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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오병이어’의 참 뜻, “먼저 복 받은 자 기꺼이 나누어라”

by 혜강(惠江) 2018. 12. 2.

 

오병이어’의 참 뜻

 

“먼저 복 받은 자, 기꺼이 나누어라” 나중 된 자를 돌본 예수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가진 것 없지만 난 생명이 있네”
흑인 가수 시몬의 노래처럼… 돌아보면 많은 복 누리고 있어


‘먼저 된 자’인 열두 제자가 예수 따르던 무리 돌보지 않자
‘빵과 물고기’ 기적으로 가르쳐
상류층 갑질에 경고 의미도


 

여가수 니나 시몬은 1933년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흑인이다.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63년에 ‘I have a dream(나는 꿈이 있다)’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1968년, 시몬도 유명한 노래 하나를 남겼다.

 

 

 흑인이 백인들 학교에 최초로 입학했던 때가 1957년이란다. 말하지 않아도 시몬이 어떤 모멸감과 자격지심을 가지고 살아야 했을지 짐작이 간다. 요새말로 ‘갑질’을 당했다. 미국의 백인 주류층의 차별과 갑질을 견뎌야만 했다.

 

 시몬의 그 노래는 제목이 ‘Ain’t Got No, I Got Life’다. 그 뜻은 ‘가진 것 없지만 난 생명이 있네’이다. 노래는 비통하게 시작한다. 난 집도, 신발도, 엄마도, 문화도 없다며 당시 가난하고 소외받던 흑인의 애환을 읊는다. 그런데 노래는 밝게 끝을 맺는다. 없기만 한 줄 알았더니 아니란다. 알고 보니 머리카락도 있고, 귀도 있고, 눈도 있고, 예쁜 미소도 있는, 아주 가진 것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진 것 많노라 노래한 니나

 

 1940~50년대에 미국에서 흑인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건 어떤 일일까? 태어난 곳도 타고난 피부색도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신이 부여해 준 것이라면, 과연 일생을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 얼마나 가진 것이 없으면 머리카락, 눈, 귀가 있다고 즐겁게 노래를 할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노래가 측은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감격스럽고, 마치 찬송가처럼 자신마저 돌아보게 한다.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라는 찬양이 떠오른다. 나라의 정세에 불평불만도 있지만,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구의 상류층에 속한다. 조금만 세상을 둘러보아도, 사실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꽃다운 나이에 강제적으로 끌려가 무시무시한 할례를 받으며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이 무수히 많다. 학교가 아닌 노동 현장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돌을 깨고 있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말이지만, 컴퓨터 앞에 편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는 사실 얼마나 큰 복락을 그들보다 먼저 누리고 있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버릇처럼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하기 전에, 이미 부여받은 것부터 감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한 낮을 밝히는 햇살에도 감격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난 참 가진 것이 많은 자다. 머리카락만 빼고 없는 게 없다.

 

먼저 된 자, 12제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소위 먼저 복 받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의 열두 제자다. 역사상 예수로부터 직접 사교육을 받은 유일무이의 존재다. 그들이 후에 초기 기독교 운동을 이끈 사도가 되었다. 이들이 누렸던 복을 조금은 늦게 누렸던 이들이 있었다. 예수가 살던 곳의 유대인들이다. 성경에는 그냥 ‘무리들’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한번은 예수와 제자들이 어느 마을로 가는데,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누가복음 9:11) 무려 5,000명이 쫓아왔다. 랍비들보다 훨씬 더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신다고 소문이 자자했기에 그들은 행복했다. 아픈 병도 치료해 주었으니 황홀한 시간이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무리들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1620년대 지오나니 란프란코 작 '빵과 물고기의 기적'.

 

 반면 예수의 제자들은 어땠을까?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 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9:12) 5,000명이나 되는 무리를 다시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해결하고 돌아오게 한다? 이건 그냥 집에 가라는 말 아닌가? 그 수많은 군중이 한 번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아마도 그날 저녁 집회는 취소하여야 할 것이다.

 

 제자들의 심중이 그러했다. 자기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많은 가르침도 받았고, 언제든지 곁에 계시기에 아쉬울 것이 없다. 무리들보다 먼저 복락을 누리던 자들이었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알았지만, 자기들보다 늦게 누리는 자들에 대한 배려와 자애가 없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속마음을 훤히 뚫어보고 계셨다. 예수는 제자들의 제의에 이렇게 답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9:13)

 

12 제자에겐 기꺼운 마음이 없었다

 

 성경에는 ‘먼저 된 자’ 와 ‘나중 된 자’라는 표현이 있다. 먼저 된 자들, 남들보다 먼저 받은 복이 있는 사람들은 나중 된 자들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예수는 이 나중 된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셨다. 스승의 이 마음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제자들이 먼저 나서서 먹을 것을 구하러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어서 제자들이 답했다. 궁색한 변명이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9:13) 가난한 스승을 비꼰 것일까? 돈 주시면 가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정말로 돈이 문제였을까? 무리들이 예수를 만나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그들에게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대신 먹을 것을 사러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열두 정예 제자와 비정예 수행원들까지 합하면 수십 명은 되었을 텐데. 그냥 수고가 싫었나 보다. 예수와 함께하는 복락을 자기보다 나중 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 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는 수 없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베풀었다. “예수 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9:16-17)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저녁집회가 끝나고 제자들을 스승 앞에 집합했을 것 같다.

 

받은 복을 세어보라

 

 이 땅에는 분명히 남들보다 먼저 된 자들이 있다. 날 때부터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기도 하고, 넉넉한 부모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아 상류사회에 쉽게 입성하기도 한다. 빈익빈 부익부가 따로 없다. 가진 자들은 더 가질 수 있는 기회에 근접해 있기 마련이고, 없는 자들은 그 기회마저도 부여되기 어렵다.

 

 내게 좋았던 것은 남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까? 내게 좋은 것을 끝까지 나만 누리려고 하는 게 악질이다. 내게 좋은 것을 끝까지 나만 누리고, 남들마저도 자기 복락을 위해 희생시키려 하는 악질이 곧 ‘갑질’이다. 서구문명의 고약한 흑인 노예제가 그 갑질 중 갑질이었다. 예수는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위해 헌신하길 바라셨다. 내게 기쁘고 좋았던 복락은 남들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배려 말이다.

 

 더 나아가, 자신을 둘러보면 먼저 된 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시몬의 노래처럼, 눈과 입과 팔다리만 있어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처지를 비관하기 보단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다. 받은 복을 세어보자. 정말 큰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출처> 2018. 5. 19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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