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국제신문 당선작 >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命 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심사평>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외국에서, 고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다양한 작품이 투고됐으며 남성들의 투고가 많아져 신춘문예 여성화의 비율이 다소 주는 현상도 보였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시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등 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시를…'과 '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와 '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나머지 분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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