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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0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 인터뷰

by 혜강(惠江) 2019. 12. 10.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 인터뷰

창립 60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 그는 오늘도 찢어진 500원 지폐를 꺼내본다 

 

 

조선일보 전수용 기자

 

 

老기업가의 충언 - 한국경제 3년동안 내리막길… 누군가 총대 메고 새로 무장해야
돈 벌면 숨기려고 하는 세상, 우리경제도 햇볕정책 필요해

대한민국과 선진국 비교하면… - 13일 더 노는데 임금은 30% 비싸
선진국, 일할 땐 일하고 놀땐 놀아… 우린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경기도 부천 영안모자 본사에 들어서자 백성학(79) 회장은 1959년 청계천 노점을 재현해놓은 영안역사기록관으로 이끌었다. 일제 재봉틀과 다리미, 영업감찰(사업자등록증)과 1960년대 영수증, 금전출납부까지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건 60년 된 (모자) 나무 형틀이야. 대단하지. 청계천에서 광목으로 바람을 막고, 미군 '갑빠'(천막덮개)를 덮어 비를 피했어. 장난 같아 보여도 그땐 제법 그럴싸한 가게였어. 이게 시작이야."

 만석꾼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전쟁통에 고아가 돼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청년 백성학이 청계천에 모자 노점을 차린 건 1959년 2월 5일 19세 때였다. 전 재산 18만환(당시 중절모 70개 가격)을 투자해 만든 노점은 이제 모자 1억개를 만들어 130여국에 판매하는 세계 1등 회사가 됐다. 상용차·지게차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혔고, 올해 창립 60년을 맞았다. 백 회장은 최근 영안모자 60주년 기념 화보집도 펴냈다.

 


◇'모자왕' 백성학, 영안모자 60년



 백 회장은 "한국에 60년, 100년 된 회사는 많지만, 창업자가 60년을 맞는 건 내가 처음일 것"이라며 "열아홉에 창업해 지금 팔십이 됐는데 장사꾼이 돈 욕심 없다는 게 잘 안 믿기겠지만 난 돈 욕심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60년 동안 숱한 위기를 넘겼고,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지만 위기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는 경영이 60년을 이어온 힘이라고 했다. 그는 지갑속에서 세 조각 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였다. "이걸 왜 갖고 있느냐"고 했더니 "(1962년) 화폐개혁 때 바꾼 건데 그때 (직원들) 밥을 못 먹여 애먹었거든. 이걸 가지고 있으면 딴짓(부정한 행동)할 생각을 못 해"라고 했다. 

 

 

회사 창립 60년이 된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경기도 부천 본사 2층 영안역사기록관에 전시된 영안모자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안모자점은 백 회장이 1959년 청계천 4가에 세운 노점 형태 가게로 영안모자의 출발이었다. /김연정 객원기자

 

 

"개업하고 14개월 뒤에 4·19(혁명)가 났지. 1년 지나니 5·16이 터진 거야. 중절모를 못 쓰게 해. 1962년에 화폐개혁(10환(圜)→1원으로 변경)을 해. 돈을 못 바꿔서 야단났지. 그때 재고 모자를 두 배 값 받고 팔았어. 현금이 엄청나게 들어와 마대에 담아 캐비닛에 넣어놨어. 얼마 지나니 다 바꿔줬어. 다들 안 된다고 할 때 역발상으로 간 거야. 지금은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게 너무 많아."

 영안모자는 전 세계에 65개 생산·판매 법인을 두고, 15억8400만달러(1조8800억원)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기업이 됐다. 백 회장은 "이렇게 세계화된 중소기업은 우리(영안모자)뿐일 것"이라고 했다.



◇"더 벌겠다고 남 죽이는 장사 안 한다"

 

 

       

백성학 회장이 지갑에 넣고 다니는 찢어진 500원권 지폐. 백 회장은 “과거 회사가 어려울 때를 기억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항상 간직한다”고 했다. /전수용 기자
 
 

  백 회장은 1960년대 처음으로 모자를 수출하면서 한국 시장이 좁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 시장은 너희가 하고 난 수출하겠다면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성공하고 나서도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엔 모자 공장, 매장이 하나도 없다. 백 회장은 "내가 여기(한국)서 모자 팔면 모자로 먹고사는 사람 50%는 죽여야 한다"며 "더 벌겠다고 남 죽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했다.

 1990년대 세계 모자 시장 성장의 한계를 깨달은 백 회장은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파산한 대우버스와 100년 역사를 가진 미국 지게차 업체 클라크를 2003년 인수했고, 수년 만에 정상적 회사로 바꿔놨다. 영안모자 계열사 전체에서 모자 사업 매출 비율은 16% 정도이고, 나머지는 상용차·지게차다.

 "나는 비참한 놈이야. 별의별 일 다 겪었어. 그래도 항상 긍정적이야. 후회, 그런 말 안 해. 지나가면 다 끝이야. 인생은 어차피 올라가고 내려가는 거야."



◇"한국 제조업 문제 심각해"

                  

 

 

 

  백 회장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주의자다. 여든 평생 그런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경제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1년 경제를 망가뜨리면 회복하는 데 2년이 걸려. 5년 망가지면 10년이야. 지난 3년 이미 꼬라박았어. 어마어마하게 (기업이) 해외로 튀었어. 누군가 총대 메고 경제 무장을 새로 해야 해. 경제가 많이 꼬였어. 이러면 희망이 없어."

 백 회장은 '경제 햇볕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돈을 벌면 숨기려 한다. (정부가 정책으로) 세게 잡기만 하면 돈은 음성적으로 돌아다니고, 햇볕을 비추면 돈이 나와 경제가 돌아간다"고 했다.

 백 회장은 "한국 제조업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미국·독일·캐나다 같은 선진국, 중진국(멕시코), 후진국(스리랑카·방글라데시 등)까지 영안모자가 운영 중인 사업체별 인건비·휴무일을 비교 분석한 자료를 꺼내 보였다. 그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10~13일 더 놀고, 생산직 임금은 25~30% 비싼데도 생산력은 80~90%를 넘지 못한다"고 했다. 지게차 계열사인 클라크의 창원 공장 생산직 인건비(2018년)는 연간 7만5268달러로 미국 판매·생산법인 근로자 인건비(4만9942달러)보다 높다. 독일도 4만9129달러로 한국의 65% 수준이고, 중국은 20%다. 반면, 근무 일수는 한국이 242일로 중국(250일) 미국(253일), 독일(250일)보다 적었다.

  영안모자의 상용차·지게차 계열사의 국내 공장들은 인건비 탓에 적자를 내고 있어 해외 법인의 수익으로 메우고 있다고 했다. 백 회장은 "무조건 오래 일하자는 게 아니야. 선진국은 일할 땐 하고, 놀 땐 놀아. 우린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모른 채 흘러간다"면서 "기가 막힌다"고 했다. 백 회장은 팔순이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6.5일을 일한다.

  인터뷰는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백 회장은 마지막으로 신의(信義)를 저버리지 않는 상생(相生)과 나눔 경영, 해외로 나가는 세계화 경영, 한국 제조업의 생태계를 걱정하는 조언을 했다. "우린 영토가 많이 좁아. 이젠 총이랑 미사일로는 땅을 못 빼앗지. 우리(기업인)가 해외로 가서 사업하면 돼. 근데 이익 나면 혼자 먹으면 안 돼. 돈이 생기면 못사는 나라와 3분의 1씩 나눠야 해. 영화관도 시장(마트)도, 구멍가게(편의점)도 다 큰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러면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해. 부자라고 하루 열끼 먹는 거 아니잖아 골고루 잘살자고…."

 

 

<출처> 2019. 12. 10 / 조선일보  

 

 

<참고> 그는 숭의학원을 인수, 교육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숭의학원은 현재 숭의유치원, 숭의초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교를 운영 중이다. (남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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