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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태국,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캄보디아 여행,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앙코르 유적을 찾아서

by 혜강(惠江) 2006. 8. 4.

 

캄보다아  여행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앙코르의 유적을 찾아서

 

 

글˙사진 남상학

 

 

 

 

 

 

태국에서 육로로 캄보디아를 넘어

 


  우리의 여행 일정은 태국 관광 뒤에 앙코르  와트를 보기 위해 육로로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들어가는 것이다.  태국의 국경 도시 아란까지 달리는 찻길 양쪽은 산이나 언덕을 찾아볼 수 없고 드넓은 벌판뿐이다.

   건기여서 특별한 작물은 없었지만 기후 조건으로 보아 1년 4모작의 쌀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산 과잉으로 정부가 정책적으로 생산량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또 도로 양쪽으로 새우 양식장이 연이어 있었는데 질 좋은 새우는 태국의 중요 수출 품목의 하나라고 한다.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새로 잘 닦은 도로가 나타나고 각종 시설물들이 즐비한 것을 보니 국경에 근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태국 국경도시 아란 야프라텟(줄여서 ‘아란’)은 깨끗하게 잘 정비되고 활기가 있어 보였다. 아란에서 국경까지는 국력을 상징하듯 새롭게 도로를 정비해 놓았다. 우리를 태운 전세버스는 방콕에서 출발 3시간 30분을 달려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 도착했다.


 

 

태국 쪽 비자빌급소


국경 지대의 색다른 풍경


 국경 지대는 치안이 허술한 우범지역이어서 태국 출국 및 캄보디아 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 가능하면 하차하지 말라고 한다. 버스가 도착한 지역은 황량한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국경 지대는 수출, 수입품들을 거래하는 허름한 상점들과 노점들이 있고, 그곳에 갖가지 상품들이 마치 넝마처럼 걸려 있다. 그리고 오고가는 사람들 속에는 눈을 번뜩이며 관광객들을 따라붙는 잡상인과 물건을 노리는 꾼들, 구걸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살벌한 풍경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 구걸하는 아이의 행색이 너무나 불쌍하여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한 움큼 쥐어주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집요하게 늘어졌다. 이 곤혹스러운 장면이라니 -

   출입국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공안요원)인 듯한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인원을 파악하고 서류를 조사하고 한참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국경 통과를 위해 하차했다. 캄보디아 입국을 위해서는 입국 심사대를 거쳐 걸어서 넘어야 했다.  이 구역은 각종 물자들의 물류기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듯, 먼지를 내며 달리는 과적차량과 물건을 잔뜩 올려 싣고 남루한 일꾼들이 밀고 끌고 가는 손수레로 뒤범벅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태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치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처럼. 국력의 차이가 심한 나라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아취형의 캄보디아 쪽 국경의 관문은 웅장하게 보였는데 앙코르 와트의 첨탑을 본 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이 관문은 우리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국경지대, 사람과 손수레가 엉켜있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앙코르 와트를 찾아서

 

 

  앙코르 유적의 중심도시는 캄보디아 서북부의 작은 도시 시엠립(Siem Reap). 우리의 여행은 바로 그 앙코르 와트였다.   과거 6,7세기 무렵 시작된 앙코르 제국은 8세기를 넘어서면서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동남아의 대부분의 나라를 점령하였고, 똔레삽 호수 북쪽에 앙코르 왓이라는 위대한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앙코르 제국의 영화는 15세기를 지나면서 다하고, 갑작스레 롱벡(꼼뽕 츠낭)과 우동(현재 꼼뽕 츠낭에 있는 작은 촌, 롱벡에서 멀지 않음)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다시 프놈펜에 수도를 두면서 근대국가 캄보디아가 탄생했다.

 

 그 후 캄보디아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1952년 독립한 이후로도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쿠데타와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였다. 이런 캄보디아에 계속해서 세계인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곳에 수천 년 숨어있다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 과거 앙코르 제국의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유적은 시엠립 주변 약 64㎞에 걸쳐 흩어져 있으며, 그 유적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앙코르 와트다. 유적의 하나일 뿐인 앙코르 와트가 마치 앙코르 유적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것은 그 웅장한 규모뿐만이 아니라 사원의 벽면에 조각된 부조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 때문이다.  우리는  유적 탐방에 매력을 가지고 이 멀고도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서의 하룻밤  

 

 

 캄보디아 경내에 들어와 바로 만나는 국경도시는 포이펫이다. 국경을 통과하니 불과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국경에서 3분 가량 걸어오면 자그마한 광장 주변에 태국에서 흔히 보았던 툭툭과 픽업트럭, 미니버스 등이 서있고,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리고 국경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임무를 띤 경찰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정말 캄보디아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다른 날에 비해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국경도시 포이펫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그랜드다이아몬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시엠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호텔에는 한국의 여러 여행사에서 인솔하고 온 여행객으로 북적댔다. 호텔 뷔페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 여행객들이었다. 우리의 경제수준이 향상하면서 불기 시작한 해외여행의 붐이 이곳에도 예외없이 불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깥바람을 쐴까 했으나 안내원이 만류했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5시 이후에는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을뿐더러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 불미스러운 일이 가끔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는 일없이 TV를 켜보니 놀랍게도 이곳 T.V에서 한국의 아리랑 위성 채널을 볼 수 있었다.

 

  태국에 머물 때도 YTN 뉴스 채널이 나오고 태국어 자막과 함께 MBC 드라마가 방영되어 거센 한류 열풍이 동남아 곳곳에 미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잠을 자려 눈을 감으니, 국경을 넘어올 때 보았던 남루한 차람의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국경 인접지역이라 경비에 철저한 캄보디아 경찰
캄보디아 그랜드 다이아몬드 호텔 앞

 

포이펫에서 시엠립으로 이동

 

 

  캄보디아의 아침이 밝아오고,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앙코르 유적이 있는 시엠립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왔다. 출근하기 위해 태국으로 넘어가는 포이펫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국경 관문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를 태우고 갈 대형버스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여주대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여주대학교에서 사용하던 버스가 중고차로 이곳 캄보디아에 수출된 것이었다. 캄보디아에서 굴러다니는 대형차의 대부분이 한국의 중고차이며, 소형 택시나 승용차도 한국산 중고차인데, 자랑이라도 하듯 한글 글씨를 그대로 놔둔 채 이용하고 있단다. 이것도 일종의 한류 열풍. 하긴 우리도 예전에는 영문이 적힌 T셔츠를 입고 외제라고 뽑내고 자랑했으니까.

   포이펫에서 시엠립으로 가는 도로는 사정은 아주 나쁜 편. 일부는 포장도로이나 대부분 비포장도로이고, 포장여부와 관계없이 울퉁불퉁한 도로는 대형차가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가장 많이 다니는 교통수단은 미니밴이나 25승 미니버스이고, 현지인들은 픽업트럭을 타고 얼굴에 수건을 감싼 채 달린다. 건기의 비포장도로는 그야말로 먼지투성이, 도로 주변의 집이나 나무들은 고스란히 흙먼지을 숙명처럼 이고 서 있다.

    도로는 여기저기 보수 중이어서 돌아가야 했다.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한글로 ‘종로’라고 쓴 간판이 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들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행진. 그러다가 갑자기 버스에 문제가 발생했다. 기름 타는 역한 냄새가 나고, 그 냄새가 버스 안까지 연기처럼 자욱하게 차 오른 것이다.

   보수공사 때문에 옆길로 빠지려 할 때 언덕에서 차의 하부가 땅에 닿았던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잠시 쉬면서 냄새를 빼고, 엔진 근처를 기름걸레로 닦고 다시 달리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아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경이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우리 버스가 고장 난 바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긴급히 연락이 닿아 대체 버스가 와서 차를 갈아타고 시엠림에 도착했으나, 버스의 고장 으로 6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시엠립으로 이동 중 만난 간판과 아이들


시엠립 재래시장 방문

 

  포이펫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시엠립에 도착했을 때는 시장기가 도는 2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예쁜 꽃들이 정원에 가득한 식당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여기가 가난한 캄보디아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쟀든 포식을 한 셈이다.

  앙코르 와트 방문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어서 오늘 오후에는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동양 최대의 톤레샵 호수에 더 있는 수상가옥들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먼저 찾아간 곳은 재래시장. 입구에는 구운 빵과 찐 옥수수, 열대 과일을 파는 노점들로 많았고, 간이 지붕을 씌운 시장 내부에는 많은 중고 제품과 각종 생활 잡화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 시장 속 온도는 더욱 높아 땀이 줄줄 흐르고, 진열된 상품이 우리나라 50~60년대의 조잡한 물건들이어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어 10분이 채 안 되어 대부분 차에 올랐다.  재래시장이라 그렇겠지만 곳곳에 묻어 있는 찌든 때만큼이나 구차한 가난이 이 나라에서 하루 빨리 추방되는 날이 오기를 빌면서 발길을 돌렸다.

 

 

 

 

동양 최대의 톤레샵(Tonle sap) 호수


   재래시장에서 곧바로 톤레샵 관광을 위해 달려 갔다. 캄보디아 북서부의 톤레샵 호수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이며, 이 호수의 물과 티벳으로부터 발원하는 메콩강이 프놈펜에서 만나서 모두 베트남의 메콩 델타 쪽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의 담수호 톤레샵 호수는 건기라 물이 많이 줄어 있었다. 흙탕물이랄까, 시궁창이랄까 그 물 위에 나무집을 지어놓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보기 전에 숙명과도 같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하소연을 들어볼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이 패망을 하고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탈출할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은 톤레샵을 통해서 태평양을 거쳐 각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캄보디아로 갔으나, 캄보디아에서는 그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그냥 톤레샵에서 배를 타고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을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 '보트피플'이라 부른다.  

    드디어 조국 베트남이 통일되어 국경이 열리고, 그들은 너무 기뻐 자기들의 조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건 총부리뿐, 소위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다시 톤레샵으로 돌아와 평생을 흔들리는 배위에서 가난을 무릅쓰고 힘겹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건기에 물이 줄자 수상 가옥을 끌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이름 하여 수상 가옥촌. 이곳은 지금 15,000명이나 되는 불쌍한 사람들의 안식처로 남아 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다행히 캄보디아인과 결혼하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톤레샵 방문은 한 마디로 내겐 충격적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숨조차 쉴 수 없게 밀려드는 엄청난 악취는 처음 맡는 사람에게는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건기의 끝이라 하수구물보다 더 심한 시궁창 같은 물 위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그들은 그 물을 식수로도 사용하고, 아이들은 헤엄을 치고 논다.  

  세계 4대 최빈국에서 간신히 벗어난 캄보디아인 중에서도 그들은 최악의 상태에서 가장 열악하게 살고 있다.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그 곳에 생활 용품을 파는 수상 슈퍼가 있고, 수상 학교가 있고, 수상 교회가 있다. 이곳 중학교는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지원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대로 보다못해 이곳에서 와서 사는 외국이들도 있다.  인간애를 발휘하여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지나치는 버스의 차창으로 우리나라 봉사단의 현수막도 보였다. 

   사진 찍기가 너무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한동안 눈에 눈물이 맺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국경에서부터 느꼈던 감정이 드디어 이곳에서 와서 폭발한 것이다. 이 탄식과 슬픔의 감정은 배를 타고 톤레샵 호수 저 멀리 떠있는 휴게선에 올라 2층 갑판에서 호수의 저편 수평선을 바라보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호수로서는 세계에서 두번째의 크기. 끝없이 펼쳐진 수면 위로 수상 가옥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름처럼 저녁 그림자가 몰려오고 있다. 톤레샵 호수로 지는 해는 아름다운 슬픔의 응어리였다.

 

 

 

 

 

크메르루즈 학살자의 위령탑



   캄보디아는 앙코르 시대(9~14세기)에 현재의 캄보디아 영토 뿐만 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지배했던 강력한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계승자이다. 당시 제국의 영화는 전설적인 앙코르 사원의 유적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20년 동안의 전쟁 후유증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현재 회복기에 있다. 특히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4년 통치 기간 중에는(1975~1979)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 7백만 캄보디아 인구 중 약 2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캄보디아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흔히 와트마이라고 불리는 킬링필드는 1975년부터 4년간 캄보디아인 150만 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크메르루즈의 대학살을 뜻한다. 이 단어는 당시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준 동명(同名)의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킬링필드’는 2차대전 중 600만 명의 유태인을‘인종 청소’라는 이름하에 죽인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대학살) 못지 않은 인류의 비극 가운데 하나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캄보디아의 곳곳에 남아 있는‘킬링필드 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엠립의 자그마한 사원 '와트마이'에도 규모는 작지만 당시 희생자의 유골을 수습해 유리벽의 탑 속에 안치해 둔 킬링필드 탑이 있다. 탑에 안치된 유골을 보며, 지구상에 항구적인 평화는 요원한 것인가 하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위령탑(위)과 이 지역에서 발굴된 희생자의 유골
집단매장지


압살라(Apsara) 민속쇼 관람하며 저녁 식사


   압살라 디너뷔페에서 저녁을 했다. 미리 예약된 좌석은 무대 바로 앞 좌석이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전통적인 이 압살라 춤을 놓고 서로 자기네가 종주국이라고 주장한다. 

    힌두 신화의 신들의 세계에서 신과 악마가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1,000년간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 탄생시킨 생명체가 바로 '압살라'였다.

   이후 압살라는 근대 동남아시아 무용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화려한 의상에 유연한 율동과 신비스런 손동작이 일품이어서 관능적인 편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하다.

   식사를 마칠 무렵 공연은 시작되었고, 분장한 무희들이 번갈아 무대에 나와서 압살라 춤을 추는 동안 나는 춤동작을 잡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춤추는 여신 압살라는 앙코르 왓의 회랑에 3천여 개나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한 개도 같은 모습이 없고, 어떤 것은 순진하고, 어떤 것은 요염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익살스런 표정이라고 한다. 내일 앙코르 왓 유적 속에서 압살라 춤을 추는 무희를 다시 보리라 생각하며 일어섰다.

 

 

 



앙코르 와트 일출 감상을 위해 새벽 기상


   우리의 첫 번째 관광 포인트는 동트기 전의 앙코르 와트였다. 본격적인 유적답사에 앞서서 앙코르 와트 일출부터 보기로 한 것이다.  마치 학생 시절 수학여행을 가서 새벽에 일어나 석굴암에 올라서 일출을 감상하듯이.

 

  이를 보기 위해 새벽 5시 호텔 로비에 나오는 사람들만으로 떠나기로 했다. 어제의 국경 넘기에 너무 피로했던지 일행 중 여럿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앙코르 와트 입구에 도착하였으나 아직도 어둠은 걷히지 않았으나 마침 달이 떠있어서 해자를 건너는 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슴프레한 중앙 참배로를 건널 때는 속세의 세계를 떠나 신들의 세계로 건너가는 착각을 느끼게 했다.

   앙코르 와트 성문을 들어서서 일출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할 때까지도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몇 사람씩 만나기도 했으나 우리가 선발대에 속하는 것 같았다.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일출 감상 포인트에 앉아 기다리니 사진에 본 앙코르 와트의 웅장한 모습이 저 멀리 스카이라인으로 몸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출 이전에 보는 장면도 묘미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꽤 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어느덧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하늘엔 구름이 없는데도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수에 투영된 왕코르 와트 사원의 모습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다. 

   오늘 하루 일정이 너무 빠듯하여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말에 다소 실망하며 뒤돌아서는 발길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참배로(중앙 진입로)를 거의 다 빠져 나올 무렵 누군가 '와!' 소리를 질렀다. 놀라 뒤돌아보니 사원 우측으로 비낀 하늘에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대했던 모습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붉게 타오르는 해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동쪽 낮은 하늘가에 구름이 덮여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옆으로 비껴 솟아오른 것이다. 

 

 

 


  
거대한 도시, 앙코르 톰(Angkor Thom)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크메르 왕국의 최대 유적지 앙코르 유적지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먼저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거대한 도시’'위대한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앙코르 톰은 크메르 제국이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 건설한 백 여 개의 사원과 신전 가운데 하나이다. 앙토르 톰은 앙코르 왓처럼 특정 건축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한때 1백만 명이 살았다는 앙코르 왕국의 수도였던 성곽도시 그 자체를 뜻한다.

   앙코르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로 이곳엔 왕궁은 물론 종교 건물과 관청 건물도 있어 앙코르 제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앙코르 톰 유적지는 대부분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신자였던 그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우주의 상징으로 앙코르 톰을 세웠다고 한다.

 

  성내의 왕궁과 사람이 살았던 건축물은 목조였기 때문에 다 썩어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석조 건물이 과거의 웅장했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유일하게 그 당시의 앙코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앙코르 톰의 규모가 엄청남을 말해 준다.

  앙코르 톰은 각 변이 3㎞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약 8m, 내부 넓이는 약 44만 2천 평에 달한다. 그리고 성벽 바깥에는 폭 100m의 수로를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게 했다.

   사람의 얼굴을 사방에 새긴 높은 고푸라(성 입구에 세우는 커다란 탑이나 구조물)가 외곽을 사방으로 둘러싼 성벽들의 중앙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쁘라삿 쯔롱이라고 부르는 작은 사원이 이 성벽의 코너마다 세워져 있다.

 

   앙코르 톰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각각 문이 있고, 다섯 번째 승리의 문은 동문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앙코르 톰에 들어가려면 해자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의 왼쪽에는 신들의 상이, 오른쪽에는 줄을 나란이 서서 큰 뱀을 들고 있는 아수라 조각상이 난간 대신 서 있다.

   이 조각상들은 앙코르 와트의 유해교반 조각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각상을 지나 문에 들어서면 인간의 세계에서 신(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착각에 바진다.

  벽면의 중앙에 커다란 거북이가 만다라 산을 등에 지고 있고 그 위에 비슈누가 올라서 있는 조각이 있다. 양 옆으로 머리 쪽에는 88명의 신이, 꼬리 쪽에는 92명의 아수라가 뱀을 안고 천년동안 줄다리기를 했다고 하는 전설을 표현하였다.  기둥과 벽면에 부조로 표현된 수백 개의 압살라 표정도 그 하나하나가 각기 달랐다.

 

 

 

앙코르톰에 드는 남문



* 불교사원 바이욘(Bayon) 사원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유적지 안에서 대표적인 대승불교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눈으로 얼핏 보기에는 이곳이 불교사원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조각 속 간간이 눈에 띄는 관세음보살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힌두 설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에 타서 검게 그슬린 바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대한 얼굴 조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과 2층은 사각형, 3층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1층 갤러리 외벽 벽면에는 앙코르 제국의 영광을 가득 새긴 채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크메르군의 위풍당당한 행진이 펼쳐지고 있고, 전투 장면, 당시의 생활상 등을 생생하게 그린 부조가 새겨져 있다. 

   3층에는 54개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4개만 남아 있다. 각 탑의 사면으로 아발로키테쉬바라(관음보살)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누구나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많은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여긴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 일명 ‘바이욘의 미소’라고도 하는 조각들이다.

   이곳에서는 동서남북을 모두 둘러봐도 이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때는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닌 왕이었으나, 그 역시 최후에는 나병에 걸린 채 우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크메르 전설에는 자야바르만 7세가 왕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던 대신의 목을 벨 때, 독기 어린 액체가 왕의 몸에 튀겨 나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2층 갤러리에 새긴 부조의 내용대로라면 뱀과 싸우던 용맹한 왕이 뱀의 맹독에 쏘여 나병에 걸려 문둥이가 된 채 테라스(문둥왕 테라스) 건설을 명하고, 극진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된다. 세월 앞에 어쩔 수 없이 스러져간 권력의 무상함과 한 인간의 비극을 볼 수 있는 현장이다.

 

 

* 바푸온(Baphuor) 사원

   바푸온 사원은 바이욘 사원의 북서쪽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사원은 우다야딧야바르만 2세에 의해 만들어진 힌두 사원으로 시바에게 바쳐진 것이다. 바이욘 사원보다 200년 정도 앞선 바푸온 사원은 공사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다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 안에 있지만 앙코르 톰 건설 이전에 만들어졌다. 바이욘 사원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도시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던 중요한 사원이었다. 높이 솟은 피라미트 형의 사원은 앙코르 왓이나, 바이욘처럼 똑같이 수미산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다.

 

   이 사원의 특징은 부조 조각이 작은 사각형 안에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겨우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일상의 생활상과 숲 속의 장면들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황금의 '링가'가 모셔져 있고,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 이곳에 와서 왕에게 충성서약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지상으로부터 43m 높이에 있는 이 신성한 사원은 사암으로 된 회랑이 집중화하는 첫 번째 모델이 되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개보수를 진행하고 있으며, 거대한 퍼즐놀이라는 표현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보수 작업이 진행될 것이란다. 

 

 

바푸욘은 계단이 매우 가파르다.


*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왕 테라스의 명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코끼리테라스와 문둥이가 된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며 건설한 테라스에 당도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테라스는 자야바르만 7세의 극명한 명암을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주로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전투에 충성하는 군대를 전송하는 등 주로 왕실행사(국가의 경사) 때 사용되었던 코끼리테라스는 높이 3m, 높이 300m가 넘는 긴 벽을 따라 실물 크기의 무수한 무리의 코끼리상과 코끼리 머리상이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터치로 새겨져 있어 코끼리테라스라 불린다. 


  밝은 이미지의 테라스답게 조각 자체도 시원시원하고 활달하다. 코끼리 테라스 뒤쪽으로는 왕궁이 있었다 하나 그 자취는 간곳이 없고, 정면으로는 12개의 탑이 도열한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느낌의 코끼리테라스에 비해 북쪽에 있는 문둥왕 테라스의 조각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7단의 벽돌을 쌓아올린 벽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고스란이 살아 있다.  섬세하고 세밀한 느낌의 악마와 인간, 압살라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주로 신화의 주제가 되는 나가(뱀), 팔이 여러 개인 거인들, 칼이나 몽둥이를 든 사람들, 반라(半裸)의 여인들이 입체감 넘치는 조각 작품을 이루고 있다.  그 부조 앞에 서면 새삼 치열했던 삶의 굴곡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보게 한다.

 

왕궁의 광장, 코끼리테라스
문둥왕조각상(위)과 문둥왕테라스의 부조

 

* 폐허의 풍경, 타 프롬(Taprom) 사원
  
   타 프롬이란 ‘브라만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프라야 칸을 지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가장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사원이다.

 

  당시에는 3,000명에 가까운 승려가 살던 대규모 사원이었지만 지금은 발견된 당시의 폐허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고색창연한 분위기다. 앙코르 유적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지금은 주변의 수목들(케폭, 반양 등)의 뒤엉킨 뿌리가 이 사원의 벽과 기둥을 휘어 감싸고 뒤틀려, 사원은 무너진 채 그 형체가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한다.  나무의 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자라는 모습에서 자연 앞에 인간의 힘과 노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며, 무너진 사원 속에서 있으면 마치 인디아나 존스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티 프롬은 인간의 위대함과 또 그것을 능가하는 자연의 위력을 아울러 깨닫게 하는 곳이어서 복원되지 앓은 채 보존된 것이 더욱 좋아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사원의 도시, 경이로운 앙코르 와트Angkor Wat)

 

 

<출처: 드래곤 포토>

 

 

  앙코르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400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던 앙코르 와트. 이 유적은 1860년 프랑스인 앙리 무오가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단일 석조건물로는 세계 최대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그 위대함을 인정받았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왕국의 유적지 가운데 백미(白眉)에 해당한다. 사원의 도시’라는 뜻의 앙코르 왓은 크메르 제국이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 건설한 백 여 개의 사원과 신전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 힌두교 사원인 동시에 무덤이다.

 

  사원은 190m 넓이의 해자에 둘러 싸여있으며, 사원의 크기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1.3km로 거대하다. 사원의 중앙에는 5개의 탑이 있으며 그 중 중앙에 있는 탑의 높이는 55m나 된다. 7t짜리 기둥 1,800개, 돌로 된 방은 260개나 된다. 입구에서부터 중앙 사원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 감동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마치 시간대가 다른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앙코르 왕국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남긴 13세기 원나라 사신 주달관은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통해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이 우뚝 서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들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략)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앙코르 제국은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나라라며 감탄했다’고 썼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앙코르 유적지를 다녀간 탐험가들은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밀림 속에 숨어 있었다고 흥분했다. 앙코르와트 사원 하나만으로도 당시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슈퍼컴퓨터로 설계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 사원은 불과 37년 만에 지어졌다.

   이 사원은 수르야바르만(Suryavarman) 2세(통치: 1112~1152년)가 자신의 장례 사원으로 지어 힌두신인 비슈누에게 봉헌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원이 동쪽을 향해 있는 것과 달리 앙코르 와트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이 사원이 묘지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사원은 웅대한 방추형의 중앙탑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어 있는 회랑, 그것을 둘러싼 삼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 등으로 이루어져 힌두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우주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앙탑에 도착해 뒤로 난 계단을 오르려 하니 경사도가 80도 정도는 족히 돼 보였고 너무 높아서 프랑스인 하나가 계단을 오르다 미끄러져 추락사했을 만큼 위험하게 보였다. 웬만하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좋다는 안내자의 말이 있었지만, 이곳까지 와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억울하게 여겨져 계단을 손으로 잡고 기어오르는데 성공했다.

   3층에서 내려다 보니 통로 양쪽에는 움푹 패인 공간이 있는데 왕과 대신들이 이용한 목욕탕이라 한다. 그 당시 이 공간에 물을 채우기 위해 물지게를 지고 계단을 올랐을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사원 앞에 서면 상식(常識)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힌두 전설이 새겨진 벽화와 마주서는 순간 역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역사가나 미술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유적지라도 보통사람들에겐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앙코르 유적지는 역사나 미학을 모르는 무지렁이에게도 그 감동이 어마어마하다.

  사원 1층의 회랑은 신화나 민화를 모티브로 한 섬세하며 아름다운 부조로 가득차 있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힌두교의 창세 신화인 유해교반(우유의 바다 휘젓기) 등이 부조의 주제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북쪽 회랑 50m의 벽 전체를 이용해 그려진 유해교반(乳海攪拌, 유액(우유)의 바다 휘젓기 Churning of the Ocean of Milk)은 앙코르 왓 관람의 백미를 이룬다.  

   벽면의 중앙에 커다란 거북이가 만다라 산을 등에 지고 있고, 그 위에 비슈누가 올라서 있는 조각이 있다. 양 옆으로 머리 쪽에는 88명의 신이, 꼬리 쪽에는 92명의 아수라가 뱀을 안고 천년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는 전설을 표현한 것이다.

   

  조형물로는 하늘의 무희 ‘압싸라’, 여러 개의 머리를 부채처럼 치켜든 큰 뱀, 창문이나 기둥의 장식과 조각 등이 특히 눈에 띄며 그 외에도 사원에는 벽화, 조각 등 불교 미술품이 가득 차 있어 사원 전체가 불교 미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태국 남부와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진출했던 크메르인들은 붉은 빛이 도는 홍토로 기초를 다진 뒤 사암을 깎아 피라미드형 사원을 올리고 왕궁을 만들었던 것이다.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고, 벽마다 신화와 역사를 새겼다.

 

 



   그러나 사원을 들여다보면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침략 전쟁과 도굴, 복원 실패 때문이라고 한다. 14세기 크메르 왕국을 침범한 태국인들은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신상의 머리와 사자상의 꼬리를 잘라버렸고, 현대에 와서는 일본인들이 사원을 복원한다며 무작정 해체했다가 조립을 잘못하는 바람에 원형을 훼손하여 비가 줄줄 샌다.

   프랑스인들은 어이없게도 앙코르 와트 사원 천장에 시멘트를 발랐다. 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 각국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위대한 유적지들이 현대인의 오만과 무지, 그리고 세월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유적지는 어떻게 건설됐을까. 현지인들은 천연덕스럽게 신들이 지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왕국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전염병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앙코르인들을 다 죽이고 떠났다는 학설도 있다.

   베트남과 라오스, 몽골, 태국의 잇단 침략에 수도를 옮겼다는 학설이 있지만 1백만 명의 대이동이라면 인접국가의 역사에도 나올 법한데 아직 어떠한 단서도 없다. 전염병이라면 유골이라도 남아있을 법한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밀림 속에 묻혀있던 앙코르 유적지는 16세기 이후 일부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해 발견됐지만, 처음에 유럽인들은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스의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유적지가 어떻게 동남아에 있을 수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앙코르 와트가 서구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1850년 에밀 부유보와 1860년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어 책이 나온 뒤였고, 그 때부터 앙코르 왕국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앙코르 유적지는 신이 만들어놓은 퍼즐이다. 다 쓰러진 사원 귀퉁이에 앉아서 멍하니 조각상을 보고 있거나 꼼꼼하게 자료집을 읽으며 해답을 찾으려 해도 문외한에겐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앙코르 와트가 주는 감동을 한 아름 안은 채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어느 한국인 배낭여행객 중에 한 사람이 이곳 앙코르 와트에 여행을 왔다가 앙코르 유적에 매료되어, 다시 시엠립에 와서 앙코르 와트 여행가이드로 나섰다고 한다. 능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내게  ‘유적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어느 여행가가 말했듯이 나 역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친구여 앙코르로 가라. 앙코르의 유물과 앙코르의 꿈이 있는 곳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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