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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12

나주읍성과 고샅길, 오밀조밀 ‘작은 한양’…1000년 기품이 어디 가랴 나주읍성과 고샅길 오밀조밀 ‘작은 한양’…1000년 기품이 어디 가랴 나주=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16.‘작은 한양’이라 불리는 나주는 광주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쇠락을 거듭해 왔다. 나주읍성 서성문 주변은 1~2층 건물에 좁은 골목으로 연결돼 시골마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나주=최.. 2019. 3. 21.
호남의 천년고도 나주, 해품은 운해…붉은비단 같구나 호남의 천년고도 나주 해품은 운해…붉은비단 같구나 전주·나주 합쳐 전라도… 1000년 넘게 걸어온 비단길, 그후 100년의 쇠락… 역사의 부침 속 느릿느릿 더디가는 시간… 바래서 더 좋은 풍광 나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한창 잘나가던 전성기만 1000년이 넘는다. 넓은 들판에서 생산한 .. 2018. 11. 9.
신록의 나주, 맑은 연두, 짙은 초록이 눈부시다. 신록의 세상 '나주' 맑은 연두, 짙은 초록이 눈부시다. 나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 ▲ 춘불회(春佛會) 추내장(秋內藏).’ 봄에는 나주의 불회사가, 가을에는 정읍의 내장사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다. 이 말대로 전남 나주의 불회사는 연두색 신록으로 포위되는 이즈음이 가장 아름답다. .. 2018. 4. 21.
호남의 소울푸드 전라도 홍어, 영산강 뱃길에서 썩지 않고 숙성- 톡 쏘는 알싸한 맛 탄생 호남의 소울푸드 전라도 홍어 영산강 뱃길에서 썩지 않고 숙성… 톡 쏘는 알싸한 맛 탄생 광주·나주 = 김성윤 음식전문 기자 영산강 지역 별미 고려 말 흑산도에 왜구 출몰 주민들 영산강 거슬러 나주로 영산포까지 배 타고 10~15일 다른 고기는 다 썩었지만 홍어는 썩지 않고 발효 홍어 40.. 2018. 2. 14.
전남 나주 '영산강 풍경' 전남 나주 '영산강 풍경' 연둣빛 세상, 실타래처럼 봄이 풀린다. 나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 * 나주 영산강 풍경 * 전남 나주의 영산강 지류 드들강변의 모습. 아직 물가의 버드나무는 새잎을 내지 않았지만 울창한 솔숲 아래 초지에는 초록의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 강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작곡가의 손을 거쳐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시가 노래가 됐다. 가장 서정적인 봄 풍경은 강변에 있습니다. 남도 땅을 적시며 흐르는 ‘봄날의 강’이라면 섬진강이 첫손에 꼽히지만, 영산강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전남 담양에서 시작해 광주, 나주, 함평, 무안 땅을 지나 목포 앞바다에 이르는 강. 섬진강의 봄날이 폭죽처럼 터지는 산수유와 매화, 벚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면, 영산강은 버드나무의.. 2017. 4. 5.
나주 영산포 근대문화유산과 오래된 골목 나주 영산포 근대문화유산과 오래된 골목 옛것이 빛나는 거리를 걷다 글, 사진 : 장태동(여행작가) 금성관 포구의 밤은 고요하다. 등대는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선창을 오가는 많은 배들을 위해 한때 불을 밝혔던 영산포 등대, 불 꺼진 등대 앞으로 숱한 사연을 품은 영산강이 말없이 흐른다. 영산포 등대 남부 지방 전세(田稅)의 집산지, 영산창 영산강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주,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까지 122km를 흐른 뒤 바다에 이른다. 영산강이 품은 마을 영산포는 조선시대 전세(田稅)를 보관하던 영산창이 있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영광 법성창이 생기기 전까지 영산창은 남부 지방의 전세를 모았다가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역할을 했다. 뱃길이 시작되는 영산포구는 사람들과 주변 .. 2014. 1. 14.
나주 맛여행, 맑은 국물에 넘쳐 나는 남도의 넉넉한 인심 나주 맛여행 맑은 국물에 넘쳐 나는 남도의 넉넉한 인심 위치 : 전남 나주시 금계동 등 * 한 그릇의 나주곰탕 * 나주시로 가족여행을 간다면 별미기행에 앞서 시내의 나주목문화관부터 들러 역사를 공부해보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나주가 발달해온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나주는 예로부터 곡창 호남의 상징이며 교통,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의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나주를 서울(한양)과 닮았다 하여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소경(小京)’이라 기록하기도 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나주에 10여 년 간 머물면서 오씨처녀(장화왕후)를 만나 2대 임금인 혜종이 태어났는데 후에 임금이 태어난 마을이란 뜻으로 ‘흥룡동(興龍洞)’, ‘어향나주(御鄕羅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 전국.. 2012. 3. 25.
나주, 2천년의 이야기를 간직한 영산강의 보석 전남 나주 2천년의 이야기를 간직한 영산강의 보석 한국관광공사 제공 ▲영산강 유채꽃 전남 담양군 용면에서 발원해 광주, 나주, 영암을 지나 목포의 서해바다로 빠져나가기까지 350리를 굽이치며 흐르는 영산강. 작은 지류들을 만나며 굴곡을 더욱 크게 하고 강의 품을 넓게 열어 살찌운 땅이 바로 나주다.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서 전라도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을만큼 나주는 불과 한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라도 땅의 중심지였다. 영산강변의 영산포는 남해바다에서 올라 온 해산물들과 나주평야에서 모아진 곡물들이 모이는 호남 지역 최대의 물자교류지였다. 일제시대에는 호남지역의 곡물들이 영산포를 통해 일본으로 공출되면서 수탈의 거점이 되기도 했던 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1977년까지도 배가 드나들었으나 1981년 영산강 .. 2011. 5. 10.
나주, 남도의 젖줄따라, 흘러흘러 영산이라(영산강-황포돛대-불화사-죽설헌 전남 나주 남도의 젖줄따라, 흘러흘러 영산이라 영산강-황포돛대-불화사-죽설헌 스포츠조선 글ㆍ사진 김형우 기자 ▲ 영산강에 다시 띄운 황포돛배. 영산강의 옛 정취를 되살리기 위해 5월 중순부터 운행되는 황포돛배는 나주 관광의 새로운 테마거리가 되고 있다. 영산강이 넉넉한 호남 들녘을 휘감아 도는 전남 나주는 예로부터 풍요의 땅이었다. 삼한시대부터 조선조까지 호남내륙 수운의 거점으로 전라도의 또 다른 상징으로 군림해왔다. 그 중심 영산포는 1977년 영산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까지 쌀과 소금, 홍어 등 호남 물자의 집산지로 풍요롭고도 독특한 천년의 문화를 형성해왔다. 때문에 곳곳에 귀한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홍어, 곰탕, 장어 등 남도 미식거리도 풍성하다. 배꽃이 지고 난 이즈음 영산강 줄기에는 옛 영.. 2010. 5. 10.
전남 나주 영산강 동섬의 봄안개 전남 나주 영산강 굿바이! 동섬… 물안개 사이로 배웅하다 박경일 기자 ▲ 이른 새벽 영산강 동섬의 몽환적인 풍경. 이즈음 동섬은 유채꽃 환하게 피어난 강변의 물길을 따라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난다. 동섬의 ‘빛나는 봄’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동틀 무렵의 푸른 새벽, 전남 나주의 영산강변에 섰습니다. 봄이 당도했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공기가 차갑습니다. 시린 손을 비비면서 강둑에 섰습니다. 느린 강물 위로, 깊은 꿈을 덮은 이불처럼 안개가 천천히 피어오릅니다. 그 안개 속에서 강변의 윷꽃들이 때늦은 꽃망울을 하나둘 터뜨리고 있습니다. 왕버드나무도 가지에 파릇한 새순을 틔워 내고 있었습니다. 영산강을 찾아간 이유는 곧 사라질 풍경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유채꽃 화사하게 피어나고 버드.. 2010. 4. 22.
영산나루마을, 나루터 애환이 어린 곳- 주몽촬영지 삼한지테마파크도 나주 영산나루마을 나루터의 애환이 서린 곳 - 나주 공산 신곡리, 드라마 ‘주몽’ 촬영지- 글·사진 남상학 영산나루마을은 마을을 감아 안을 듯 흐르고 있는 영산강과 마을 뒤로 있는 높지 않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매우 포근하고 아늑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곳은 지금부터 약 350년 전 제주 양씨와 광산 김씨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마을 뒷산의 지형이 봉형이라 마을 이름을 봉곡이라 하였으며, 지상에 성현이 배출되면 봉이 출현했다하여 마을 이름을 자랑삼아 불렀고, 광산 김씨의 후예들이 부명을 떨쳤던 마을이었다. 해발 150m 되는 마을 뒷산에 오르면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가 있으며, 영산강은 강 주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어 배로 강을 유람하시면서.. 2007. 4. 2.
‘천년목사 고을’ 나주(羅州)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천년목사 고을’ 나주(羅州)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 남고문, 정수루, 목사 내아와 금성관, 나주향교, 고분 - 글·사진 남상학 나주는 강진, 해남, 완도로 가는 길목으로 여기고 여러 차례 지나친 적은 있지만 관광의 목적지로 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 모처럼 기회를 얻어 나주의 속살을 얼핏이나마 둘러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왜냐 하면 나주는 거의 천년 동안 교통ㆍ군사ㆍ행정의 중심지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 당 시대의 문화유산을 많이 지니고 있었기에 말이다. 비록 짧은 시간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본 나주의 모습이지만 예사롭지가 않았다. ‘천년목사 고을’ 나주 영산강 삼백 리 어머니 같은 젖줄이 있어 선사인들은 이 유역에 등을 붙일 자리를 잡았겄다. 돌창과 돌도끼, 석검, 돌화살촉 하나.. 2007.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