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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화를 낸 기록만 많은 예수, 왜였을까

by 혜강(惠江) 2018. 12. 2.

 

예수는 웃지 않았다

 

화를 낸 기록만 많은 예수, 왜였을까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눈 먼 사람을 고쳐준 예수

제자들과 바리새파들은 눈 뜬 기적을 축하하기 보다
“왜 눈 멀었나” 원죄 따지고, “안식일에 왜 치유행위” 시비
4주기 맞은 세월호 참사
자식 잃은 고통을 앞에 두고 정치적 이념을 따져서야…

 

 

▲ 란체스코 하예즈의 1841년작, '예수와 간음하여 잡혀온 여인'. 예수 옆에 바리새인이 서있고, 간음한 여인은 돌팔매 당하기 직전이다.

 

 

 예수는 웃은 적이 없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러하다. 그런데 정말로 웃은 적이 없었을까?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그도 분명 웃었던 적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성경이 웃는 예수를 묘사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까꿍’ 했을 때에도 예수는 근엄했을까? 어느 아기들처럼 아마 잘 웃었을 것이다.

 

 웃은 기록은 없지만, 화를 내신 기록은 많다. 웃는 예수보다는 성난 예수를 더 부각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인 것 같다.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 크게 화를 내셨고, 사람들과 언쟁도 하셨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예수는 종교 정치지도자들에게 자주 화를 내셨다.(요한복음 7:28-30) 당시에는 종교지도자들이 곧 사회지도자들이기도 했다. 지금으로 보자면 국회의원들이나 교회 목사들과 자주 싸우셨다는 것이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무엇을 그토록 싫어했는지는 분명히 알아낼 수 있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 예수

 

 어느 누가 보아도 죄인이었던 이들에게는 이상하게도 예수가 화를 낸 적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예수 앞에 끌려왔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예수는 멋진 말로 이 여인을 보호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가 이 여자가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 여인은 분명히 죄인이고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8:11)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여인이 죄인이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점잖은 사회 지도자들에게는 펄펄 화를 내시던 예수가 왜 간음한 여인에게는 이토록 자비로웠을까? 사실 예수는 사람을 죄인이냐 의인이냐에 따라 구분 지어 대하지 않으셨다. 죄인과 의인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형용사가 중요했다. 그 여인은 죄인이지만 ‘불쌍한’ 죄인이었고,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의인이지만 ‘인간미가 없는’ 의인이었다.

 

죄인이 될 처지를 보라

 

 예수에게는 ‘사람이 누구냐’ 보다는 ‘사람의 처지’가 더 중요했다. 바리새인과 같은 지도자들은 법을 잘 지키며 살만한 사람들이었다. 넉넉하고 여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푹 잘 쉬고 여유롭게 예배에 참여 할 수 있었으며, 사흘쯤 쉬면서 금식기도 해도 먹고 사는 것에 별 지장이 없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죄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 무모하고 충동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모범적이고 우아하게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절박했던 이들이다. 이처럼, 사람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동정’과 ‘연민’이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그런데 예수 제자들의 질문이 황당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평생 어둠 속에 갇혀 살았던 시각장애인의 고통이 이들의 우선 관심이 아니었다. 자기들의 알량한 신학적 관념이 더 우선이었다. 불우한 사람 앞에서 죄 타령을 하는 몰지각한 종교인이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치유 능력을 잘 아는 이들이었다. 어서 이 시각장애인을 치료해 주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예수께 부탁부터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앞에서 신학부터 논하니, 참 인간미 떨어진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그 무엇보다도 연민과 동정으로 바라보던 예수를 전혀 닮지 못하던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관심을 신학에서 치유로 바꾼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한복음 9:1-3) 그리고는 그 장애인을 치료하시어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

 

“안식일날 왜 죄인을 치유했느냐”

 

 예수가 눈을 치유하자 종교-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다. 예수가 치유를 했던 날이 유대교 법에 의하면 사람이 모든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9:16) 기가 막힌 노릇이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눈을 떠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데, 이들은 그 사람의 처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된 기적과 축복을 축하하기 보다는, 자기네 법과 이념이 중요했다.

 

 

칼 블로흐의 1871년작, '시각 장애인을 치유하는 예수'.

 

 유대의 사회적 종교적 이념이 뭐건, 예수님의 관심은 단 하나였다. 고통으로 인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급기야 눈을 뜬 시각장애인의 부모를 찾아갔다. 아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이 부모에게는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겠지만, 이들은 일언의 축하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아들이 눈을 뜨게 되었는지 말하라며 윽박을 질렀다. 부모는 겁이나 예수가 치유했다고 말을 못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9:22) 참 못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과 관련 있는 종교적 정치적 기구의 운영과 안녕이 우선이었다. 역시 불우한 사람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사람의 처지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 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예수는) 죄인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하여 고통 속에 있던 이에게 그런 정치적 신학적 이슈가 중요했을까? 그에겐 단 하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 하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24-25) 어둠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기쁨 그것이 전부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 하나에 같이 기뻐해 줄 수 없던 것일까? 예수가 누구였는지 예수가 법을 지켰는지 아닌지가, 한 사람을 그 극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 보다 그토록 중요한 문제였을까? 사람이 사람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종교도 정치도 이념도 다 사람 돌보자는 것인데 말이다.

 

세월호 앞에서 이념을 따지고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는 한국 사회의 풍경은 예수의 뜻과 전혀 다르다.

 

4월 세월호의 비극

 

 2018년의 4월이 왔다. 유달리 마음이 아픈 달이다. 이번이 네 번째 4월이다. 수백 명의 엄마와 아빠가 어린 자녀들을 차가운 바다에 잃어버린 지 아직도 네 해 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자식을 잃는 것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4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을 고통이다.

 

 그런데 그들을 두고 우리 사회는 참으로 부끄러운 행각도 보여 왔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식을 잃은 고통을 앞에 두고 정치적 이념을 따지기도 했다. 예수의 어리석은 제자나 예수와 늘 격하게 싸우던 바리새파의 행위와 다를 바 없던 일이다. 단식을 하던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던 세기적 폐륜도 우리 사회는 이미 저질렀다. 자식을 잃었다는 억만년 같은 고통에 아직은 다 같이 슬퍼만 해 줄 수 없을까?

 

 따지기에 앞서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것이 4월의 비극을 대하는 예수의 마음일 것이다. 예수의 웃음을 제거한 성서의 의도는 이 달에 더욱 적합해 보인다. 고통받는 이들로 인해 진중해야 할 것이며, 고통부터 위로하지 못하는 것에 웃음기가 가실 수밖에 없다. 그 무엇보다도 고통에 대한 연민이 깊으신 분이시기에 더 그러하다.

 

<출처> 2018. 4. 13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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