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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정조대왕의 꿈과 숨결이 깃든 곳, 수원 화성과 행궁

by 혜강(惠江) 2019. 1. 7.

 

수원 화성 행궁

 

정조대왕의 꿈과 숨결이 깃든 곳

 

·사진 = 남상학

 

 

 

 

 수원 화성의 팔달문을 기점으로 장안문을 향하여 걸었다. 화성 행궁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팔달문에서부터 화성 행궁광장으로 이어지는 행궁로에 있는 행궁동 공방거리는 잔잔한 재미로 가득하다. 팔달문에서 화성행궁에서 이르는 약 500m 길 좌우로 이어진 공방거리는 수원의 인사동이라 불린다. 각양각색의 공예품점 30여 개소와 맛집, 갤러리 카페 50여 개소가 모여 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판매하고 있고, 도자기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거리도 즐길 수 있다. 화성 행궁 답사는 이 길에서 만나는 여민각 건너편 화성행궁 광장으로부터 시작된다.

 

 

▲ 행궁 반대편의 여민각, 행궁은 길 건너 행궁 광장을 통해 입장한다.

 

▲ 드넓행궁 광장은  수원 화성과 화성 행궁을 상징하는 대형 도자 그림판과 화성 능행반차도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입구에서 행궁의 정문격인 신풍루에 이르는 드넓은 광장의 바닥 중앙에는 박석으로 꾸며졌고, 양쪽으로는 수원 화성과 화성 행궁을 상징하는 대형 도자 그림판과 화성 능행반차도 등으로 장식되었다. 광장 끝에 버티고 선 신풍루(新豊樓) 앞에는 홍살문과 신풍교라는 돌다리에 닿는다. 화성 행궁 탐방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화성행궁은 수원 화성 안에 있다. 여기서 잠깐, 수원 화성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자.

 

 ▲ 자전거를 탄 행인이 행궁 앞 광장을 지나고 있다.

 

수원 화성 알아보기

 

 

 

 수원 화성은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의 꿈이 담긴 성곽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남다르게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정치적인 문제로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자 1789년(정조 13)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면서 능 주위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개혁 군주답게 도시와 성곽을 축성하였다.

 

 1794년 2월 축조가 시작된 화성은 2년 6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796년 9월 완공하였다. 화성의 둘레는 5,520m로 창룡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안문(북) 4개의 문루로 이어져 있으며, 뛰어난 건축술로 인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개발 사례로도 평가받고 있다. 실학의 영향으로 거중기·활차(滑車) 등 근대적인 기기를 이용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사실 화성 행궁 설립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한편으론 정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대 사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축성된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타가나 파괴되었다가 새롭게 복원되었다. 1935년 일본이 '수원성곽'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고, 1996년에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화성'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사적 제3호.

 

수원 화성의 행궁

 

 

▲ 행궁은 화성의 가장 높은 서장대(화성장대) 동쪽 언덕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하는 곳으로, 수원 화성 안에는 정조의 현릉원 행차 시에 머무를 수 있는 행궁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화성 축성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정조 20년(1796년)에 팔달산 동쪽,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융건릉 능행을 위한 행궁을 창건했다.

 

 화성 행궁은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현저히 크고 웅장하여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애석하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거나 사라져 빈 터만 남게 됐다. 다행히도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지금은 장락당을 비롯해 480칸 이상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행궁 신풍루 앞에 세운 행궁 표지석과 간판

 

화성 행궁의 구조 (사적 제478호)

 

 

 

 화성 행궁은 팔달산 기슭, 성내 중심부를 이루는 평지에 동향을 하고 앉아서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 봉수당 등의 건물이 중앙의 동서방향의 중심축을 이루고, 그 좌우로 여러 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신풍루의 후면으로 정서 방향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신풍루에서 좌익문 ․ 중양문 ․ 봉수당은 화성행궁 배치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머지 건물들은 이 중심축의 좌우에 약간 비대칭적인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선 행궁 입구 전면에서 보면 좌측으로 신풍루보다 훨씬 앞쪽으로 네모진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 남군영, 그리고 우측으로는 ㄱ자 집인 북군영이 대칭을 이루어 마주 보고 있다. 그 뒤로는 마당을 사이에 둔 좌 ․ 우 두 채의 집사청이 있다. 그 뒤로는 10여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직사각형의 빈 마당이 행각 등으로 4면이 둘러싸인 곳이 나온다. 이 마당 북쪽(우측)에는 우화관이라는 건물이 담장 쪽으로 붙어 서 있고, 이 마당의 뒤편으로는 네모난 작은 연못이 파져 있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마당을 지나면 ㄱ자형의 낙남헌 건물이 북쪽을 향하여 건립되어 있다.

 

 좌측으로 정문인 신풍루보다 앞쪽으로 불쑥 나와 네모진 담장이 쳐진 남군영 뒤에는 서리청 ․ 비장청이 내담장을 사이로 직결되어 있고, 이보다 행랑이 옆으로 조금 길어지면서 외정리소가 있고, 그 뒤에 4면으로 긴 행랑으로 둘러싸이면서 정사각형에 가까운 넓은 마당을 갖춘 유여택(維與宅), 그 뒤로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복내당(福內堂)이 이어져 있다. 복내당의 우측으로는 긴 행랑을 통하여 장락당(長樂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장락당은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과 지붕이 거의 맞닿아 있을 만큼 앞뒤로 겹쳐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 행궁 뒤쪽 미로한정에서 내랴다 본 행궁 모습 

 

 행궁 후면 팔달산 기슭에 위치한 미로한정 ․ 내포사 등까지 포함하여 화성행궁을 구성하는 독립된 건물들은 행랑을 제외해도 22채나 이를 만큼 매우 웅장하면서도,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운치 있는 전체도를 나타내고 있다. 행궁의 주요 건물들은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경유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와 같이 일직선상에 문과 행랑, 다양한 기능을 가진 중요건물을 나란히 배치하는 방식은 궁궐의 정전을 구성하는 부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거나 사라져 버린 것을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함으로써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화성성역의궤, 행궁 복원은 화성성역의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수원 화성행궁 시설물 소개

 

신풍교(新豊橋)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가기 전에 건너는길이 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다. 화성행궁은 정국의 형태로 만들어진 궁궐로 팔달산으로 부터 발원한 명당수가 정문 앞에 흐르고 명당수란 궁궐 앞에 맑은 물이 흘러내리게 하여 궁궐로 출근하는 관리들이 맑은 물을 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올바른 업무을 보게 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 명당수에 악귀를 막기 위하여 금천교 다리를 만드는데 화성행궁은 신풍루의 아름다운 이름을 따서 신풍교라고 했다.

 

 

 

신풍루(新豊樓)

 

 행궁의 정문이다. 처음 이름은 진남루라 했다. 정조 18년 가을, 누대 좌우에 남 ․ 북군영을설치하고, 그대로 행각 8칸을 누각에 붙여 양익으로 나누어 짓고신풍루라 했다. 신풍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향처럼 살고 싶어 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1795년 을묘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북군영(北軍營)·남군영(南軍營)

 

 두 군영은 신풍루 좌우 대칭으로 된 군영이다. 북군영은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우측에 있다.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이나 되는 규모를 갖추었다.

 

 남군영은 북군영과 같이 장용외영 친군위 200명이 살면서 지키는 건물이다. 남군영은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서리청(西吏廳)

 

 서리청은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서리란,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이다. 남군영과 비장청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남향이다. 1795년 을묘원행 때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婢將廳)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집사청(執事廳)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執事廳)은 궁궐의 액정서(掖庭署, 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신풍루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집시청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에 입던 다양한 복장이 전시되어 있다. 집사청 앞에는 행궁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수령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집사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집사청 안에는 조선시대에 입던 다양한 복장이 전시되어 있다.

 

 

좌익문(左翊門) 

 

 좌익문은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 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앙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중양문은 정전인 봉수당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경룡관(景龍館)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長樂堂)의 외문(外門)으로 사용한 누문이다. 장락당은 정조18년(1794)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봉수당과 연결되도록 조성되었다. 이에 그 앞으로 2층 구조의 경룡관을 세우고 유여택 서쪽과 봉수당 동남쪽 모퉁이로 이어지는 각도(閣道)를 남북으로 연결하여, 장락당에 별도의 앞마당을 마련하고 장락당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경룡관은 5량 규모의 건물이 4칸 반으로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하였다. 경룡(景龍)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 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왔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침전(寢殿)으로 1795년(정조 19) 을묘 원행시에 혜경궁이 머문 곳이다.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前漢)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長樂宮)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이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와 행궁의 내전(內殿)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장락당 안쪽 방에는 혜경궁 홍씨의 침소가 연출되어 있다. 장락당 건물은 1794년(정조 18)에 완성되었는데, 건물은 북쪽 처마가 봉수당과 이어져 있다. 건물 주변의 출입문은 동서로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 있고 앞마당 동쪽으로 지락문(至樂門)이 있다.

 

 

 

 

 

 

 

유여택 (維與宅)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는 건물로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고,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는 건물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다음 현륭원 재실에 모신 어진과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에 모신 대본(大本) 어진(御眞) 일체를 1801년(순조 1)에 화령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곳에 잠시 봉안하였다. 유여택 뒤편 공간에는 마네킹이 보이는데, 이것은 여인들이 왕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모형으로 눈길을 끈다.

 

 그리고 유여택 왼쪽 행각에는 네 개의 뒤주가 보이는데 이 뒤주는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을 체험하기 위한 뒤주체험시설이다.

 

 

 

 

 

 

복내당(福內堂)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던 곳이다. 장락당 남쪽에 위치해 있다. 좌우 건물 두 채로 이루어져 있다. 복내(福內)라는 이름은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요, 복을 낳는 것은 안으로부터"라는 한서의 글귀에서 따왔다. 서별당은 장락당의 서행각과 이어지고, 구여문(九如門), 동행각에는 유복문(維福門), 외행각 북쪽 끝에는 구복문(九福門)이 있다. 복내당 부엌에는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가 거한 처소이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장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이곳에서 집무하였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봉수당 안에는 정조가 글공부를 하는 모습과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위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에게 회갑연 진찬례를 올리는 모습

 

 

낙남헌(洛南軒)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 19년(1795) 묘원 원행시에 각종 행사가 치러졌던 곳이다. 정조는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특별 과거 시험을 통해 문과 급제 5명, 무과 급제 56명을 선발하기도 했다. 또 군사들의 회식을 이곳에서 열기도 했다. 낙남헌은 일제 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에도 훼손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건물 중의 하나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이용되었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외정리소는 장차 1795년에 있을 을묘원행에서 치를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명명하고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행사를 준비하는 관청이 되었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에서는 화성 유수가 겸직하였다. 외정리소 안쪽의 커다란 방에는 특경, 편경, 진고, 각퇴 같은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에서 사용하는 각종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포사(內鋪舍)

 

 내포사는 행궁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미로한정의 북쪽 50보(59.4m)쯤 거리에 위치하였다. 높이는 7척 5촌(2.32m)이다. 다만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다. 1796년(정조 20) 9월 9일에 준공되었다.

 

행궁 뒤편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자리한 내포사

 

 

미로한정(未老閒亭)

 

 

▲행궁 후원의 정자 미로한정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겨진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졌는데 1칸 6각정으로‘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한 다. 건물의 구조는 동쪽만을 비워놓고 5면은 난간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서편 담에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화성 행궁은 창덕궁과 같이 후원을 정원으로 가꾸었는데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에서의 휴식을 위한 부대 시설로 지어졌으며,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완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의 건물 배치도

 

 화령전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정조의 효심과 유덕을 받들기 위하여 수원부의 행궁 곁에 건립하고,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수원부의 행정장관인 유수(留守)가 관리의 책임을 맡는 등 국가적으로 진중히 여기던 곳이었으며, 순조는 이곳에 와서 노인들을 모아 시연(詩宴)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경술국치 직전에 진영을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제향은 지내지 않게 되었다.

 

 외삼문·내삼문, 그리고 정당인 운한각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운한각의 오른쪽에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이 있고 오른쪽 담장 바깥에 풍화당이 있다. 운한각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 건물인데 정조의 영전(影殿)이었던 만큼 격식이나 부재의 사용이 궁궐의 전각에 못지않다.

 

 건물 앞에는 제사 때 사람들이 모여 서고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월대(月臺 : 섬돌)가 마련되었고, 월대 앞에는 세 군데에 계단이 있다. 그중 가운데 계단은 사람은 오르내릴 수 없고 혼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옆 받침돌인 우석(隅石)에는 천계를 상징하는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다.

 

 운한각 뒤편으로는 5칸의 행각(行閣)이 마련되어서 전사청과 연결된다. 풍화당은 가운데에 큰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과 한 단 높은 툇마루를 둔 건물이며, 제사가 있을 때에는 헌관이 머무르는 재실(齋室)이 되지만 보통 때에는 시연을 베푸는 등 용도가 다양하였다.

 

 

▲행궁에서 바라본 화령전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 화성은 수원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2019년~2020년 우리나라 대표 관광명소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화성에서 행궁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지낸 한나절은 날씨가 다소 쌀쌀하기는 하였으나 뜻깊은 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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