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지 탐방

by 혜강(惠江) 2021. 10. 24.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지 탐방

 

조국 독립을 외치다 진 꽃, 아우내 벌판에 피다.

 

 

글·사진 남상학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중략) /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의 <유관순> 노래 한 구절 흥얼거리며 유관순(柳寬順, 1902.12.16.~1920.9.28) 열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날은 하늘도 유난하게 높고 푸르렀다. 유관순 열사 유적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넓게 퍼져 있다. 사적 제230호이다.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 의해 불타 없어진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1977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유관순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또, 유 열사의 오빠 관옥(寬玉)이 살던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축하였고, 3·1운동 당시 봉화지인 매봉에는 봉화대와 봉화탑을, 매봉 너머 탑원리에는 유관순 사우(祠宇,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를 건립하였다. 생가 옆에는 매봉교회를 지어 유 열사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다. 1986년 경역을 재정비하면서 사우를 확장, 개축하고 명칭을 추모각으로 바꾸었다. 또,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사적지 광장 내 시설물로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중심으로 광장, 동상, 추모각, 순국자추모각,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 열사의 거리가 있다. 또, 매봉산 내에 초혼묘가 있고, 사적지 광장에서 0.4㎞ 거리에 봉화탑이 있다.

 

  우리는 초혼묘 봉안 기념비(입구) → 광장(유관순 열사 동상) → 추모각 → 순국자추모각 → 생태 연못 →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 → 기념관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생가지로 이동하여 생가와 매봉산에 있는 초혼묘와 봉화탑을 탐방하였다.

 

 

 

 

1. 열사의 거리

 

  열사의 거리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277-3, 유관순 열사 사적지 진입로를 일컫는다. 이 거리에는 다양한 조형물 4점과 전시물을 설치하고, 벤치와 각종 식물을 두어 자연과 전시물이 조화되어 편안히 보고 즐길 수 있게 했다. 사적지를 막 들어서는 관람객들에게 열사의 숨결과 나라 사랑 정신을 자연스럽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2. 초혼묘 봉안 기념비(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오르면 광장 입구 우측에 있다. 이 기념비는 1920년 9월 28일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초혼묘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0년 4월 1일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석으로 건평 22.05㎡, 높이 4.2m이고, 비문은 김재홍이 썼다.

 

 

 

 

3. 유관순 열사 동상

 

  광장 우측에 세운 유관순 열사 동상은 3.1 만세운동의 상징이신 유관순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은 이종각 교수의 작품이다.

 

“한국의 딸 유관순은 우리 민족정기의 화신이다./ 일천구백십구 년 기미 삼월 일 일/ 어린 여학생의 몸으로 태극기를 높이더니/ 여섯 고을이 향응하고/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니/ 왜적의 총칼이 보이지 않아/ 아우내 장터가 피로 물들었다./ 왜병에게 잡힌 몸이 되었으나/ 자유를 굳게 주장하여/ 왜적의 재판을 거절하니/ 적의 법관도 크게 놀랐다./ 칠 년의 최고형을 받고/ 옥중에서도 용감히 투쟁하다가/ 마침내 피살되니/ 그때 나이 겨우 열여덟/ 아아 슬프다. 인간의 생에는 비록 짧으나/ 천상의 성녀로서 거룩한 그 정신은/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리로다.”

 

  동상 뒷면에는 추모 시가 새겨져 있는데 시는 유제한, 글씨는 인영선이 썼다.

 

 

 

 

4. 추모각

 

 추모각은 광장에서 계단을 올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태극기가 가득한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과 동상을 지나 추모각에 올랐다.추모각은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 신을 기리고, 열사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2년 건립되었다. 1986년 8월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하였고, 11월 19일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비와 함께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의 한식 목조 건물이며 주위에는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다.  추모각에 모셔진 영정은 윤여환 화백의 작품으로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곳에서 매년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9월 28일)에 맞춰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5. 순교자 추모각

 

순교자 추모각은 유관순 추모각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나온다. 순교자 추모각에는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의 순국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의 흔적은 순교자 추모각 외에도 헌병 주재소 터에 조성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6. 생태공원과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

 

  순교자 추모각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생태공원이다. 그리 크지 않지만, 연못이 있고 깔끔하게 단정되어 있다. 또 사적지 광장에서 0.2㎞ 거리에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이 있다. 순국자추모각 광장 아래 위치한 유관순 열사 기념공원은 파고라, 광장이 설치되어 휴식을 취하면서 사적지를 한눈에 둘러 볼 수 있는 공간이다.

 

 

 

 

7. 유관순 열사 기념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광장 좌측에 있다. 542.7㎡에 지상 1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졌다. 기념관은 전시실, 영상실, 체험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시실에는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 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 과정을 담은 매직 비전, 열사의 생애를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등 열사의 출생에서 순국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영상,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유관순 기념관에서 유관순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

 

  특히, 일제의 고문 도구인 벽관 체험을 통해 일제의 잔악성과 열사의 험난한 감옥 생활을 잠시라도 체험해 봄으로써 열사의 불꽃 같은 삶 속에 녹아있는 나라 사랑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다.

 

 

 

 

<유관순의 생애와 독립운동>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다.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 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났다. 그녀는 1916년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 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고,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 노예달 등은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덕수궁 뒤 이화학당 교문 앞에 이르러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 역(현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붙잡혔다. 경무 총감부에 구금되어 있던 중 학교 측의 교섭으로 풀려났다.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3월 13일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고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유관순은 아우내 장마당에 갈 때 옷 속에 자신이 만든 태극기들을 감추고 갔고,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지령리 감리교회 교사인 숙부 유중무와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앞장섰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30여 명이 크게 다치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갇히었고, 이곳에서 공주 영명 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공주재판소의 1심 재판에서 유관순은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며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대항하였다. 일본 재판관은 격분하였다.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고,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삼천리강산, 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라며 상고를 포기했다.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정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하고, 감옥 안에서 독립 만세를 선도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심한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옥중 감옥 운동으로 유관순은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일본 왕실인 이방자와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어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옥 당국은 중죄인이라고 하여 허리에 찔린 상처, 고문으로 파열된 방광도 치료해 주지 않고 버려두어 건강히 악화하였다.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장례식에는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몇 명만 참석이 허락된 가운데 쓸쓸히 진행되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1951년 순국의 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에 항거하다 18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사망한 3·1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8. 유관순 생가지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生家址)는 유관순 열사 사적관리소에서 1.3km 떨어진 병천면 용두리(338-1번지)에 있다. 봉화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초가집 본채와 부속 사(대지 714㎡)로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9. 매봉교회

 

  유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는 초가 담장으로 맞대어 있다. 매봉교회의 공식 이름은 ‘유관순기념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이다. 이름처럼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렸다. 이 만세운동은 매봉교회 성도들이 주도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당시 매봉교회를 이끌었던 유중무 전도사(유 열사의 작은아버지), 조인원 속장(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등이 매봉교회 성도였다. 일제는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운동의 본거지인 매봉교회를 세 번째로 불태웠다.

 

  현재 예배당은 1998년 교단사업으로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교회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하에 유관순 열사 전시관이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전시관은 코로나 상황으로 문이 닫혀 있었다.

 

 

 

 

10. 초혼묘

 

  유관순 열사의 초혼묘는 매봉산 자락에 있다. 1920년 9월 2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자,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었다.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다.

 

  이에 그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시도록 초혼묘를 매봉산 중턱에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 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비문이 적혀 있다.

 

 

 

 

11. 봉화지, 봉화탑

 

  봉화지는 초혼묘에서 400m 거리의 매봉산 정상에 있다. 생가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가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의거 전날 밤, 아우내 장날인 다음날(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하여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유관순 열사 봉화지에는 유관순 열사 봉화탑과 기념조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화강석 사각 기단 위 봉화대와 높이 5.6m 봉화탑은 1977년 10월 12일 건립되었다.

 

  “정의의 상징이 나라의 딸 유관순/ 그대 매봉에 올라 높이 들었던 봉화/ 여섯 고을 스물넷 산봉우리마다/ 내일을 약속하며 같이 타오른 봉화들/ 이 길로 가야 자유가 있고/ 이 길로 가야 평화가 있고/ 오직 이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애타게 일러준 거룩한 봉화였네/ 그대 손에 들렸던 그 정열의 봉화/ 민족의 끓는 피로써 기름을 삼았기에/ 악마의 풍우 속에서도 꺼질 리 없었고/ 오늘은 역사의 제단에 이리도 화사로이/ 무궁화 꽃송이처럼 피어오른 봉화라/ 영원히 겨레의 가슴 가슴에 타오르리라/ 타오르리라”

 

  봉화탑에는 이은상 시, 김기승 글씨로 ‘봉화탑 찬가’가 새겨져 있다. 봉화지에서 병천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아우내 장터 일대와 아우내 만세운동기념비(충청남도 기념물 제28호)가 있는 동산, 저 멀리 독립기념관 본관의 푸른 지붕까지 보였다. 1919년 3월 31일 밤, 소녀 유관순이 기도하며 올렸던 봉화는 이 일대를 독립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한 것이다.

 

 



 

12. 유관순 열사 추모 시비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정신과 넋을 추모하는 학생들의 글을 새긴 비가 유관순 열사 유적지 경내에서 매봉산 초혼묘를 잇는 사잇길을 중심으로 세워져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추모각 왼쪽 문으로 나서 매봉산 정상으로 향해 이가 낀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유관순 열사의 후배인 이화여고 학생들이 세운 시비(詩碑)들이 발을 멈추게 했다.

 

  “그대/ 꺾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이곳에 우뚝 섰다/ 아!/ 미치도록 그리운 조국의 독립으로/ 이 땅의 해맑은 웃음 이루려/ 씨 트여 흩날리나니” (이화여고 김희정)

 

  시를 음미하며 돌계단을 200m 오르면 유관순 열사 초혼묘가 나온다. 초혼묘는 유관순 열사 생가 옆길로 올라갈 수도 있다.

 

 

 

 

◎상세 정보

►주소

유관순 열사 유적지 및 기념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탑원리 252)

유관순 열사 생가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용두리 338-1)

►문의전화 : 유관순 열사 기념관 : 041-564-1223

►가는 길

·자가용 : 천안 시내에서 진천으로 가는 21번 국도를 따라 18km 정도 가면 아우내 장터이고, 이곳에서 진천 쪽으로 300m 지점에 있다.

·대중교통 : 천안역, 터미널에서 직행버스 운행(30분 소요, 493번 버스 이용) / 천안역, 터미널에서 시내버스 운행(50분 소요, 400번대 버스 이용)

►주차 시설 : 100대 수용(대형 40대, 소형 60대)

►관람 시간 : 여름철(3-10) 09:00~18:00, 겨울철(11-2) 09:00~17:00 (연중무휴)

►관람료, 주차료 : 없음

►행사 : 유관순 열사 추모제 : 매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사적지 / 아우내봉화제 : 매년 2월 말일, 유관순 열사 기념과 광장과 아우내 장터 일대

►주변 관광지

독립 기념관 6㎞ / 삼거리 공원 16㎞ /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비(사적지 광장에서 0.3㎞(5분 소요) /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 유관순 열사 동상(쌍용동 일봉산 사거리) / 조병옥 박사 생가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