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日 보도통제 뚫고…
‘한국 독립운동 소식’ 마침내 전세계 타전
안영배 기자
▲1919년 3월 1일 당일 서울 종로의 보신각 앞에서 긴급 출동한 일본군이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길을 차단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만세운동이 기습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일경(日警)은 군중의 열광적인 만세 함성에 기가 눌렸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탄한 이후 경성(서울)에서 처음 겪는 대규모 거리 시위였다. 일경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거리 좌우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략’)
일본인들은 그간 한국인들을 얕잡아보았다. ‘게으른 조센진’, ‘비겁한 조센진’이라는 욕설로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방심했다.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3·1운동 발발 수개월 전 일본 국왕 다이쇼(大正)에게 한국의 정황을 보고했다.
‘민중은 일제히 제국(일본)의 위세를 신뢰하여 업(業)에 힘쓰고 산(産)을 다스려 전도(全道) 의연(依然) 극히 정밀함.’(‘齋藤實文書’ 문서번호 423-1)
조선총독부가 한국인들을 잘 다스리고 있어서 조선이 매우 평온하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에서 완벽한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해놓았다고 본국에 자랑했다. 그렇게 판단할 만도 했다.
일제는 105인사건(1911년) 등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 조직을 거의 괴멸시키다시피 했다. 이어 무소불위의 헌병경찰을 내세워 한국인들을 물샐틈없이 감시하고 통제했다. 국외는 어떨지 몰라도 국내의 한국인들만큼은 총독부 위력에 모두 굴복해 다시는 감히 민족운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다.(윤병석의 ‘3·1운동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3·1운동은 바로 그런 일제의 확신을 무너뜨렸다. 일본 헌병과 경찰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던 ‘순한’ 한국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3·1운동의 한국인들은 일경 앞에서 대놓고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만세운동 시위대가 시내 곳곳을 누비는 동안 삽시간에 그 수가 십수만 명으로 불어난 것도 일제에는 충격이었다. 당시 경성은 이틀 후인 3월 3일 예정된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참관차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경성행 임시열차가 속속 도착했고, 남대문역(서울역) 출구로는 인파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미 200여 개의 경성 여관들은 초만원이었다. 숙소를 잡지 못한 지방 사람들은 연줄이 닿는 친지나 하숙집을 찾았고, 대부분의 경성 사람들은 손님 접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마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도로에서 노숙까지 했다.(이희승의 ‘내가 겪은 3·1운동’,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바로 이들 한국인이 탑동공원(탑골공원, 종로2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합세했던 것이다.
게다가 만세운동은 적절히 절제되고 조직적이기까지 했다. 시위 선동 역할을 맡은 ‘만세꾼’들은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만세꾼들의 주도로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단은 각국 영사관과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 등지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고, 다른 일단은 일본 군경의 저지선을 뚫고 총독부와 조선보병사령부까지 진출하려고 했다. 헌병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덕수궁 대한문 안까지 들어간 시위대도 있었다. 이들은 고종의 빈전에 조례(弔禮)를 표했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백성들에게 많은 한(恨)을 안겨준 황제였지만 역시 많은 한을 안고 가는 그의 최후를 빌어주었다.
시위대를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3·1운동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이 역사적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성(萬歲聲)이 일어나는데 순식간에 장안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천지를 진동했다. 시내 전체가 문자 그대로 홍진만장(紅塵萬丈)이 되었다. 거리를 다녀보니 시가는 전부 철시(撤市)했고, 가가호호에서는 납세 거절을 부르짖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관공리(官公吏)들이 사표를 쓰느라고 바빴으며, 학교 등에서는 앞을 다투어 스트라이크(파업)를 일으켰다.”(‘왕년의 투사들 회고담’,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 당황한 총독부
상황이 여기까지 치닫자 일본 경찰과 헌병들조차 처음에는 국제적인 성원으로 한국이 진정으로 독립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그러나 자기네 본국에 알아보고 국제적인 정보도 받아보았음인지 오후 늦게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우선 거리에 일본 군대의 행렬이 나타났다. 용산 방면에서 와서 시중의 큰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군중과 충돌할 의사는 없었고, 다만 시위에 지나지 않는 처사같이 보였다.(이희승의 ‘내가 겪은 3·1운동’)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일제는 정규군까지 동원했다. 조선에서 2개 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는 조선총독부 고지마 소지로(兒島摠次郞) 경무총장의 다급한 요청을 받고 용산에 주둔 중인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그는 본국의 일본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긴급 전보를 쳤다.
‘경성의 학생 이삼천 명이 오늘 (3월)1일 오후 3시경 대한문 앞에 집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으며, 일부는 궁 안에 침입하려 했으나 이를 제지하였다. 위와 같이 형세가 다소 불온하므로 경무총장의 청구에 의해 보병(步兵) 3개 중대, 기병(騎兵) 1개 소대를 파견해 원조했다. 또 선천에서도 독립운동이 있어 그 지역 철도 원호대는 경찰관을 원조하여 이를 해산시켰다고 하는데 아직 상세한 보고는 접하지 못했다.’(‘경성 선천 지역의 시위운동 및 파병 상황’)
당황한 조선총독부가 만세운동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보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일부 ‘불령자(不逞者·독립운동가)’들이 일시적으로 대중을 선동한 시위이기 때문에, 주동자만 체포해 처벌하면 진압될 것으로 보았다. 일제는 3·1운동을 ‘가벼운 소요’ 정도로 파악하고, 해가 진 무렵부터 130여 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를 체포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은희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진고개(현 충무로) 골목에서 헌병들에게 붙들려가던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물샐틈없는 좁은 골목이라서 본정 2정목에 이르러서부터는 몽땅 체포되기 시작했다. 일제 상가(진고개 상점가의 일본 상인들)가 모두 떨쳐 나와 협력했다. … 수갑이나 포승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헌병들이 양편 손에 한 사람씩 손을 잡고 남산 밑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해갔다.”(최은희의 ‘조국을 찾기까지’)
그러나 한국인들은 헌병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길에서도 힘차게 만세를 불렀다. 경무총감부 마당에 꿇어앉은 사람들도 새 사람이 잡혀올 때마다 마주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 아무리 붙들리고 붙들려도 독립만세의 함성은 멈춰지지 않았다.
○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건?
▲형무소로 끌려가는 105인 사건의 신민회 인사들.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국제 여론을 가장 두려워했다. 특히 그해 1월 28일부터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파리평화회의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으로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가 된 나라를 독립시키는 안건을 주요 의제로 다루는 회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와 세계 지도를 그리는 중차대한 회의였다. 일제는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물론 한국에 대한 동정 여론조차 원천 봉쇄하려 했다.
일본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인 ‘저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이 3·1운동 관련 기사를 모아 펴낸 책에서는 당시 일본 수뇌부의 인식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조(李朝)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고종의 인산일을 이틀 앞둔 3월 1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소요의 기미가 있는데, 설사 독립운동과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해 일체의 보도를 하지 말라는 경시청장의 통고문을 접수한 것은 이보다 앞선 1월 28일의 일이었다. 2월 14일에도 한국인의 선언문(도쿄의 2·8독립선언서)에 대한 보도 금지를 요구하는 명령이 내려졌다.…’(‘The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서문)
일제는 프랑스에서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되는 바로 그날인 1월 28일부터 일본 본토의 자국 신문은 물론 외국계 신문에까지 엄격한 보도 통제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속사정 때문에 일제는 3·1운동 첫날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는 외에 한국인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이나 살상으로 문제를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예상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지고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결국 일제는 야만적이고 이중적인 본성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일본 총리 하라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보낸 긴급 전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소요 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엄중한 조치를 취해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가장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하기 바란다.’(하라 내각총리대신이 하세가와 총독에게 보낸 지급 친전 전보, 1919년 3월 11일자)
일본 총리는 외국인의 주목과 비판을 피해 가면서 한국인들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 한일 국제외교 전쟁
한편으로 파리평화회의에서의 한국 문제 거론은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목표이자 과제였다. 1919년 2월 1일 한국을 대표한 김규식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가는 선상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한국이 독립이나 된 듯이 열광했다. 그러나 파리로 달려가는 바쁜 마음과는 달리 배는 3월 13일에 파리의 항구에 도착했다.(이정식의 ‘한국민족주의의 정치학’)
김규식이 파리로 향하는 사이 민족대표들은 3·1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을 하루속히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 대표단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3·1운동 거사의 주된 목적이 거족적인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3·1운동 하루 전인 2월 28일, 국내 민족대표들은 김지환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민족대표 48인중 한 명인 김지환은 기독교 측 대표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의 문서를 전달받은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김지환은 3·1운동 당일 기차로 신의주까지 도착했으나 일경의 감시가 워낙 삼엄해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안동현(현 중국 단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상하이에서 대기 중인 현순 목사 앞으로 우편물로 발송한 후 귀국하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게 검거됐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 독립운동 조직(동제사의 청년조직인 신한청년당으로 추정)의 보호 속에 있던 현순은 3·1운동이 전개되는 순간, 전 세계에 이를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현순은 김지환으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 등을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 작업에는 2·8독립선언서 작성의 주역인 이광수와 비밀독립결사 단체인 동제사 요원이자 신한청년당원 조동호(중화신보 기자)가 함께 참여했다.(피터 현의 ‘만세!’)
1919년 3월 4일, 드디어 한국의 독립운동 봉기 소식이 상하이 영문 대륙보에 게재됐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3·1운동이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알려지는 순간 상하이의 독립운동 지사들은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현순 등은 상하이 주재 세계 통신사 및 중국계 신문사에 독립선언서를 발송한 뒤, 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독립 선언과 독립 의지를 밝혔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단과 미국 대통령 윌슨 앞으로도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을 영문 전보로 보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성에 남아 있던 현순의 아내(이성녀)는 일제로부터 남편의 소재를 밝히라며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데이빗 현의 ‘현순목사와 대한독립운동’) 또 외국 혹은 외국인과 접촉한 혐의가 짙은 민족대표들은 감옥에서 더욱 심한 고문을 감수해야 했다.
:: 105인 사건이란 ::
일제가 1911년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일으킨 희대의 조작사건이다. 일제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을 모의했다는 날조한 이유를 들어 신민회 인사 중 105인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105인 사건’이라는 날조극으로 인해 조사 과정에서만 무려 7명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33인의 민족대표 중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선생이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처> 2018. 6. 30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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