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재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강연회
「이필주 목사의 목회와 신앙」
-그의 생애와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발표자 : 홍승표 교수)
2019년 3월 3일, 꽃재교회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이 있었다. 강연은 <이필주 목사의 목회와 신앙>이라는 주제로 감리교신학대학 외래교수인 홍승표 교수가 맡았다.
▲김성복 담임목사의 인사말씀
강연에 앞서 꽃재교회 김성복 담임 목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꽃재교회 2대, 4대, 10대 담임목사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셨던 이필주 목사남을 조명하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우리 성도들은 이필주 목사님의 신앙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받아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연하는 홍승표 교수
이날 홍승표 교수는 글의 서두에서 “이필주 목사는 생애 첫 목회지인 왕십리교회(현 꽃재교회)에서 5년간 시무했으며, 그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3․1운동 민족 대표로 참가하여 옥고를 치른 후 미아리, 연화봉(현 청파교회), 서강, 염창, 창천교회 등에서 목회하다가 1933년부터는 다시 왕십리교회로 파송되어 2년간 목회하고 1934년 은퇴했다. 이필주 목사의 목화자로서의 삶에 있어 그 공식적인 발걸음의 시작과 마무리가 바로 꽃재교회에서의 사역이었다는 점은 꽃재교회와 이필주 목사와의 깊은 인연과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며, 이필주 목사와 꽃재교회의 뗄 수 없는 관계를 피력했다.
이는 『꽃재교회 역사-110년, 꽃재교회 이야기』-「이필주 목사의 마지막 사역」P.118에서 “왕십리교회 교우들은 지조 있는 민족의 지도자, 탁원한 영적 지도자, 그것도 왕십리교회와는 각별한 관계였기에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 고마움과 아쉬움이 겹쳐 눈물로 배웅했다.”는 글과 일맥상통된다. 1시간에 걸친 강연에서 홍승표 교수는 이필주 목사의 생애와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다음 순서에 따라 그의 목회와 신앙을 명료하면서도 심도 있게 풀어 나갔다.
1. 이필주의 고난역정과 기독교
1) 불우한 가정 현실과 가난, 그리고 골육상잔의 트라 우마
2) 한국의 마르티노 : 이필주의 1차 회심과 군 생활 청산
3) 민족대표 참여와 옥중 체험 : 이필주의 2차 회심과 목회의 재발견
2. 이필주 목사의 목회와 신앙
1) 출소 이후 이필주 목사의 목회 활동과 강연
2) 더불어 흔쾌한 부활의 신앙 : 희색이 만연한 만남, 무진한 유쾌 중의 귀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 강연 책자 「이필주 목사의 목회와 신앙」
홍 교수는 한석원 목사가 출판한 『종교계저명인사설교집』(1922)에 수록된 이필주 목사의 “참으로 나를 알자”라는 설교를 바탕으로, 이필주 목사의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신앙인의 삶이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3․1독립선언서에서 선포한 새로운 나라의 주체적 삶도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므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입은 존재로 이 땅에 사명을 받고 태어난 우리 역시, 이필주 목사의 신앙적 기초에 따라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를 다시금 되새기며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이날 강연은 이필주 목사의 신앙을 기리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필주 (李弼柱, 1869~1942) 목사
▲33인의 한 사람 이필주 목사
1869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이필주 목사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호구지책으로 1890년 구한국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지만, 이때 의병식 훈련과 교육이 이후 민족운동에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더구나 동학농민전쟁 중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골육상쟁의 아픔을 겪었던 경험은 기독교에 귀의하는 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1902년 전염병으로 자식들을 잃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상동교회에서 열렬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민족운동에도 투신하였다. 우선 상동교회의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그리고 기독교청년회 등에서 체육교사로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아울러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상소운동에 동참하면서 항일 민족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07년에는 한말 최대의 비밀결사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 재무 책임을 맡아 활동하자, 이를 도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이후 191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왕십리교회 (현 꽃재교회) 전도사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1915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8년에는 기독교 감리회를 대표하는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영전되었다.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면서 3·1운동의 계획 추진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특히 학생층을 종교계의 3·1운동 계획에 끌어들여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또 태화관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에도 참석하였다. 이로 인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민족대표 33인 (네이버 지식백과)
▲ 이필주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출옥 후 이필주 목사는 1933년 3월, 왕십리교회 담임 목사로 다시 돌아와 목회자로서의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1년 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민족적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고 전도회와 부흥회 등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애썼다. 1934년 이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 4월 21일 소천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필주 선생을 200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 자료와 사진을 3월 한 달간 전시하였다.
2017년, 꽃재교회 이필주 목사 기념비 건립
이미 꽃재교회에서는 2017년 5월, 교회 앞마당 대로변에 이필주 목사 기념비를 건립한 바 있다. 꽃재교회 원로장로인 남상학 시인은 이필주 목사 기념비 건립에 부쳐 「그대는 별이어라」> 라는 시를 남겼다.
<이필주 목사 추모시>
그대는 별이어라
- 이필주 목사 기념비 건립에 부쳐
남상학 (시인, 꽃재교회)
그대는 별이어라
어둠의 하늘에
밤 새워 진리의 불 밝히며
새벽을 일깨우던 별
때로 짙은 구름 몰려오고
톱날 같은 바람이 우르르 몰려와도
잠들지 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몰래 가슴에
생명의 불씨를 지피던 사람
매서운 바람 분탕질하고
까마귀 떼 어지럽게 날아오르던
뜨거운 한낮 정오 그 즈음에
대나무처럼 제 살 깎아 창을 세워
광복의 날을 꿈꾸며 드높이
독립의 함성을 올렸어라
이제, 그대는
우리 모두의 스승으로 다시 살아
무릎 끓고 기도하던 터전
꽃재 언저리에 우뚝 서서
다시 오는 여명의 내일을 위해
조국과 민족을 품에 안고
영원한 진리를 밝히는
빛나는 별, 별이 되리라.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천도교 15인, 불교 2인(백용성, 한용운)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감리교 9명 중의 이필주 목사는 꽃재교회 2대, 4대, 10대 담임목사였다. 그것도 목회사역의 시작과 끝이 꽃재교회에서였다.
독립운동가 이규갑 목사 기념비
▲이필주 목사 기념비 옆에 세운 독립운동가 이규갑 목사 기념비 (출처 노컷뉴스)
그리고 꽃재교회에는 독립운동가 이필주 목사 기념비 제막에 이어 2018일, 꽃재교회 14대 담임목사이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이규갑 목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규갑 목사 기념비는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 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꽃재교회 앞 기념공원의 이필주 목사 기념비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정리 · 남상학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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