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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문화일반

인왕산 기슭에 살았던 화가 김명국과 정선

by 혜강(惠江) 2019. 12. 10.

 

인왕산 기슭에 살았던 화가 김명국과 정선

- 그때 인왕산에는 시대를 초월한 화가들이 살았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7세기 인왕산 기슭에 살던 천재 화가 취옹 김명국
술에 취해 붓을 들면 '귀신이 그린 듯한' 그림…

통신사 따라간 일본에서 울고 싶을 정도로 인기
천한 신분… 사후 행적 불명, 뒷모습 그린 자화상에는 "내 흩어진 혼은 누가…"

두 세대 뒤 살았던 인왕산 화가 겸재 정선…

조선의 진경 산수 그려 영조가 '호(號)' 부르며 아껴
사대에 찌든 사대부는 겸재 이후 진경 산수 버리고 중국 이상향으로 회귀
시대정신에 거역했던 자유로운 두 영혼



취한 늙은이 김명국

 서울 인왕산에는 화가들이 살았다. 그들 가운데 김명국(金明國)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쯤 태어나 국립 화원인 도화서 직원으로 살다가 아무도 몰래 죽었다.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인(中人)이었다.


 그림을 잘 그려도 너무 잘 그렸다. 사람들은 '신품(神品)'이라고 했다. 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이며(生知也) 그래서 다른 사람은 배울 수 없다(不可學也)는 뜻이다.(남태응·1687∼1740, '청죽화사') 남태응은 한술 더 떠서, '김명국은 그림 속에 있는 귀신이다(金明國其畵中之鬼神乎)'라고 했다. 그 재주로 김명국은 도화서에서 궁궐 건물 단청을 새로 꾸미고, 병풍을 그리고 대감들 초상화를 그렸다.

 얼마나 잘 그렸느냐. 인조가 비단 빗첩에 그림을 그리라 명했다. 열흘 뒤 돌아온 빗첩에 그림이 없는지라, 인조가 대로했다. 김명국은 "틀림없이 그림을 그렸사오니, 곧 알게 되리이다"라 답했다. 공주가 빗을 꺼내 머리를 빗는데, 이 두 마리가 빗첩 끝에 앉아 있었다. 손톱으로 눌러도 죽지 않아 보니 그게 그림이었다(視之畫也).(성해응, '연경재전집'57, 1840)

 

 1636년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는 일본인에게 '달마도'를 그려줬다. 날랜 붓질에 순식간에 달마가 눈을 뜨자 그림을 청하는 일본인이 밤낮으로 몰려들었다. 김명국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심지어 울려고까지 했다.(김세렴, '해사록' 1636년 11월 14일)

 


일본에서 울어버린 가난한 화가



 귀신같은 솜씨에, 일본 측은 "다음 번 통신사행에 반드시 김명국 같은 화가를 다시 보내 달라"고 주문했다. 1643년 사행에도 김명국은 밤낮으로 울 정도로 시달렸다. 울려고 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술을 마실 시간이 없었다. 김명국은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호도 '취옹(醉翁)', 취한 늙은이였다. 연담(蓮潭)이라는 고상한 호도 있었지만 취옹이 더 어울린다. 사람들은 '주광(酒狂)'이라고도 했다. 그에게 그림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큰 독에 술을 담아 가야 했다. 사대부 집에 불려갈 때도 술로 흡족하게 된 뒤에라야 기꺼이 붓을 들었다.(정내교, '완암집', '화사 김명국 전', 1765) 말 안 통하는 일본인들이 줄 서서 밤낮으로 맨정신으로 그림을 요구하니, 술이 곧 뮤즈였던 화가 울음보가 안 터지겠는가.

 

 

조선통신사를 수행한 김명국이 일본인에게 그려준 달마도(오른쪽).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 ‘울고 싶을 정도’였다. 왼쪽은 그가 그린 자화상 ‘은사도(隱士圖)’. 상복을 입고 뒤돌아선 사내 머리 위에 김명국은 이렇게 적어넣었다. ‘무에서 능히 유를 만드는데, 그림으로 내 모습 그리면 그만이지 말이 더 필요하랴 세상에 글 쓰는 자들 많으나 이미 흩어진 내 혼은 누가 다시 부르리(將無能作有 畵貌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국립중앙박물관

 


 둘째, 돈을 벌 시간이 없었다. 도화서 직원은 대개 계약직이었다. 정기적인 월봉이 아니라 일감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가난한 환쟁이'들이었다. 그래서 김명국은 통신사를 따라갈 때 인삼을 몰래 숨겨가 팔았다. 1636년 기록에는 '김명국의 인삼 상자가 또 발각돼 밉살스러웠다'고 적혀 있다.(임광, '병자일본일기' 1636년 11월 18일) '또'라는 말은, 상습범이라는 뜻이다.

 1662년 일본은 김명국을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김명국이 늙고 병들어 못 간다'고 거부했지만 일본에서는 '모든 경비를 다 대겠다'며 거듭 김명국을 청했다. 그리고 조건을 달았다. '김명국이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그리게 할 뿐 아니라 간혹 술에 취하여 붓을 놀리는 데 힘을 다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반드시 보는 곳에서 그리게 해야 한다.' 결국 조정에서는 김명국에게 말을 주어서 밤낮없이 내려 보내 그림을 그리게 했다.('왜인구청등록' 1662년 2월 26일~3월 16일) 상사들 눈이 없어야 밀수질도 하는데, 틀림없이 그는 또 붓을 놀리며 울었을 것이다.

정치 거물 송시열과 김명국

 남 잘못 지적질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노론 거두 송시열 또한 김명국을 두고 보지 않았다. 1659년 어느 날 이조판서 겸 사림파의 최고직인 성균관 좨주(祭酒) 송시열이 당시 대사간인 유계(兪棨)에게 편지를 쓴다. '감토전 행랑 뒤에 사는 화원 김명국은 아비가 죽어 장사를 하기도 전에 아내를 맞이한 자이니, 사헌부에 고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송자대전'33, '유무중에게 보냄')


 이 패륜아를 처벌하라는 것이다. 국왕을 좌지우지하던 천하의 송시열이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장에게 환쟁이 하나를 처벌하라고 편지를 보내는, 그런 황당한 시대에 김명국이 살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그림 주인공은 이상향과 은둔한 도사들이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도사, 당나귀를 타고 먼 길 떠나는 선비,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단번에 붓을 쓸어 완성하고(一筆掃盡·일필소진) 그는 죽었다.

 어디에서 언제 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인이었으니까. 사대부는 그의 그림을 탐했지 그를 탐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김명국은 그림 기술자에 불과했다. 대신 김명국은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상복 입고 길 떠나는 한 사내 뒷모습을 그렸다. 제목은 '은사도(隱士圖)'다. 그 사내 머리 위에 그가 적어놓았다. '세상에 글 쓰는 자들 많으나 이미 흩어진 내 혼은 누가 다시 부르리(將無能作有 畵貌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영조가 사랑한 화가 겸재

 김명국이 죽은 뒤 또 다른 걸출한 화가 하나가 인왕산 골짜기에 살다가 죽었다. 이름은 정선(1676~1759)이다. 상놈은 아니었지만, 그리 명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집 주변에 노론 권세가가 많이 살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동 김씨 가문 김창집이었다. 그때로 치면 늘그막인 40대에 정선이 그에게 가서 이리 말한다. "취직 좀 시켜주시오."


 과거에 응시할 경제적 여유는커녕 책 살 돈도 없었던 그에게 이웃 세도가는 훌륭한 스폰서였다. 김창집 또한 정선 그림을 무척 좋아한지라, 자기 세도를 이용해 정선을 관상감에 취직시켜 주었다. 스폰서는 또 있었다. 영조다.

 

 

1751년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구름 걷힌 날, 자기가 살던 인왕산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다. 상상 속 이상향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이 화풍을 ‘진경산수’ ‘실경산수’라 한다. 망한 나라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횡행하던 그 시대에 정선이 시도한 진경산수는 매우 반시대적이었다. 정선보다 먼저 인왕산에 살았던 또 다른 화가 김명국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붓을 들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다. /삼성미술관 리움

 

 영조 또한 정선의 그림을 좋아했다. 과거에 합격하지도 않고 학문에 뛰어나지도 않은 이 화가를 영조는 끝까지 지원해주었다. 지방 현감도 세 차례나 시켜주었다. 세자 때부터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이 화가를 영조는 이름 대신 꼬박꼬박 겸재라 호를 부르며(不名公而稱其號) 가까이했다.(조영석, '관아재고' 4, '애사(哀辭)')

 그의 그림은 근졸(謹拙)하다. 화려하지 않고 질박하다. 상상 속 장소 대신 눈앞 개울과 앞산을 그린다. 들로 산으로 나가 경치를 보이는 대로 그린다. 그 사실적인 스케치에 보일 듯 말 듯 기교가 섞여 들어가, 많은 사람이 '조선 진경산수'라 부르는 독특한 화풍이 창조됐다. 저 인왕산을 보라. 대한민국 국민이 하늘을 보면 걸쳐 있는 그 산이 그림에 들어가 있다. 1751년 늦여름에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구름 걷힌 인왕산 그림')'가 그대로 하늘에 그려져 있다. 그 그림이 내뿜는 기개와 실력이 학문에 능하지 못했던 한미한 그를 권세가들과 당당하게 교류하는 인사로 만들어놓았다. 나이 마흔에 무시험으로 미관말직이 된 화가는 종2품 가선대부까지 오른 뒤 여든두 살에 죽었다.



비겁한 사대의 시대



 취한 늙은이 김명국이 일본으로 가던 1636년은 불우한 해였다. 그해 가을 김명국이 통신사행 공식 화가로 일본으로 떠나고 넉 달 뒤 전쟁이 터졌다. 병자호란이다. 그해 음력 11월 홍문관 부교리 윤집은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고, 한 달 뒤 남한산성에 갇힌 관료 무리는 홍타이지가 쏴대는 대포에 겁에 질려 40여일 만에 항복했다. 항복하기까지 그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인사할 시간'이라며 북서쪽 북경을 향해 절을 했다. '망궐례(望闕禮)'라고 한다.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을 치르고 한 달이 지났다. 1637년 음력 2월 28일 조정에서 국경 수비대로 보내는 문서에 명나라 연호를 적었다가 청나라 관리에게 발각됐다. 이후 조선은 공식문서에는 두 번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현재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 꽂혀 있는 큼직한 비석에는 모조리 청나라가 아닌 명나라 연호가 새겨져 있다. 죽어도 명나라를 잊지 않겠다는 비겁한 시대정신이 몰래 새겨져 있는 것이다.

 


푸른 인왕산과 시대정신



 그 엄혹하고 황당한 사대의 시대에 한 화가는 술에 취해 자기 세계로 틈입했고, 한 화가는 인왕산을 그렸다. 누가 보더라도 인왕산이고 누가 보더라도 금강산이며 누가 보더라도 박연폭포임이 분명한 산과 폭포를 붓으로 잡아서 종이에 눌러 박았다. 취옹과 겸재는 시대정신을 거역한 예인이었다.


 인왕산을 인왕산답게 그린 겸재 화풍을 지금 사람들은 '진경산수'라 한다. 그러나 사대(事大)에 대한 지식인과 권력자들 욕망이 너무나도 크다 보니, 겸재가 죽고 속칭 진경산수의 시대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사대부 사회에는 다시 중국의 선경(仙境)과 이상향을 그린 남종화와 문인화가 유행했고, 겸재의 화풍은 아주 훗날 근대에 이르러서야 부활했다.

 대한민국 공화국 시대가 왔다. 시대도 바뀌었고, 시대정신도 바뀌었다. 인왕산은 늘 푸르다. 사계 절 그 희한한 골계미를 자랑하며 골속골속 소나무와 아카시아 숲에서 피톤치드를 내뿜는다. 불우한 양반과 천대받는 중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오로지 실력 하나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를 기대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시대에, 비석 뒤편에 숨겨놓은 정신 나간 관념을 지킬 것인가. 취옹 김명국의 이상향을 그릴 것인가. 아니면 겸재 정선의 현실계에 발을 디딜 것인가.

 



<출처> 2019. 12. 10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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