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선시>
엘리펀트맨
-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외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 심사위원=김승희(시인ㆍ서강대 국문과 교수)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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