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유대인 학살한 ‘미치광이 왕’ 안티오쿠스, 죽어서도 오명 남기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1465년작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렵혀진 유대인 성전’. 성전 제단 위에 금지된 것이 세워져 있다. 네덜란드 국립도서관 소장.
10대 때 나의 우상이기도 했던 그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은, 내가 ‘아재’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 그런데 놀랍게도 요사이 젊은 아이들이 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인기 덕분이다. 이미 그가 죽은 지 거의 삼십 년이 흘렀다.
죽었다고 해서 진짜 죽는 것이 아닌가 보다. 어쩌면 당신도 나도,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 다만 기대와는 달리 달갑지 않을 수도. 프레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도록, 2,000년이 훌쩍 넘도록 ‘미친놈’으로 기억되는 불행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
아는 교수님 중 한 분에게 성탄 인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의례적 인사인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답이 “해피 하누카”라고 왔다. 아차 싶었다. 고대 이스라엘 법을 연구하는 영국의 유대교 학자였는데, 내가 그만 기독교식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물론 이런 일을 자주 겪기도 하셨고, 성품이 넉넉하신 분이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의 중요 절기 중 하나인 하누카(Hanukkah)는 마침 기독교의 성탄절과 비슷한 시기에 치르는 행사였다.
한국에는 유대인들을 찾아보기 어려운지라, ‘하누카’가 생소할 것이다. 기원전 2세기경, 유대인들은 헬라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헬라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을 향하여 극악한 종교탄압을 행했다. 이때 유다스 마카베우스라는 유대인이 게릴라 전투를 벌여 헬라 세력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리고는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정화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리는 유대절기가 바로 하누카다.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감격적인 행사가 아닐 수 없다.
▲12월 유대인들이 나누는 하누카 인사 카드. ‘빛의 축제’, 또는 ‘헌신의 축제’라고도 불리는 하누카는 유대인들에게 감격적인 행사다.
안티오쿠스 4세가 역사책에는 나오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가톨릭 성경에는 ‘제2정경’ 혹은 ‘외경’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있는데, 그 중 마카베우스서에 그가 직접 언급되어 있다. 바로 유다스 마카베우스의 혁명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성경의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4세가 상징적으로만 암시되어 있다. 다니엘은 기원전 6세기의 사람인데 그가 본 환상은 기원전 2세기의 일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다니엘이 직접 아는 왕이 아니다. 다니엘서 후반부는 환상과 계시, 상징, 종말론으로 가득한 소위 묵시(默示ㆍApocalypse) 문학으로 분류된다. 요한 계시록도 이에 속한다. 성경 밖 유대 문헌에도 묵시 문학이 가득하다. 여기에는 암호 같은 상징이 자주 나오는데, 엄밀히 묵시 문학은 아니지만 에스겔서를 보면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이 죽은 뼈다귀로 상징되어 환상에 등장한다.
유대인들이 마른 뼈다귀였다면, 안티오쿠스 4세는 무엇이었을까. 다니엘서에 그는 흥미롭게도 아주 못된 ‘뿔’로 상징화되어 있다. 아리송한 다니엘서의 암호(?)를 일부 소개해 드리겠다. “넷째 짐승은 땅 위에 일어날 넷째 나라로서, 다른 모든 나라와 다르고, 온 땅을 삼키며 짓밟고 으스러뜨릴 것이다.” 앞서 다니엘은 기괴한 짐승 네 마리를 보았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중 네 번째 짐승을 대부분 그리스, 즉 헬라 제국으로 이해한다. 처음 세 나라는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로 본다. 다니엘은 이어서 열 뿔도 보았는데,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라 한다. (다니엘 7:23-24)
“그 뒤에 또 다른 왕이 일어날 것인데, 그 왕은 먼저 있던 왕들과 다르고, 또 전에 있던 세 왕을 굴복시킬 것이다.” 그 열 명과 세 명의 왕이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이들을 굴복시킨 또 다른 왕은 안티오쿠스 4세가 분명하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24-25) 가장 높으신 분은 유대교의 하나님을 가리키며, 괴롭힘을 당하는 그 분의 성도는 유대인이다. 그리고 안티오쿠스는 규율과 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종교적 탄압을 했던 무뢰한이었다.
제국의 탄압아래 있었기에, 유대인들의 문헌은 이렇게 아리송한 암호로 적힐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이름이 언급되면 당장 고소(?)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숫염소가 매우 강해지고 힘이 세어졌을 때에, 그 큰 뿔이 부러지고.” 여기에서 부러진 큰 뿔이 다름 아닌 알렉산더 대왕인데, 이어서 안티오쿠스로 추정되는 못된 뿔이 묘사된다.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 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 (8:7-12)
안티오쿠스의 악행은 마카베우스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안티오쿠스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무엄하게도 성전 깊숙이 들어가서 금, 은은 물론이고 값비싼 기물들을 빼앗고 찾아내는 대로 모두 약탈하였다. 많은 사람을 죽인 다음, 오만 불손한 욕설을 남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마카베우스상 1:20-24)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는 다니엘서의 표현은 마카베우스서가 기록한 안티오쿠스의 악행에 상응한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다” (1:56)
▲1553년 기욤 루예 작. 유다스 마카베우스.
도대체 이 왕이 왜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유대인을 괴롭혔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역사 사료에 의하면 이런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가 이집트에 쳐들어가다 로마에 망신을 당했는데, 때는 기원전 168년이었다. 가는 길에 한 늙은 로마의 대사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당장 물러나라”는 로마의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그 대사는 안티오쿠스가 서 있는 주변에 선을 긋고서 “이 선을 넘기 전에 나에게 로마에 전달할 당신의 대답을 말하시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안티오쿠스는 물러났고, 이는 큰 망신이요 굴욕이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아, 자기네끼리 큰 격변이 벌어진다. 그리고 안티오쿠스를 지지하던 파가 패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쳐들어가 홧김에(?) 대 학살을 한다. 단 사흘 만에 8만명을 죽였는데, 보이는 대로 어른, 아이, 여자를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유대의 관습대로 아들을 할례시킨 엄마는 아기와 함께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마카베우스하 5-6장)
이런 미치광이 학살자가 저지른 무서운 탄압을 이기고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했으니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기쁘고 기념비적인 축제일이 바로 하누카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기 이름을 에피파네스(Ephipanes) 라고 지었다. 뜻은 (신의) ‘현현’(顯現) 이다. 당시 사람들을 비슷한 발음을 따서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라고 불렀다. 그 뜻은 ‘미친놈’이다.
헬라 역사에 남을 유명한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그는 죽을 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 상상이나 했을까. 2,000년이 넘도록 자신이 ‘미친놈’일 것을 알았을까.
누구든 긴 역사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의 탐욕과 충동에만 사로잡혀 산다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소환될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죽어 눈 감아 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죽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디지털 사회에서는 영원히 기억되고 회람될 가능성이 높다. 죽어도 사라지지 못한다. 역사는 얼마든지 당신의 이름을 더럽게 다시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죽지 않고 영원히 다시 불릴 것이 바로 자신의 이름이다.
<출처> 201`9. 1. 12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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