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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08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 페루 / 이제니

by 혜강(惠江) 2008. 1. 1.

<2008 경향 신춘문예시 당선작>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   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당선소감-이제니>

 

보들레르 무덤에서 否定의 산책자를 얘기하다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회색빛 거리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석 위엔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불멸은 저주 받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시집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책이자 강물 위에 던져버린 첫번째 책이라고 말하자 보들레르는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산 일보다 버린 일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산책 혹은 배회를 일삼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未知와 否定의 정신을 지닌 아름다운 산책자들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제 정말 작별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인 어떤 말을 했고 나 또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인 어떤 말을 했고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음은 존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내게 도착한 시인이! 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앞에서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언은 늘 그렇듯 부질없는 짓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현재의 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공간 속을 산책하는 일은 오랜 버릇대로 지속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사물들을 나만의 낯선 눈으로 포착할 것이다.

   어머니,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저의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 타자기를 물려 받은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화가이자 내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야, 언제나 사려 깊고도 날카롭게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손 잡고 함께 걸어가자. 내 동생 웅아 진아,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언어의 장엄함과 황폐함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어린 시절의 국어 선생님인 진대곤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대 그대들에게 사랑을 사랑을.

 

<심사평>

 

 

- 뛰고 달리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쾌감

 

심사위원 황인숙·최승호

 

   모두 열두 분의 시가 본심에 올랐다. 그 가운데 김란 씨의 ‘자벌레’ 외 4편과 이제니 씨의 ‘검버섯’ 외 5편이 마지막으로 논의됐다.

   김란 씨는 시를 안정감 있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하다. 쓸 데 없는 수사가 없다. 그런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약하다. 그래서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저 무난히 스쳐간다.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 비뇨기만 남았다던”(‘골똘한 화장’에서)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활달함이랄지 생기랄지가 모자라 보인다. 관념어의 잦은 사용과 리듬감 없이 늘어진 문장은 생동감의 걸림돌이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에서)

   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

 

* 심사위원: 황인숙,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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