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교육으로
겁쟁이 제자들을 일꾼으로… 예수는 탁월한 교육자였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2000년간 나라 없이 헤맸어도
가정교육 습관화와 문답 중시의 전통 교육방식인 하브루타 덕에
유대인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
예수 죽은 후 도망갔던 제자들, 이기심 버리고 말씀 전파 나서
성령 체험 통한 감화뿐 아니라 예수 통해 헌신을 배운 덕분
이스라엘에서는 아이가 두 살만 되면 교육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런 조기 교육이 정부의 지원 속에 시행되기 때문에 부모의 부담도 크지 않다. 이스라엘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신 분이 전하는 일화가 있다. 그분의 큰 딸이 세 살부터 그 교육을 받았는데, 학교를 다녀온 아이가 하루는 자기가 학교에서 만든 것이라며 과자 하나를 내밀더란다.
유대인들이 명절 때 먹는 ‘무교병’이었는데 “아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날에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 나오느라 맛이 없대요”하면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세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유대인의 민족적 역사적 고통을 빵을 만지고 맛보면서 오감 체험을 하더란다. 아이가 그렇게 쉽고 강력하게 교훈을 흡수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셨다고 한다.
유대인의 교육법 하브루타
노벨상 수상자 30%를 유대인들이 차지한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의 경이로운 교육방법에 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유대인들 못지않게 강한 교육열과 인재를 보유한 우리나라이지만 그 성과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다. 하기야 만 20살을 인생 정점으로 삼고 대입에만 몰입하는 한국의 교육이 큰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얼핏 살펴보기만 해도 주입식 교육을 하는 한국의 수동적인 학습 방식과, 열띤 토론으로 적극적인 참여 학습을 하는 유대인의 ‘예시바(yeshiva)’ 교육은 그 격차가 크다.
예시바는 주로 탈무드나 성경을 통해 종교적 전통과 문헌을 공부하는 유대인들의 교육기관을 일컫는 말이다. 예시바 교육의 가장 큰 특색은 ‘하브루타(havruta)’라 불리는 학습에 있는데, 같이 공부하는 ‘교우’를 옆에 두고 늘 같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협의하는 방식이다. 일방적으로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이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서로 종교적 본문을 놓고 대등하게 토론하고 논쟁하며 새로운 시각과 해결법을 창출해 내는 교육 방식이다. 특정 점수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숙지를 해야 하는 우리의 교육 여건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방식이다. 유대인들의 창의성은 하브루타 교육 방식에 크게 기인하지 않았을까?
날마다 가르치라 ‘쉐마’ 정신
여기에 더하여, 간과하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가 그들 교육 전통에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생활의 ‘습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생 임무는 부모가 되어 가정에서 자녀에게 날마다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 정신은 유대인들의 ‘쉐마(shema)’에 잘 담겨있다. 쉐마는 유대인들이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기도 전통을 말하는 것인데, 하루에 두 번씩 드리는 종교적 명령으로서 유대교 예배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특히 부모는 자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 기도문을 가르친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명기 6:4-5) 이 기도문의 ‘들으십시오’가 히브리어로 ‘쉐마’다.
부모가 가정에서 가르치라
유대 종교의 유일신 사상이 담겨있는 이 문구를 그들은 늘 암송하고 기도를 했기에 2,000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녔어도 자신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늘 암송하고 기도하라는 것도 성경이 명령하는 바였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신명기 6:6-7)
이 명령은 다름 아니라 교육을 습관화하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종교적 전통을 학교보다 먼저 ‘가정’에서, 선생보다 먼저 ‘부모’가 앉으나 서나 가르치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종교적 신념이 교육적 사명과 결합된 모양이다. 이 교육의 현장은, 자녀들의 생활 습관이 가장 잘 만들어 질 수 있는 가정이었다.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아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세대를 생각하여 보아라. 너희의 아버지에게 물어 보아라. 그가 일러줄 것이다. 어른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해 줄 것이다.”(신명기 32:7)
▲하르부타 교육 광경. 친구와 점수를 두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새로운 해석과 이해 방법을 찾아나간다.
유대 전통에서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유대인들의 종교와 그 정체성이 ‘교육을 통해서만’ 생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시조(始祖)로 아브라함을 선택했을 때에도, 그 배경에는 ‘교육’이 있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세기 18:19) 이 구절을 따르자면 미래의 축복은 교육에 달린 것이다.
묻고 답하기가 아닌 ‘학원 뺑뺑이’
우리가 부러워하기도 하는 유대인의 교육은 가정에서 비롯된 ‘교육 습관화’다. 그 교육은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간의 ‘묻고 답하기’식 교육이었다. 이들의 교육 방식은 지금 우리들의 교육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 가정에서 부모가 감당할 교육 역량은 ‘묻고 답하기’가 아니라 ‘재력’에 달린 듯하다. 공교육을 넘어 사설 학원이 없이는 대입 경쟁에서 밀리는 판이니, 우리 자녀들이 취하게 된 습관은 교육 내용이 아니라 학원 버스 타기가 되었다. 학원은 대입을 위한 점수 탈환에 더 노골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경직된 교육 현장에 ‘묻고 답하기’가 있을 리 없다.
따르던 스승 예수가 죽고 나서, 그의 제자들은 패배자가 되어 다 도망갔다. 예수의 3년간 교육이 무색할 정도다. 예수도 실패한 교육가인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도망간 겁쟁이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했다. 곧이어 기독교가 태동하였고, 지난 2,000년간 인류 역사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변화된 삶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4-47)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예수의 지질한 제자들이 변할 수 있었을까?
예수 제자들도 교육 덕에 변했다
예수는 죽기 전 제자들에게 이런 예언을 하셨다. 하늘에서 성령(聖靈; Holy Spirit)이 내려와 그들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며, 이후 제자들은 열렬한 예수 전도자들이 되었다.(사도행전 1장) 그래서 의문이다. 어차피 그런 영적인 체험을 통해 사람이 변할 것이면, 예수는 뭐 하러 3년간이나 함량미달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느라 그 고생을 하셨을까?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살아생전 예수가 그들을 ‘교육’시킨 그대로였다.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거라.”(누가복음 9:3-4)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교회에 가서 성령이 임하는 체험을 하거나 신앙적 감화로 큰 회심을 하여 변화된 삶을 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예수의 제자들이 초대 교회를 이끌며 그렇게 모범적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화뿐만 아니라 예수와 함께 욕심을 버리고 헌신하는 훈련을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육의 결과였다.
뜬금없는 말 같지만,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는 변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계다. 일제식민치하를 그토록 치욕스러워 하면서, 아직까지 제일 뚜렷이 잔존해 있는 일제의 흔적이 바로 대한민국의 ‘학교’다. 한반도의 큰 변화가 고대되는 시기다. 진정한 변화는 핵폭탄이나 미국에 달려있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후세대의 교육에 달려있다.
<출처> 2018. 5. 5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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