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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금잔디 / 김소월

by 혜강(惠江) 2020. 2. 10.

 

 

 

 

금잔디

- 김소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신산천에도 금잔디에.


 
 
작품의 이해와 감상

 

  작자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명은 정식(廷湜). 호는 소월(素月)이다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생. 오산(五山)학교 중학부를 거쳐서 배재고보를 졸업하였고 도쿄상대[東京商大(동경상대)]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의 성적은 우수하였고, 그의 시재(詩才)도 당시 오산학교 선생이었던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에서 꽃피었다.


   이 시  자유시이지만 정형률이 중시된 형식이다. 대체로 344조의 음수율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민요조로 표현된 이 시에서 화자가 서 있는 곳은 무덤가이다. 그 무덤은 심심산천에 외따로 격리되어 있다. 이 공간의 격리성은 곧바로 정서적 거리감을 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 이승과 저승과의 단절된 거리는 합치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을 구체화한다. 화자는 가신 임 바로 곁(무덤가)에 서 있지만 가신 임과는 절연(絶緣)되어 있다. 그 절연감을 시화한 것이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봄은 생명의 소생을 의미한다. 버드나무 실가지 끝에 봄이 찾아와 재생의 약동이 시작되는데, 가신 임은 결코 살아올 수 없다는 절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4행의 '붙는 불'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보면, 짙게 퍼져 가는 풀빛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왕성한 봄의 생명력과 불의 활력은 이미지 면에서 교차한다. 임이 누워 있는 바로 그 곳에 그 활력과 생명으로 산천은 소생되어 가는데 임은 부재하여 재현할 수 없음을 대비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봄이 오고, 봄빛이 오고, 봄날이 오는 점층적 소생의 진행을 반복하면서 읊조리는 가운데 화자의 심정이 드러난다. 그것은 결국 임이 되살아올 수 없다는 절대 절망감의 표출이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있어서의 ''의 역할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독특한 운율미와 감탄적인 탄력이 배려된 표현이다. 소월은 그의 시의 리듬을 위해 상당한 배려를 한 시인이었다. 이것은 김억에 의해 연마되기 시작한 민요조 서정시가 소월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제 관계의 두 시인은 이상하게도 민요조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즉 민요 시인일 수 없었던 김억은 민요 시인을 자처했고, 생래(生來)의 민요 시인이었던 소월은 자기를 민요 시인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김억의 파탄, 소월의 한계가 스스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김소월의 시에서 임의 죽음은 부활을 예비하는 죽음도 아니고, 임의 떠남은 돌아올 것을 준비하게 하는 떠남도 아니다. 소월은 임의 죽음 그 자체, 임의 떠남 그 자체를 노래하였기에 그의 시에서 임은 현재나 미래의 임이 아니라 항상 과거 속의 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 작품에서도 소월은 금잔디를 바라보며 과거 속의 임을 그리워하거나 돌아오지 못할 임을 체념으로 이겨내려는 몸부림만을 보여 줄 뿐이다.

  만해 한용운 역시 김소월 시와 마찬가지로 '' 과의 '이별' 을 가장 중요한 시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그러한 두 시인에게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과의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과의 '이별'은 어쩔수 없이 강요된 것으로, 그 이별의 상태가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주어 지지 않는다. <초혼(招魂)> 같은 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김소월에게 있어서 ''은 항상 과거의 존재, '' 와 근원적으로 합일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만해에게 있어서 이별'은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이별' 은 외부에 있어서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과 만나기 의해서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의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방법적 계기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소월의 시에서는 억누를 길 없는 비애와 절망을 안으로 삭이는 한의 정서가 강조되는 반면, 만해의 시에서는 이별로 인한 비애와 슬픔이 새로운 만남의 대한 기대와 예견에 의해 극복되어 가는 모습이 강조된다.

 


 <출처>  일교시닷컴 (www.1gyos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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