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절경 피오르
'페르 귄트'선율에 홀리듯 '빙하 협곡'에 빠지다.
베르겐·로엔·예이랑에르 = 글·사진 박준우 기자
▲4월 28일 노르웨이 예이랑에르를 출발한 유람선이 양옆에 폭포가 펼쳐진 피오르를 따라 운항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폭포가 ‘일곱 자매의 폭포’다.
‘페르 귄트’로 유명한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태어나 베르겐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집필한 동명의 연극에 삽입될 연주용 음악으로 작곡한 페르 귄트는 그리그와 입센 모두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결국 빗나갔습니다. 이후 ‘편집본’ 격인 ‘페르 귄트 모음곡’이 따로 만들어질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노르웨이인들만 좋아할 거야”라는 그리그의 예상과 달리 페르 귄트 모음곡의 ‘아침의 기분’ ‘오제의 죽음’ ‘마왕의 궁정에서’ ‘솔베이의 노래’ 등은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페르 귄트 모음곡을 들으며 베르겐 시내를 산책하다 보면 그리그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생전 그가 살았던 집이자 현재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는 트롤하우젠을 비롯해 그리그의 음악적 선배이자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올레 불, 그리그가 존경했던 극작가 루드비그 홀베르 등의 동상이 시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노르웨이 국민주의를 대표하는 그리그는 고국의 자연환경에 대한 애정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그는 1886년 자국의 산과 피오르를 둘러보고 ‘산과 피오르 여행의 추억’을 작곡합니다. 빙하기 때 형성된 빙하가 산 아래로 밀려가면서 대지를 침식해 만들어진 지형인 ‘피오르’는 노르웨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해안선입니다. 이 톱날 같은 해안선 덕분에 노르웨이는 캐나다에 이어 세계 제2위 길이의 해안선을 자랑합니다.
피오르를 사랑했던 그리그는 사망한 후에도 화장된 뒤 그 유해를 피오르 절벽에 안장했습니다. 베르겐에서 시작해 북쪽의 피오르 명승지를 둘러보는 여행은, 세계자연유산에 포함되는 절경을 관찰하는 것과 함께, 그리그의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피오르의 시작, 베르겐
그리그의 출생지이자 노르웨이 제2 도시인 베르겐은 피오르 관광의 시발점이자 고대 노르웨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1070년 노르웨이의 ‘평화왕’ 올라프가 건설한 이 도시는 13세기 한자동맹의 특혜도시가 되며 부흥하기 시작했다. 북해와 발트해 주변의 청어와 대구잡이의 근거지로 각광 받은 베르겐은 유럽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찬 장소가 됐다. 그 흔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뤼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무역상과 선원들이 세운 상관(kantor)과 생선류 가공시설들의 밀집지역인 브뤼겐은 유명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배경인 아렌델 왕국 마을의 모티브가 된 형형색색의 목조 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목조 건물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왕국을 뛰어다니던 애니메이션 속의 안나와 마주칠 것 같다. 1702년 대화재로 한 차례 소실됐다 복원됐지만 서로 지붕을 맞댄 오래된 목조 건물들은 수백 년 전의 향수와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보고 싶다면 등산열차(푸니쿨라)를 타고 해발 320m 플뢰엔 산의 전망대로 올라가 보자. 아침의 등산 열차는 전망대 옆에 위치한 유치원에 등원하는 어린이들과 관광객이 뒤섞여 시끌벅적하다. 부모들이 아이들만 열차에 태운 채 돌아서도 함께 열차를 탄 주민들이나 어른들이 이동 시간 동안 아이들을 보살펴 준다. 산꼭대기 전망대에 열차가 멈추면 베르겐 항구와 시내가 환히 내려다보인다.
피오르 안에 위치해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오가는 배를 한참 동안 바라보면 고향을 떠났던 페르 귄트를 기다리던 솔베이처럼 반가운 누군가가 해안선 저편에서 배를 타고 항구로 들어올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전망대까지 도보로 걸어서 오르는 데는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잘 닦인 도로가 전망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시간이 허락된다면 노르웨이의 숲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지난 4월 25일 노르웨이 베르겐의 플뢰엔 산에서 바라본 항구와 시가지. 피오르 안에 자리 잡은 도시 베르겐 항구는 남북에 위치한 피오르로 떠나는 페리와 크루즈선으로 늘 붐빈다.
베르겐서 시작된 '빙하천국', 아찔한 풍광에 압도
#드래건 전설이 살아 숨쉬는 송네피오르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 R R 톨킨 이래 세계 판타지 소설의 상당 부분은 북유럽 신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했다. 그중에서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일각에선 숭배되기도 하고, 때로는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존재가 동양 신화의 ‘용’에 해당하는 ‘드래건’이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203㎞) 가장 깊은(1300m) 피오르로 꼽히는 송네피오르 곳곳엔 드래건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봄철 오후 4시 30분쯤 운행되는 페리선 노를레 호를 타고 베르겐 항을 출발해 송네피오르로 진입할 즈음이면 주변이 어두워진다. 구름과 물안개로 주변 경관이 뚜렷하진 않아도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설산과 피오르는 또렷이 보이는 풍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양옆으로 펼쳐진 기암절벽과 일일이 이름조차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산재한 폭포들, 그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피오르를 빠르게 거슬러 오르다 보면 정말 드래건이 살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송네피오르 인근 마을인 스탈헤임에는 ‘드래건의 집’이란 뜻의 드라케히어라는 굴이 있다. 인근에는 유명 미술가 한스 달이 지은 목조 주택 ‘드래건 하우스’ 등의 지붕엔 용 머리를 형상화한 장식이 달려 있다.
황제를 용에 비유하는 동양적인 관점을 송네피오르에 적용한다면, 이곳에 깃든 드래건은 1차 세계대전 중에도 휴가를 내 이곳을 찾았던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일 것이다. 송네피오르의 휴양마을인 발레스트란에는 빌헬름 2세가 이용했던 유서 깊은 크비크네스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호텔 곳곳의 오래된 가구나 미술품 등에는 빌헬름 2세의 서명이 남아 있다. 빌헬름 2세는 발레스트란 인근의 바이킹 전설들을 기념해 직접 동상들이나 기념물을 세우기도 했다. 앞으로는 피오르의 절경이, 뒤로는 눈 덮인 설산이 만들어내는 기막힌 경관 때문에 빌헬름 2세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도 영감을 얻기 위해 이 작은 도시를 찾았다. 크비크네스 호텔에는 이들이 그린 풍경화가 여럿 남아 있다.
송네피오르와 연결된 작은 피오르인 네뢰위피오르는 세계에서 가장 좁은 피오르로 알려져 있다. 발레스트란에서 출발하는 모터보트(RIB)를 타고 네뢰위피오르를 둘러보다 보면 피오르 한쪽에 모여 있는 바다표범들이 눈에 띈다. 모터보트 가이드인 토르 씨에 따르면 얼마 전엔 범고래가 출몰했을 정도로 다양한 해양 포유류가 피오르를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생태종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전기로 움직이는 유람선 ‘퓨처 오브 피오르’ 호가 새로운 피오르 탐방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다. 당국은 향후 피오르를 오가는 유람선들을 모두 전기동력으로 교체한다는 계획이다.
네뢰위피오르의 끝자락 마을인 구드방엔에는 바이킹 체험마을이 있는데, 배 수리나 당시의 활쏘기와 도끼 던지기를 체험할 수 있다. 바이킹 시대 대장간도 둘러보고 바이킹 방식으로 제조된 기념품들을 살 수도 있다.
#빙하와 피오르의 절묘한 조화, 노르피오르
송네피오르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또 다른 피오르인 노르피오르를 접하게 된다. 아름다운 해안선, 우뚝 솟은 산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큰 빙하인 요스테달 빙하,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호수인 호르닌달스바트네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또한 노르피오르 지역은 오랜 세월 지속돼온 민속 음악, 예술 및 공예품의 전통이 잘 보존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온달스네스의 한 선착장에서 소년들이 롬스달피오르 안으로 다이빙을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위쪽 사진부터)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1차 세계대전 와중에도 휴가 온 곳으로 유명한 발레스트란의 크비크네스 호텔 전경. 예이랑에르 플뤼달스유베의 절벽에 걸터앉은 관광객들이 풍광을 즐기고 있는 모습. |
2017년 5월 20일 개장한 대형 케이블카인 로엔 스카이리프트는 노르피오르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로엔 스카이리프트를 타면 노르피오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호벤 산 정상까지 5분 만에 이동할 수 있다. 정상에서 보는 해 질 무렵의 노르피오르는 구름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과 어우러지며 절경을 이룬다. 정상에 있는 레스토랑에선 환상적인 전망과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스카이리프트 대신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아 발목까지 빠지는 정상을 하이킹으로 오르는 것도 호벤 산 투어의 묘미다. 노르피오르 인근 마을인 로엔에는 남동쪽에 로바넷 호수와 오랜 역사의 로엔 교회, 1884년 설립된 알렉산드라 호텔 등이 있다. 노르피오르에 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가 요스테달의 지류인 브릭스달 빙하다. 로엔에서 30분 정도를 달려 브릭스달 빙하의 입구에 있는 전기차 승차장에 도착하자 한쪽에는 거대한 뵐레폭포가, 다른 한쪽에선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이 흐르는 브릭스달 강을 마주하게 된다. 전기차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의 푸른 눈’으로 불리는 브릭스달 빙하가 조금씩 감춰뒀던 자태를 드러낸다. 두 산의 골짜기 사이를 꽉 메운 모습이 빙하가 혀를 빼꼼 내민 것 같다 해서 ‘빙하의 혀’라고 불린다. 하얗다 못해 푸른 기운까지 감도는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로 형성된 브릭스달 호수는 비취색을 띠면서도 그 안이 투명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녹아내린 빙하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셔보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피오르의 여왕 예이랑에르, 플뤼달스유베에서 ‘인생샷’을!
헬레쉴트에서 유람선을 타고 예이랑에르피오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곱 자매의 폭포’에 이르자 폭포 아랫부분에 작은 무지개가 생기며 관람객들을 반겼다. 일곱 자매가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폭포 맞은편에는 이들에게 청혼하는 듯한 모습의 ‘구혼자 폭포’가 자신의 정열을 거센 물줄기로 내뿜고 있다. 일곱 자매에게 청혼을 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젊은이가 비탄에 빠져 폭포로 변했다는 전설은 자연과 하나가 돼 절경을 더욱 빛내고 있었다. 예이랑에르피오르에는 이들 외에도 ‘신부의 베일’ 폭포 등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폭포가 산재해 있다.
대부분의 피오르가 그렇지만, 예이랑에르피오르의 폭포와 기암절벽은 그 어느 지역보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전기차를 타고 산 뒤편으로 난 트롤스티엔(요정의 길)을 달리다 보면 사진을 찍기 좋은 명소 플뤼달스유베에 다다른다. 피오르 관광상품 개발에 사재를 털어 지원을 해왔던 소피아 노르웨이 왕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기념비 역할을 겸하는 ‘여왕의 의자’에 앉아 보면 예이랑에르 시 안쪽의 선착장에서부터 ‘일곱자매’의 폭포까지 피오르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곳에서 조금 아래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더없이 좋은 ‘인증샷’을 남길만한 아찔한 절벽이 나온다. 절벽에 걸터앉아 아래를 바라보면 다리도 후들거리고 심한 현기증까지 느끼지만, 그림 같은 풍경화 속에 들어간 답사자의 사진은 작은 ‘모험’을 충분히 보상받는다. 이 장엄한 풍경으로 예이랑에르피오르는 2005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다만 산 중턱이라 바람이 꽤 센 데다 특별한 안전장치가 돼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다소간의 주의는 필요하다. 트롤스티엔을 더 오르면 해발 1500m의 달스바나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스카이워크 등을 통해 더 높은 고도에서 예이랑에르의 피오르와 인근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불행히도 기자가 방문했을 땐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도로가 통제되고 전망대 운영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트롤스티엔의 반대편, 예이랑에르에서 에이델스달 방향의 63번 도로로 전기차를 몰고 가면, 해발 620m의 외르네스베엔(독수리의 길) 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근처에 서식하는 독수리들이 이 전망대 부근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야르(울타리) 폭포와 600m 떨어져 있다. 일곱 자매의 폭포와 예이랑에르 시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온달스네스의 산 축제
예이랑에르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온달스네스는 일견 조용한 노르웨이의 시골 도시처럼 보이지만, 매년 여름철이 되면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을 상당히 많이 끌어들인다. 오는 7월 7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노르웨이 마운틴 페스티벌에선 암벽등반과 하이킹, 가족 등반과 청소년 캠프 등 다양한 산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축제 전에도 하이킹이나 암벽 등반, 실내 등반 등의 각종 산악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암벽을 오르면서 아래로 보이는 노르웨이 전원 풍경은 또 다른 그림이다. 숙련된 가이드가 동반해 초보자들도 안전한 등반을 보장한다. 모든 산이 그렇듯 평소 산을 타지 않는 초보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다간 깎아지른 듯한 급경사 절벽에 고생할 수 있다.
■ ‘피오르 여행’ 배 운임
노르웨이 송네피오르를 관통하는 노를레 호는 평일과 일요일 오후 4시 30분 베르겐 항을 출발해 오후 7시쯤 피오르의 입구에 해당하는 라비크, 8시 30분쯤 발레스트란, 오후 9시 20분쯤 종점인 송달에 도착한다.
토요일엔 출발시간이 오후 2시 15분으로 앞당겨지고, 도착시간도 그만큼 당겨진다. 돌아오는 배는 평일과 토요일 오전 7시 5분 송달을 출발해 발레스트란과 라비크 등을 거쳐 오전 11시 50분쯤 베르겐으로 귀환한다.
귀환 편은 일요일의 경우에만 오후 3시 40분에 송달을 출발해 오후 8시 15분 베르겐에 입항한다. 편도 운임은 오전 출발은 740크로네(약 9만9000원), 오후 출발은 199크로네(2만6000원)다.
헬레쉴트에서 출발해 예이랑에르로 가는 크루즈 선은 5월 20일∼9월 10일 기준 오전 8시, 9시 30분, 11시, 낮 12시 30분, 오후 2시, 3시 30분, 5시, 6시 30분 8차례 출발한다.
운임은 성인 기준 295크로네(3만9547원), 어린이 148크로네(1만9900원)다. 6∼10인승 차량 기준 운전자 포함, 1175크로네(15만7500원)를 지불해야 한다.
<출처> 2019. 5. 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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