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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3

별을 굽다 / 김혜순 별을 굽다 -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 2020. 5. 8.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시집 《또 다른 별에서》(198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박수근 그림의 이미지와 화법이 지닌 특성을 시적인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라는 부제를 통해.. 2020. 5. 7.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 2020.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