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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의 부활, 인간 구원의 드라마이며 성경의 클라이맥스

by 혜강(惠江) 2018. 12. 2.

 

예수의 부활

 

인간 구원의 드라마, 성경의 클라이맥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인간의 원죄 해결을 위해 구약이 제시한 ‘율법’의 실패 후
신약은 예수의 대속이라는 ‘구원의 은혜’를 제시

 

 

 

세바스티아노 리치의 18세기 작품 '부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것이 성경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버나드 앤더슨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오래도록 강의하셨던 저명한 성서학자다. 타계하신 분이지만, 나는 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칠 때마다 이분은 한국의 신학교를 위해 태어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성서에 대한 학문적 시각과 신앙적 성찰을 잘 균형 잡아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이 온건한 학자께서 성서를 말할 때마다 자주 언급하는 표현이 있다. 성서는 하나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성서 읽기의 어려움

 

 성서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신앙적 열기에 도전도 하지만, 완독에 실패하기 일쑤고 완독해도 곳곳의 의미를 쉽게 간파하기는 어렵다. 성서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책일까?

 

 개신교 성서는 66권의 개별적 책이 집결해 있는 하나의 전집이다. 각 책의 내용이 매우 개별적이고 순서도 꼭 시간 순은 아니어서, 어느 독자든지 익숙하지 않은 읽기를 해야만 한다. 많은 신앙인이 성경을 읽어 보기도 전에 교회로부터 성경에 대한 정보를 쉽게 습득하기에,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도전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 읽기 시작하면 진땀이 난다.

 

 우선, 성경은 꽤 두껍다. 성경 안의 책들은 저자들이 제각각이고, 저술 시기도 서로 간에 큰 간격이 있다. 견해차가 있기는 하지만, 적게는 400년에서 많게는 1,000년간의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발달한 책이 성경이다. 워낙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보니,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책마다 다르기도 하다.

 

 기독교 성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뉘어 있다. 구약성경은 본래 유대교인들의 경전이었다. 이 유대교로부터 예수가 출현하였고, 급격한 복음전파로 인해 기독교가 탄생하였다. 예수도, 바울도, 초기 예수 운동가들도 대부분 유대교인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보던 유대교 경전을, 예수 이전의 약속이라 생각하여 ‘구약’이라 불렀다. 예수 운동 이후 저작된 그들의 문헌을 새로운 약속이라 보고 ‘신약’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엮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많은 유럽이나 북미 지역에는, 서점에 기독교 성경뿐만 아니라 유대교 성경도 같이 진열되어 있다. 유대인들의 성경을 사게 되면, 신약이 없어 예수의 가르침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구별하기 어렵지 않다. 유대인들의 성경은 ‘타나크(Tanakh)’라고 책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유대인의 타나크도 개신교의 구약성경과 내용은 똑같다. 다만 책의 배열 순서가 좀 다를 뿐이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언어도 다르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각 언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실’낙원에서 ‘득’낙원으로

 이 방대한 분량과 다양한 내용이 뒤섞인 성경을, 앤더슨은 하나의 드라마라고 말한다. 단순화의 오류도 있겠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성서를 알기 쉽도록 접근하게 한다. 평소에 드라마 시청을 좋아하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드라마는 늘 어떤 문제로 시작한다. 사랑하는데 집안이 반대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 애태우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마지막에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는 눈물의 종결이기도 하다. 드라마 후반부에는 문제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클라이맥스가 항상 극적으로 등장한다. 시청률이 최고조에 이르러야 하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의 성경 타나크 표지. 히브리어 본문과 영어 번역이 함께 있는, 영미권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성경이다.

 

이제 죄사함을 받은 인간은

그 은혜가 마음에 넘치면 의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그것이 율법과 구원의 완성

 

 성서도 문제로 시작한다. 펼치자마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딱 두 장뿐이다. 첫머리에 속하는 창세기 1~11장은 대부분이 인간의 ‘죄’를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벽한 낙원을 주셨지만, 인간은 죄인이 되어 그 낙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이 혼내시기도 했지만 인간은 교정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지었다는 것이 성서 드라마의 제1편 내용이다. 이렇게 성경은 ‘실낙원(Paradise Lost)’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다. 성경을 펼치는 누구든지 이것부터 알고 읽으라는 것이다.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리를 잘 설명하는 로마서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로마서 3:23) 인간은 성서 드라마의 마지막 편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는다. 성서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개하며, 소위 ‘득낙원(Paradise Regained)’을 암시한다.(계시록 21:1~8) 그리고 성경의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성서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낙원을 잃어버렸다가 이를 다시 되찾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드라마다. 성서는 그 여정의 현장 가운데에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증언하는 책이다.

 

구약의 해결책은 ‘율법’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인간은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을까? 해결을 위해 드라마 전반부인 구약성서에는 인간에게 ‘법’이 주어졌다. 법을 잘 지켜 선하고 의로워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올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바로 ‘낙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인간 구하기’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로마서 3:20) 사람을 구하겠다는 법이 도리어 사람이 죄인임을 확증할 뿐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를 잘 방증한다.

 

 실패한 인간은 이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치러야 할 형벌은 바로 ‘죽음’이다. 어떻게 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을 구할 수 있을까? 이때 하나님이 다시 결정적인 개입을 하신다. 죄의 대가를 누군가가 대신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그 ‘희생 제물’이 바로 자신의 아들 예수였다.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기 위해 감내하여야만 했던 예수의 고통을 기렸던 것이, 지난 ‘고난주간’이었다. 고난주간이 끝나면, 죽음을 맞이한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리는 ‘부활주일’이 온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바로 성서 드라마의 최고 시청률 편이며 문제 해결의 클라이맥스다. 예수의 죽음이 형벌이었다면, 그의 부활은 죄의 문제를 해결한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그 문제 해결을 받았다는 증거는, 감옥으로부터 당당히 걸어 나오는 것 아닌가? 부활은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7) 그리고 이 문제 해결은 반드시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뛰어넘는 ‘기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신의 간섭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은혜’를 제시하는 신약

 

 구약이 인간에게 ‘법’을 제시했다면, 신약은 인간에게 ‘은혜’를 제시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인해 사람은 ‘공짜로’ 사형선고를 면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로마서 3:24)

 

 그렇다면 법은 이제 쓸모없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는 자신이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마태복음 5:17) 전에는 인간이 법의 정죄가 무서워 선하고 의롭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의 감격이 넘쳐 나서다. 전처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살아가야 할 참된 삶의 방식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감격이 마음에 넘쳐나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법의 완성이며 동시에 구원의 완성이다. 마음에 그 은혜가 살아 넘치느냐 아니냐가 차이를 만들 것이다. 법이 실패하였다 하여, 법의 이상마저 포기된 것은 아니다. 바울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로마서 3:31) 성서의 인간 구원 드라마는 이와 같은 이야기다.

 

<출처> 2018. 3. 30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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