국일보] “엘리펀트맨” / 이용임 (elephant man 코끼리 인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 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 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 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 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 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 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이용임(李庸任)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 ㈜핸디소프트 선임연구위원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 김승희, 김사인, 남진우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 떼> 외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 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 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 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광주일보] “몸의 저울눈” / 정재영

푸줏간 주인이 고기 한 칼 썩썩 썰어
척, 저울에 올리자 바늘이 바르르 떤다
그의 손대중이 저울눈 하나를 겨냥해
잠시 그 경계를 넘나들다가 딱 그 눈금에서 멎는다
얼마나 칼질을 해댔으면……
칼 쥔 손에 저울눈 하나가 직감처럼 꽂힐 때까지
마음의 저울추가 수도 없이 진자운동을 거듭했으리라
모자라서 보태고, 넘쳐서 덜어내는
모자람과 넘침이 오락가락 셀 수도 없었으리라
내 몸에 던져지는 생의 부하를 짚어내면서
내 안에서도 저 저울처럼 바늘 하나가 수도 없이 흔들렸다
모자람과 넘침 사이에서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다
살코기 한 덩이에 요동치는 저울처럼 내 몸도
등짐이라도 끙, 지고 일어설 때면 바르르 떨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저 푸줏간의 저울처럼 참 많이도 흔들리며 살아온다
저울은 이제 평정을 되찾았다
생의 무게를 내려놓고서야
꺾인 허리 반듯이 펴지던 어머니처럼.

[심사평] “일상에 독특한 시선 탄탄한 구성력 돋보여” / 심사위원

정재영(‘몸의 저울눈’ 외), 이병철(‘수평선’ 외), 변호이(‘길’ 외) 세 명을 최종심에 올리는 데는 어렵지 않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도 본심에 올랐던 만큼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소양도 충분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은 단점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무엇을 써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쓸거리가 보이지 않는 시, 즉 왜 썼는지를 모르는 시) 둘째, 위와는 반대로 소재나 주제는 괜찮은데 시적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기성시인의 작품이라면 문예지 등에 발표해도 무난하겠지만, 신예의 등단 작품으로는 아쉽다. (패기나 참신함이 없다. 혹은 밋밋한 소품이다.)
변호이의 시 ‘길’은 여러 미덕을 갖췄다. 독창적이고 내성적이고 시를 밀고 나가는 사고의 힘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덴마크 장기(臟器) 어디쯤/숨어 계셨습니다 감쪽같이/스물 세 해를 속았습니다” 같은 구절이 보풀처럼 걸렸다.
정재영과 이병철을 놓고 으뜸과 버금을 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제가끔 탄탄한 세계를 보여줬다. 이병철의 ‘수평선’은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는 섬세하고 깔끔한 시다. 요즘 우리 시단에 이런 시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데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작품을 떨구는 데는 적잖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근간 다른 매체를 통해서라도 그의 시들을 만나게 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정재영의 당선작 ‘몸의 저울눈’은 작은 일상적 사건에서 삶의 무게와 균형과 흔들림을 짚어내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응모한 시 전부 힘 있는 게 아주 긍정적이다.


[부산일보] “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드*의 탄환들 (*dark red, 검붉은?)
그 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 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따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꼭 잡는다.

[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 김종해, 안도현

장시간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해도, 상당수의 투고작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 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었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서정적 진정성, 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 씨의 투고작은 참신한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그런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 씨는 사물과 일체 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 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이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 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 마디로 역동적인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를 수 없는, 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 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당선소감 / 정재영
"치열한 삶 속 시 '담금질'은 계속돼"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내게 온 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내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메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1952년 전남 승주 출생.
광주대,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세청 행정사무관, 현재 국세청 전산정보관리관실 근무.

 



[영남일보] “떡갈나무 약국” / 임수련, 본명 임외자)

밤새 앓고 난 후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죠
솜털 가운을 걸친 새들
자잘한 열매 알약들과 이슬 드링크 들고
분주하고요 떡갈잎 의자에 앉아 깔깔대는 노란 햇살들
눈곱 씻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파
꼬마전구 도토리 알 켜져 있는 조제실 구석에선
약봉지 바스락대는 사슴벌레랑
무당벌레의 그루잠도 훔쳐볼 수 있어요
당신도 어디 아프신가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거리며 향과 색과 소리들이 화답하는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 보시죠
어린 살결처럼 싱싱한
푸른 그늘 대기실에 앉아 깨알같이 씌어진
마음의 처방전 읽고 있으면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한다는 까만 눈 속에 당신을 태운 다람쥐 한 마리
지구보다 더 너른 나무의 세계로 안내해 드리고요

떡갈나무약국의 주인장 오색딱따구리와
구름트럭 끌고 약 배달 온 빗방울의 경쾌한 대화도 들을 수 있죠
가끔 늦은 시간에 찾아가면 밤의 이마에 새겨진
따갑고 노란 눈동자들 등을 파고들고
약국 처마의 기둥들이 굵어지는 걸 볼 수도 있는 곳
참 그곳엔 그 기둥들도 혼신으로 즙을 짜낸다는군요
마음이 푸석하게 부어올 땐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 봐요.


[심사평] “이야기시, 노래시 조화 돋보여” / 이기철, 최동호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고 불필요한 요설의 노출이 거슬리는 점이었다. 이는 아마도 신인들의 의욕 과잉이나 신춘문예의 흐름을 그릇 인식하고 있음에서 온 현상이 아닌가.
실험시, 현실 고발시, 민중시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내면 의식과 삶에의 통찰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시의 풍토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로 읽어도 될 듯하다. 그런 가운데서 숙고하게 한 작품은 '칸나가 피는 가계부' '떡갈나무 약국' '먼지의 안쪽' '유방암을 앓는 여자' '치자나무의 마음' 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두고 마침내 '떡갈나무 약국'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 합의했다.
'칸나가 피는 가계부'는 언어구사가 탐스럽고 현란하나 가끔은 우발적인 시행이 불필요하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당선권으로 밀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먼지의 안쪽'은 생각의 깊이와 휴머니티라고 할 인간미를 지니고 있으나 관념시로 흐를 가능성이 결함으로 지적되었고 '유방암을 앓는 여자'는 요즘 유행하는 '몸 담론'을 체현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으나 소품(小品)이고 결말 처리에 모호함이 있었다.
'치자나무의 마음'은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일종의 물활론적 사유가 담겨 있으나 지나치게 소박하고 평이함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인 '떡갈나무 약국'은 시어의 경쾌한 흐름과 발랄한 상상력이 시를 읽는 마음을 견인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시와 노래시의 양면을 함께 지니며 비약적인 어휘와 상상의 모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가볍지 않은 감각적 훈련을 쌓은 듯하다.


[국제신문]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
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
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 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 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 낼 때쯤이면 명命 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심사평] /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씨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 등 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씨를…'과 '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 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와 '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 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 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시 당선소감] "바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 있냐고…"
-정태화

지나가는 바람이 어린아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하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니. 여기 이곳에 민들레가 보여서요. 호기심 많은 바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 동무와 지금 소꿉놀이 재미있니. 글쎄요? 그런데요 동무의 몸이 너무 가벼워 둥둥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리고 있는데, 제 겨드랑이에 솜털이 막 솟아 올라오는지 자꾸 瑁値?熾? 이제는 지금 이 자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들, 그들이 뿌리내려 걸어간, 걸어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은밀히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희열이다. 알고 보면 사람도, 사람의 마음 그 열정도 한 알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갈밭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내려 마침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때문에 나는 많이 눈물겹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이 기쁘기도 하다.

국제신문 신춘문예의 자리에 어느날 문득 날려와 뿌리내린 민들레 마음 하나의 꿈이 오랜 시간 참은 뒤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마음껏 날아올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홀씨의 이름,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음이 정확한 말을 걸어 갈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당선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울먹였던 아내와 지금 막 옹알이를 시작한 딸에게 지금 한없이 행복한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헌납하시고도 눈물이셨던 어머니 그리고 내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형과 동생, 나 때문에 영혼이 아팠던 수많은 그 분들에게 지금 가리늦게 '많이 죄송스러웠다'는 말 전하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약력〉▲본명 정경화 ▲1958년 경남 함양 출생 ▲지리산문학회 회원 ▲주간 함양신문 편집부 근무



[무등일보] “팥죽을 끓이며” / 임혜주

그새 또 잊었다
오랫동안 또글또글해졌을 팥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옹골지게 굳은 팥에게도 껴안았던
햇빛 다 풀어놓을 시간이 필요한 법
한 시간에 해치울 욕심 놓아두고
약한 불로 되돌린다 그제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는 선
믹서에 마저 갈아 체에 거른다
헤쳐진 살 고루고루 퍼지게
잘 저어야 하는데 반죽 다듬는 사이
파르르 넘친다 아, 이 불같은 성질
저어주지 않으면 밑이 타고
위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야 마는
천천히 저어야만
지 성질 온전히 풀어지는
압축된 열
그래서 팥죽은 붉다.

[심사평] "기본적인 시적 역량, 독창성 돋보여" 허형만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몽유도원도' 외 4편, '젊은 도서관' 외 3편, '팥죽을 끓이며' 외 2편, '불이 짓는 집' 외 3편, '아우슈비츠' 외 3편, '썩는다는 것에 대하여' 외 3편 등이었다.
'신춘문예'의 성격상 한결같이 신인의 시는 참신해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하며 튼튼한 시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새로운 상상력과 언어 사용, 시적인 표현과 리듬은 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아울러 시적인 기량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그리고 기성 작품과는 다른 자기만의 체험을 통한 독창적인 내용과 시 형식의 새로움이 요구된다.
소재와 표현기법이 표절을 의심할 정도로 기성 작품의 냄새가 짙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일단 발표되었다고 판단된 작품은 제외시켰다. 또 최종 확인 과정에서 기성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응모자의 작품도 제외시켰다.
장시와 산문화, 기존 신춘문예 당선작의 아류는 물론 언어의 밀도가 떨어지거나 추상성으로 인해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특히 진부한 소재와 개인별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적된 문제점을 극복하고 있는 '아우슈비츠'와 '팥죽을 끓이며'를 다시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응모작의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이 단단하고 화자의 의식이 과도하게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능력과 신선함이 인정된 '팥죽을 끓이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한편 기성 작품의 흉내나 냄새의 혐의가 전혀 없는 신선한 이미지로 조류독감에 의해 도살처분 돼야 하는 닭의 현실을 아우슈비츠로 상징화한 작품 '아우슈비츠'에 대하여도 장시간 논의가 있었음을 밝혀둔다.


[경인일보] “소금쟁이를 맛보다” / 한창석

하늘과 수면 사이
왈츠처럼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사내는
愁心이 깊어 차라리 소금이 되면
감옥의 水深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마음을 절였다
蓮塘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고 싶지만
후들거리던 다리 그 어디에
그처럼 완강한 삶의 근육이 붙어 있었는지
그래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도무지 가라앉을 수가 없다
차라리 발을 굴러 하늘로 날아오르려 해도
날개가 없어 새의 그림자를 따라 못의 언저리까지 질주해 볼 뿐
潛泳도 昇天도 하지 못한 채 세상 바람이 죄다 그의 몫이다
젖을 수 없는 못은 도리어 沙漠
내려다봐야 보이는 하늘은 도리어 苦海
잔비를 맞으며 세상을 미끄러진 하루
잔비에도 등허리가 시큰했을 사내 생각에 코허리가 시큰하다
圓과 圓이 부딪쳐 깨어지는 수면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흐느끼는 세상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렸을 사내
盡人事의 땀이 마르고 응답하지 않는 神을 향한
巫女의 눈물마저 다 마르고 境界에 갇힌 자
마른 영혼을 찔러 혀에 가만히 대 보니
몸서리쳐지도록 짜다
타들어 간 鹽田의 까만 소금
刑期를 가늠할 길 없는 사내 어느 새
철없이 겁 없이 세상을 지치는 어린 새 끼 들을 수습하여
水草 사이로 부끄럽게 여윈 몸을 감춘다.

[심사평] “생활 속 현상 잡아낸 감각적인 눈, 삶의 철학 이끌어낸 힘 돋보여” 김정환, 도종환

시를 쓰는 우리도 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 서서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리며" 산다. 연못가에서 소금쟁이를 바라보다가 시의 화자가 느꼈던 그 경계의 아슬함과 위태로움은 시에도, 시를 쓰는 삶에도 역시 매일 찾아온다. "잠영도 승천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가라앉을 수도 날아오를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경계에 갇혀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고해(苦海)를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건너가는 일, 그게 우리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소금쟁이를 맛보다'는 밀도 높게 형상화하고 있다. 미세한 현상을 놓치지 않는 감각적인 눈이 있고 그것을 깊이 있는 삶의 철학으로 끌고 갈 줄 아는 힘이 있다. 시적 긴장이 살아 있고 시의 내면이 꽉 차 있다. 언어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에 끌려가기보다는 삶에서 우러난 시가 좋은 시라는 믿음을 견지하면 좋겠다.
‘야영'도 삶과 언어가 육화되어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작품과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 당선자 / 한창석

"당선소식에 힘든시간 떠올라 눈물 등 푸른 삶을 살아가는 시인될터"

어떤 음성도 수신되지 않는 묵음과 잡음뿐인 라디오를 붙잡고 상심해도 그는 당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응답하시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맘을 놓아야 당신의 꿈을 나를 도구삼아 이루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호리병에 다시 나를 가두고 네 번째 천년을 기다리려고 했다. 가나안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광야의 시간은 셈하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그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필마단기로 시와 씨름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이 젖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그 분들이 당신의 살을 남김없이 발라내어 나를 먹이신 것을 잘 안다. 당연한 일인 양 받아먹어 온 부끄러움에 목이 메인다. 송하춘 선생님! 내게는 너무도 푸르고 넓은 바다인 그 분의 품에서 나는 영혼의 뼈마디까지 틀어 퍼덕이고 싶었다. 나의 헤엄으로 선생님께 작은 미소라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란 것은 이미 너무 오래된 소원이었다. 정진규 선생님, 최동호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서도 나의 서툰 헤엄을 지켜보아 주실 것이다. 떠나온 모천의 이상우 선생님, 박범신 선생님, 김석환 선생님, 이재명 선생님, 고운기 선생님을 뵙고 떠나온 나날들만큼 이마를 땅에 대고 아가미를 벌름거려야 할 일이다. 연두부 같은 오빠를 응원해준 동생 정화와 승덕이에게도 언제나 고맙다. 깜깜한 지난 외로움이 달콤했다고 위증하지만 사실 무수한 멀미들은 맵고 썼다. 고비마다 산호섬이 되어 준 소중한 동무들, 대학원 식구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옹알이에 귀 기울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시시한 시, 시들시들한 시, 급기야 허연 배를 위로하고 떠오르는 시체가 되지 않고 늘 등 푸른 시를 쓰겠다고, 아니 등 푸른 삶을 살겠다고 약속드린다. 끝으로, 귀한 지면을 통해 시인의 삶을 다짐하게 해 주신 경인일보사에 감사드린다.

약력
1975년 서울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문과 박사 수료

 



[동양일보] “오월” / 김영식

아이가 굴렁쇠를 굴린다
빈 골목이 출렁거린다
투명한 바퀴가 오후의 적막을 감는다
파닥거리며 햇살과 바람이
허공이 한 아름씩 감겨든다
감긴 것들이 말려 들어가
둥근 시간이 된다, 제 몸 속
길을 떠밀며 달려가는 아이

플라타너스 강둑 위
굴렁쇠가 아이를 굴린다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는
새소리처럼 지저귄다
자궁처럼 환한,
굴렁쇠 안 깊숙이 둥근 산이 눕는다
둥근 물소리도 따라 눕는다

들녘 끝
은빛실타래가 천천히
감긴 길을 풀어낸다
고요하던 풍경이 수런거린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섶
햇살과 바람이 풀린다
노을 몇 점 걸어 나와
강가에 걸터 앉는다

텅 빈, 허공을 밀고 가는 아이
우주 한켠, 챠르르
지구가 굴러간다, 오월이
푸르게 자전한다.

[심사평] 양채영

시인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든 안 되든 시인의 위의(威儀)와 자존심과 겸손함을 견지해야 된다. 남은 시편은 김영식의 ‘오월’ 외 4편과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 외 8편, 김은실의 ‘입동’ 외 5편이다.
김영식의 시편들은 밝고 경쾌하며 속도감과 감각적인 언어 교직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에서도 ‘오월’은 작품의 소도구들인 소년, 굴렁쇠, 5월의 하늘과 푸르름, 강둑과 플라타너스들이 모두 ‘오월’이란 시를 위해 동질적으로 기여하고 헌신하고 있는 점이 그의 다른 작품 ‘단단한 틈’처럼 서로 견고하게 엉켜 있다.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 외 8편은 전편이 모두 산문성 시의 특장들을 지니고 있다. 행의 길이가 길고 유연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하고 있는 점이다. 행과 행간이 서로 주어와 서술 형식으로 이뤄진 점도 그렇다. ‘문을 열면 온전한 것은 오직 문뿐이고/ 그냥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오두막,/ 아주 낡은 문과 같은 내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오두막처럼 금세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는 장시를 쓰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
김은실의 ‘입동’ 외 5편은 입동 무렵의 스산한 농촌풍경을 아주 리얼하게 승화시켜준 작품이다. ‘메주를 쑤는 일은 마실 길을 끓이는 일이다/ 이곳저곳 쥐구멍 숭숭 난 마을 안 소문을 메우는 일이며/ 겨우내 헐거운 낮잠에 빠져 있을 농기구들의 텅 빈 시장기를 달래어주는 일이다’에 이르러서는 절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성 시인의 입동 시편들에서도 이렇게 가슴에 닿는 표현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앞뒤의 표현이 이 중심 표현을 떠받치지 못한 듯한 점이 아쉽다. 위 세 편 모두 훌륭한 특장들을 지니고 있으나 현대적 감각에 좀 더 어필한다고 생각되는 김영식의 ‘오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라일보] “구포역‘ / 김재근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는 거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거
마른 겨울빛 받으며 벌서고 있는 나무같이 견디는 거, 아닌가

구포역, 휘파람 불며 기차는 몰려오고
사람들은 낙엽처럼 또 부서져 내린다
찬바람 부는 광장구석 어깨 구겨져 서성이면
비릿한 무엇이 목 어디 가시처럼 걸리고

야산 겨울 숲 너머로 하루해가 풀썩 지고 있다

늦은 역 광장은 묘지처럼 이제 적막하다
빈 소주병은 시린 기억들을 꽉, 채우고 뒹굴고 있다
꺼져 가는 모닥불 옆 용도 폐기된 라면박스와 신문지에 쌓여
사내는 잠이 들고

작은 불빛들이 다가와 사내의 이마를 만진다
깜박이는 노숙의 굽은 등대, 상처여
이 후미진 외곽이 그대의 둥지였구나
물새의 알, 깨어진 알이여

바람과 겨울바다를 건너 그대가 흘린 모래알
나의 무릎에서 어지러이 날아 오른다
첫 차가 오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그대와 나의 겨울을 태우고
목쉰 기적소리 오래 울리며 떠나고 있다

[심사평] “눈물 도는 주지적 서정 풍요로워” 문충성

김재근의 <구포역>을 뽑는다. <구포역>풍경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어른거려 그 감동을 지울 수 없다. 평범해 보이지만 뛰어난 은유적인 언어 구사력, 견고한 시의 구조, 따뜻한 현실의식도 높이 샀다.


[전남일보] “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 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 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심사평] 고재종

시 지망생들은 왜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까. 그것도 왜 유년과 연관된 이야기에만 집중할까. 그렇게도 쓸 것이 없어서야 무얼 더 일러 말하겠는가. 아니 최소한 자본의 세계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슬프고 노여운 세계를 사는 자기 삶, 자기 실존, 자기 존재조차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일국(一國)의 시인을 꿈꾸는 시 지망생들의 소재와 주제의식과 사유의 협소함에 대해 심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랫도리에 물 흘리는 냉장고의 내력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냉장고를 운영하는 우리네 보통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시간에 의한 생의 마모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안오일, 그리고 새벽 별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상징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어서야'라며 지금까지 별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전복해 버리는 이형경 등이 그럴 듯한 수확이었다. 이형경은 활달한 상상력과 전복을 통해 생의 이면을 들추려는 젊은 패기는 좋지만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허점이 많았다. 안오일은 많은 수련이 엿보이지만 상상력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형경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드린다.

[강원일보] “소라여인숙” / 김영식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심사평] 김영기, 최승호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영식의 `소라여인숙' 외 4편과 박창호의 `오십견'외 4편이었다. 박창호의 시는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가 담백하고 과장된 진술이 없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씌어진듯한 그의 시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다. 상실감과 회한과 생의 덧없음, 차분한 어조는 시의 내용을 실감나게 하면서 독자를 숙연하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감상성은 그의 시의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문 마늘을 먹으면/ 아버지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같은 진술이 그렇다. 감상을 절제할 수 있는 냉정한 가슴, 객관의 자리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차가운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선작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은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신인에게는, 그리고 문학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이런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소라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은 `소라여인숙'과 다소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썩은 생선들과 고래냄새, 그리고 범죄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신인의 독특한 시 시계를 우리는 주목할 것이다.


[불교신문] “겨울 내소사” /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 없는 때
눈 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꺾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 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 들어 눈 뭉치를 털어 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 앉은 장광 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 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 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심사평] “서정시의 ‘결’ 불교적 사유로 잘 표현” 최동호

불교 관련 소재가 눈에 많이 띄었다. 불교적 가르침이란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시 작품으로 승화 내지 변용시키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지닌 신인을 탄생시키는 것 또한 신춘문예의 역할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추사불이선란도’와 ‘겨울 내소사’ 두 편을 놓고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정할지 고심하였다. ‘추사불이선란도’는 선미가 승하고 시적 통찰이 빛나고 있었으나, 시적 구성과 언어적 세련미는 ‘겨울 내소사’에 조금 뒤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아 있다.
‘겨울 내소사’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결을 잘 살리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에서 포착되는 섬세한 화자의 눈길은 시행의 분절로 드러내면서 고요 속에서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을 통해 장엄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읽어내는 동시에 신생의 열망을 표현하는 능력은 그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시작 수련을 거쳤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추사불이선란도’는 마지막 결구에서 “내게 있어 추사의 붓끝은 너무 아득하고 깊어 보였다”라고 하는 설명적 진술로 마무리되어 결과적으로 시적 긴장을 약화시킨 것이 결정적 아쉬움이었다.

-시 당선 소감
“세상의 말들 가운데 고요한 길을 내”

강의를 위해서 찾아간 학교의 학과사무실 게시판에서 〈불교신문〉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았다. 당선 전화를 받고 게시물을 보던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학생과 투고작을 놓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묘한 일이다. 한동안 그만 두었던 시작(詩作)인데, 12월 초순의 내 마음은 시심으로 수런거렸다. 동대문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쉽지 않았다.

20대에는 말을 하고 싶어서 시를 쓰려고 했다.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시를 쓰지 않은 세월 동안 마음은 욕망으로 어수선하고 복잡해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말을 더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피로했다. 자본의 욕망으로 들끓는 세상과 수없이 많은 언어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 매우 자주 겨울잠 같은 유폐로 찾아 들고 싶었다.

고단했던 시절, 노자와 장자를 읽었던 것도 그러한 욕망의 한 자락이었던 것 같다. 늘 어디론가 가고 싶었지만 떠난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인도와 관련된 책자들을 뒤적이며 지도를 그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현실이 아니라 무거운 나의 욕망 때문이었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세상의 말들 가운데 고요의 길을 내고 싶고, 동일한 보폭으로 현실을 살고 싶다. 나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찰의 고요에 익숙하다. 고요에 깃들 수 있는 시간들이 시로 인해 많아졌으면 싶다.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다 인연’이라는 말법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일이다. 해석의 과정 속에 더해지는 욕망들, 그것을 덜어내는 일의 자연(自然), 내 말들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나의 언어들이 당신의 마음을 담아내기를 원하시는 내 어머니와 오래도록 마음을 돌아보게 만드시는 아버지로 인해, 처음 시를 쓰고 싶었다. 그분들께 오래가는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래 전 시 쓰는 일에 용기를 주었던 김명인 선생님께, 그리고 나의 말들에 길을 열어준 심사위원 선생님과 불교신문사에 감사드린다. 모두 고맙다. 십여 년 전 도봉산에서 내 시를 찬찬히 읽어주신 당신에게, 겨울 사찰의 햇빛 같은 평온과 평화가 내리기를 소망한다./김 문 주

 


[전북도민일보] “기다림은 우주입니다” / 김창래

내 기다림은 피가 생깁니다.
신장병 완치 약이었습니다.

남들은 피가 마른다던데 나는
기다릴 일이면 건강한 독수리가 됩니다.

기다리는 동안은 내 가치가 높아집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기다리는
강물의 흥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밤잠도 없는 강물들의 흥분 소리
물이 된 것을 행복해하는 아우성의 힘
샘물이 개울물로 강물로 나이아가라 폭포로
집결하는 기다림의 영원 碑가 되는 바다로

기다림 한 낮이면 피가 졸아든다는데
내 성욕은 바다로
맑은 햇빛 산으로 승화됩니다.

기다리는 내 모습 안에 고이는 내 눈물은
기다림으로 모여 생생한 고백으로 되는 피

남들은 기다림이 늦거나 만나지 못하면
병에 실망에 노이로제에 걸려 자살도 한다지만
나는 생명이 깊어지는 바다 日記를 씁니다.

만나고 기다림은 한 침대입니다.
포도가 쨈 되기 기다리는 동안 생명은 불
이 불은 기다림의 사랑입니다.

새로운 기다림은 항시 설레는 출발신호입니다.
여름 기다림이 없는 봄꽃은 죽음입니다.
가을 과육은 여름이 남긴 기다림이지요.
과목이 잉태한 생명 맛
겨울을 이긴 씨앗은 봄이 기다려 준 절정이지요.
이 씨앗을 위해 오는 봄을 사랑이라 하지요.

기다림 그림이 전시된 굴에
빛은 태양보다 밝아
태양보다 먼 곳을 기다린다 해도 보이기에
내게는 오늘 의미가 기다린 날이라 더 밝습니다.
이는 기다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종이로 바다를 먹물로 기록되는 기다림은
지금도 창조되는 우주를 만납니다.

[심사평] 최승범

 최종선에 오른 응모자는 김범남(광주), 선단(전주), 박예분(전주), 김중수(익산), 김현호(전주), 임상훈(김제), 김형태(서울), 최일걸(전주), 김창래(인천) 씨였다. 모두 그 동안의 시작 연조를 느끼게 하는 수준작들이었다. 자연·인간사에 걸친 소재도 다양하고, 시행으로의 사회적 풍자성도 놀라웠다.
이 중에서 당선작 결정이란 쉽지 않았다. 특히 최일걸 씨의 ‘고수내 연가’와 김창래 씨의 ‘기다림은 우주입니다’를 놓고는 더했다. 다같이 내려놓기 아까웠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고수내 연가’를 내려놓기로 하였다. 최씨에겐 이미 동화·희곡 분야에서 신춘문예 당선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김씨는 오직 시의 창작에만 40여 년을 보냈다. ‘하늘을 종이로 바다를 먹물로’ 자기 시를 드러내고자한 끈기였던 셈이다. 자기 시의 빛을 기다리고 노력한 그 ‘기다림’의 미학을 높이 사기로 하였다.


[대전일보] “골목길” / 최재영

연둣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
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
허공 한 구석 팽팽해지고
골목에 나앉은 늙은 여자들
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
골목은 하루 종일 분주하다
봄의 한복판에서 출렁이는
저 환한 푸념들
가지마다 탱탱하게 들어차는 수런거림
한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지상과 허공 그 짧은 간극으로
물오른 생의 주름들이 펼쳐지고
음탕한 농담 한두 마디 건널 때마다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쭈글쭈글한 웃음소리
잠시 생을 붉게 물들이는
봄날 눈빛 환한 기억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담장에 기대앉은 봄꽃들
한동안 그들이 피워 올린 검버섯을 따라 올라가고
여기 짧은 환희, 봄은 덫이었나.

[심사평] 김명인, 이시영

“연둣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로 시작되는 ‘골목길’(최재영)은 응모작들 중 단연 돋보이는 따뜻한 작품이다. 20행의 시행들이 저마다의 밀도로 촘촘히 살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골목은 하루 종일 분주하다”와 같은 표현은 그야말로 순간 포착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또 시적 미학을 충분히 쏟아놓은 마무리 역시 뛰어나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경남신문] “문 밖에는 봄” / 유행두

지구 끝에서 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 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지구를 한참이나 돌다 온 듯한. 퇴계 선생 지폐 위에
가볍게 흩어진다. 산달 아내. 배가 부푼다.

중환자실. 어머니는 링거 병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한 알씩 세고 계신다.
끼니때마다 가는 호스 타고 내려가는 미음. 포르말린 먼지 반짝. 휠체어 힐끔 훔쳐보신다.

-저녁마다 어둠이 먼저 눕던 달셋방. 도란도란 웃음을 젓가락질하던 밥상에서
어머니와 아내가 번갈아 등을 토닥거리고

몇 개월 전 신문처럼 할 일 잃고 누운 내 옆에서 아내는 낮은 기도소리를 쥐어준다.
가끔씩 지구는 벌떡벌떡 몸을 세워 링거 병을 흔들고
아내를 병실 바닥까지 내려 앉히지만 아내는 언제나 가지런히 웃는다.

모둠발을 해 본다. 날개가 돋은 휠체어. 휠체어가 대기권을 향해 바퀴를 힘차게 굴린다.
지구가 뒤로 밀리고 있다.


[심사평] 이광석, 강희근

최종심의 ‘지동설’은 도시를 사막으로 보는 구상이 낯익은 것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잃었고. ‘석포 역에서’는 안정된 화술에도 불구하고 감추고 있는 뜻이 약하다는 점이 드러나 있고. ‘라디오 여왕’은 포즈를 취하는 화자의 입장이 깊이를 드러내지 못했고. ‘서풍 불던 날’은 서술적인 리듬에서 얻어질 수 있는 어떤 원형적인 이미지가 살아나지 못 했다. 다 제외하고 ‘문 밖에는 봄’이 남게 되었다. 이미지가 투명하고 할 말이 뚜렷하고 구조가 탄탄하다.
아내가 빵을 굽고. 어머니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고. ‘나’는 실직해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화목한 가정으로 거듭나 있다. 테마는 아주 상식적이지만 이야기와 이미지를 끌고 가는 솜씨가 섬세하면서 탄력이 있다. 끝 연에서 ‘날개가 돋은 휠체어’에 화자의 의도가 집약되어 있다.


[농민신문] “호두, 그 기억의 방” / 최옥향

굴곡진 삶
지도위의 협곡 같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안은 둥근 동굴의 소리를 듣는다
어디 하나 싹 틔울 씨눈조차 보이지 않게
으스러져라 껴안고
골마다 바람도 없이 풍장 되어 가던
깜깜한 벽 속의 간극을 재어 보던 소리
늙은 동굴 같은 안방에선
언제나 할아버지의 깊은 시름을 알리는
염주 굴리던 소리가 났었지
손수 앉힌 마당의 징검돌을 건너면
그 끝에서 빛나던 항아리들처럼
한때는 고소한 젖빛 냄새로 흐르던 방들
다시는 정정한 한 그루 나무로 서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앉은뱅이로 홀로 견뎌야 했던
목수였던 당신의 호두빛 깊은 주름
달그락, 달그락
둥근 방문 고리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집 모퉁이에 서서 늙어 버린 지팡이처럼
언제나 마른 삭정이 냄새가 나던 그 기억의 방
툭,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에서 마지막 떨어져 구르다
목침 위에 나란히 놓였던
유난히 반질거리던 그 두 알의 호두
결코 소멸되지 않을 단단한 기억 하나가
지금 흔들리며 걷는 내 호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환한 밖을 기웃거리고 있다


[심사평] “내면심리 형상화 솜씨 뛰어나” 신규호, 문효치, 손해일

한편의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작품이 구조적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고, 참신성과 독창성, 그리고 시어 선택의 적절성 등을 중시해서 심사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의 봄〉과 〈심전도〉는 농촌의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현실 문제를 호소력 있게 다룬 점이 돋보였으나, 주제가 단조롭고 지나치게 서술적인 점이 눈에 거슬렸다. 〈민들레〉와 〈오래 된 꽃상여〉는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비범하고 서정성이 짙었으나, 시의 구조가 평면적이어서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시대적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최종적으로 〈호두, 그 기억의 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호두, 그 기억의 방〉은 호두 자체의 내밀한 구조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입체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과거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복잡한 내면 심리의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나,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농민신문] (시조) “구석집” / 김사계

또 다녀갔나 보다 구석 집 아들 내외
눈 어두신 할머니 삼십 촉 등 켜시면
그 소식 궁금한 마을 길어지는 시골 밤

남은 건 두 마지기 비탈진 감자밭뿐
말없는 노안 속에 좁아지신 마음이
남의 말 일축하시듯 어두운 등 끄신다

새벽잠 대신하여 켜 놓은 텔레비전
자고 나면 평당 가격 수백씩 오른다는
도회지 삶터 값들을 며칠째 쏟아 낸다

[심사평] “빼어난 종장 처리, 현실감 생생” 한분순, 문무학

심사위원들은 시조 창작에서는 시조의 형식을 다루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이 점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작품의 완성도에 주목하기로 했다. 그 결과 〈구석집〉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구석집〉은 농촌 현실과 홀로 사는 노인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며, 특히 시조의 형식 활용에서 종장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잘 살려낸 것은 압권이었다. 그리고 압축과 생략으로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말을 줄이는 능력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 외에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당선작에서 보인 미덕을 살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 서정에 머물지 않고 시야가 넓은 점, 회고조에 기대지 않고 현장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샀다.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메모 : 가져갑니다. 잘 활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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