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들의 봉기
청년학생들 나흘만에 ‘2차 3·1운동’ 결행, 독립열망 다시 폭발
안영배 기자
▲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시위에 호응해 서울 종로에서 많은 사람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에 홀대를 받은 종로를 ‘민족의 거리’로 여겼다. 동아일보DB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경성 남대문역(서울역) 앞 광장. 이틀 전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를 참관한 뒤 귀향하는 사람들로 역 앞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 외엔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거대한 태풍이 휘몰고 간 후의 팽팽한 긴장감을 안으로 품은 고요였다. 정적은 곧 깨졌다. 느닷없이 젊은 남녀 학생들이 집단으로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광장은 수천 명으로 불어난 학생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른 새벽부터 역 부근 창고 뒤나 작은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학생들이 무리를 이루어 바로 광장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뒤이어 군중 속에서 인력거 한 채가 나타나더니 턱 멈추었다. 이어 짙은 고동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이 내리지도 않고 인력거 위로 올라섰다. 그는 품속에서 커다랗게 ‘조선독립’이라고 쓴 기를 꺼내 높이 들더니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영웅처럼 나타난 한 청년의 말에 군중의 가슴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간 경성에서는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이후 사흘간 이렇다 할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3인의 민족대표 모두 붙잡혀 가 만세운동도 일과성 사건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다 이날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3·1운동이 군중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불꽃을 터뜨린 것이다.
의기충천한 군중은 청년을 앞세우고 한꺼번에 만세를 불렀다. 어린 여학생들도 “만세!”를 연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려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또 다른 한 채의 인력거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더욱 격앙됐다. 이번에는 흰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청년이 ‘조선독립’이라고 쓴 커다란 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도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올리고, 어린 중학생들은 껑충껑충 뛰면서 독립만세를 환호했다.(최은희의 ‘조국을 찾기까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처음 나타난 청년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대표인 3학년 김원벽(1894∼1928), 뒤이어 나타난 청년은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대표인 3학년 강기덕(1886∼?)이었다.
경성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높던 김원벽과 강기덕은 3월 1일 탑동(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했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체포된 이후부터는 이들 학생대표단이 남은 ‘짐’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학생대표단은 4일 오전 각 전문학교 대표, 고등보통학교 및 중등학교 대표들을 소집해 학생 주최의 대규모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5일 남대문역 봉기도 3월 1일의 경험을 토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결행한 것이다.
남대문역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역 광장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다시 전개해 귀향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북돋우고 철로를 따라 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명지대 김두얼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1919년 당시 전국 220개 군 가운데 철도가 지나가는 군(60개 정도)은 그렇지 않은 군보다 평균 7일 정도 시위가 빨랐고 참여한 군중 수도 더 많았다.
시위 선동을 맡은 학생 ‘만세꾼’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중앙학교 3학년 생도 이재근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장정들에게 돈을 주고 싸움판을 벌이게 한 후 구경하러 모여드는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부르게 했다(‘중앙백년사’). 일제 조선군사령관 보고서는 남대문역 시위 규모를 1만 명가량으로 잡았으나, 만세꾼이 동원한 경성의 부민(府民·시민)까지 합쳐 실제로는 수만 명(각 학교 학생단 사건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서)에 이르렀다.
○ 도쿄의 여성 유학생
학생들은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각종 인쇄물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 이끄는 두 갈래 시위대는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위대가 남대문에 이르자 일경이 기습해 주모자인 강기덕을 체포했다. 김원벽의 시위대는 남대문 안쪽 덕수궁 대한문까지 진출했다. 일경이 또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일경이 선두에 선 시위대를 마구 구타하면서 검거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열을 지어 돌진했다.
마침내 일경의 제지를 뚫은 시위대는 종로 보신각 앞까지 진출해 집결했으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산을 당했다. 일경은 연약한 여학생들에게까지 대검을 빼 휘두르고 총을 쏘는 등 폭압적인 방법을 다 동원했다.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일경은 주모자 김원벽을 잡기 위해 사정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이때 쇄골이 부러진 김원벽은 사망할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독립만세운동에서는 여학생들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남대문역에서 종로 보신각으로 이어지는 시위에서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가세해 군중을 선도했다. 덕수궁에서 아수라처럼 날뛰는 일경의 경비망을 뚫은 것도 여학생들의 용감한 행동 덕분이었다. 게다가 중등학교 이하 어린 여생도들까지 만세운동에 나서는 것을 보고 외면할 수 없어 시위에 참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3·1운동에서 일경에 체포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중고 전신) 최은희는 “이때 검거된 시위대 100여 명 중에는 많은 여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한편 여학생들은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 이후 귀국한 여성 유학생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당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장으로 활동하던 김마리아(1892∼1944)와 동경의학교 유학생 황애시덕(1892∼1971) 등이 국내 여학생들의 운동 참여를 주도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4’)
김마리아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2·8독립선언 행사에도 직접 참여한 여성이다. 그는 2·8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 여성이 배제된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정도로 열혈 여성투사였다.
김마리아는 도쿄 독립선언 이후 기모노 차림의 허리띠에 2·8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소식을 각지에 전파하면서 국내 독립운동을 호소했다. 그는 경성에서 여학생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다가 3월 6일 모교인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일경은 어린 여학생들의 만세운동 가담 배후 인물로 그녀를 지목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마리아는 코에 물과 고춧가루가 부어지고, 가마니에 말려 몽둥이로 온몸을 맞는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고문으로 그녀는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병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들이 경성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은 일제 기록에도 나타난다. 경성 학생들과 도쿄 유학생 등 63명이 3월 5일 거사 이후의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합동 모임을 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3월 6일자 경무국 보고). 3월 5일 학생 운동에 일본 유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증거다.
한편 일제 정보망에 의하면 학생 시위대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200명의 평양 학생들이 경성의 학생운동이 부진하다고 보고 급히 상경해 합류했고, 각 도에서도 결사대를 조직한 뒤 서울 학생을 격려해 대대적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보고도 있다.(조선헌병사령관 보고 전문)
서북지역 학생들이 그렇게 움직일 만도 했다. 3월 1일 경성과 동시에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은 평양, 선천, 의주, 원산, 정주 등 이북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3월 1일 거사 이후에도 거의 매일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면 경성에서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너무 잠잠했다. 이에 불만을 느낀 평양 학생들이 응원을 하러 상경했던 것. 다른 한편으로 경성의 학생대표단이 평양을 비롯해 각 지방 학생들과 사전에 지원 문제를 협의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학생대표단은 서북학생친목회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데다가 특히 김원벽은 평양 숭실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 학생에서 노동자로
경성의 제2차 학생운동은 민족독립의 갈망을 재집결하여 폭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중앙에서 대규모로 독립운동이 계속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 각지에 전해져 3·1운동을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됐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항일독립운동사’)
그 대신 학생들은 큰 대가를 치렀다. 3월 5일 만세 시위로 충격을 받은 일제는 대대적인 시위 주동자 색출 작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이 머물 만한 모든 여관과 하숙집은 일경의 검색 대상이 됐다. 마치 경성에 계엄령이 선포된 듯했다. 수많은 학생이 일경에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후 학생 단체가 주도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살벌한 일경의 총검과 밀정(密偵)의 감시 속에서도 학생들은 꺾이지 않았다. 체포되지 않은 학생 간부들은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소규모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지하신문을 제작하거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하는 등으로 노동자와 상인 등 각계각층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따라 시위를 단속하는 일경은 한숨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각종 격문이 전차 안과 가로변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노영 등은 3월 6일 조선독립단이라는 단체 명의로 ‘동포여 일어서라’라는 격문을 살포했다. 총독부의 엄포와 거짓말에 굴하지 말고 겨레가 총궐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8일 경성에서 최초로 노동자 시위가 일어났다. 조선총독부 용산인쇄국의 직공 200여 명이 야간작업 중 길가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는 일제의 무력 통치 상징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는 용산, 그것도 조선총독부 직할 공장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후의 노동자 파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919년 3월 8일, 경무국 보고)
용산인쇄소 직공 독립운동 다음 날인 9일 경성전기회사 한인(韓人) 전차 운전사와 차장 120명이 파업을 단행해 전차 운행이 중지됐다. 정오에는 담배 생산 공장인 동아연초공장(종로4가 사거리)에서 유년공(幼年工·나이 어린 직공) 5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후 각 회사 노동자의 출근율이 감소하는 등 노동자 파업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용산인쇄국(소) 자리는 서울역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용산구 원효로3가 ‘KT 원효지사’ 터다. 최근 기자가 가본 현장에서는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용산인쇄국은 1923년 조선인쇄주식회사로 민영화됐다. 이 일대는 ‘인새국전(印刷局前)’이라는 전차 정거장까지 설치될 정도로 인쇄 거리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세 상가와 소규모 건물로 꽉 들어차 있을 뿐이다. 그 어디서도 그날 노동자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듯했다. 3·1운동 이후 노동자층이 자발적으로 첫 독립만세를 외친 역사의 현장은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일제의 표현처럼 ‘무지한 조센진’에서 ‘각성한 한국인’으로 스스로 깨어난 민중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출처> 2018. 7. 28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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