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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최고의 것은 나누는 것, 아낌없이 나눈 예수처럼, 자신의 '금속활자' 묻어두지 말아야

by 혜강(惠江) 2018. 12. 1.

 

최고의 것은 나누는 것

 

아낌없이 나눈 예수처럼, 자신의 '금속활자' 묻어두지 말아야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국제인쇄박물관(International Printing Museum)에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가 적용된 인쇄기를 실제 사용해 보이고 있다. 금속활자라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나누겠다는 정신이 구텐베르크를 더 빛나게 했다.

 

 

 특별히 오리엔탈 컬렉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그 방을 드나들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 방 입구 쪽에 작지만 눈에 띄는 전시를 해 놓았는데 바로 한국의 금속 활자에 관한 것이었다. 런던의 영국도서관(The British Library)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보다도 88년이나 앞서 한국이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었다며 한동안 그 전시를 하였다. 학생 때라 도서관 가는 마음은 런던의 날씨처럼 늘 음울했지만, 그 방에 들어갈 때면 활짝 개는 듯 했었다.

 

 그래서 영국 공영방송 BBC가 실시했던 조사에서, 지난 20세기 동안 가장 위대했던 발명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뽑혔을 때 적잖이 아쉬웠다. 기계로만 보자면 한국이 먼저 만들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결과에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나눔으로써 빛난다

 

 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유럽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닳지도 않으면서 짧은 시간에 수천 수만 개의 인쇄물을 찍어 냈으니, 이로 인해 정보는 급속도로 수많은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전에는 소수의 특별 계층만 향유할 수 있던 지식을 이제는 다수의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하게 되었다. 지금의 인터넷이 만들어낸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꽤 전문적인 의학이나 기술 지식도 이제는 어느 누구든지 인터넷만 두드리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기가 없었더라면 15세기의 마틴 루터 종교개혁도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구텐베르크는 최고의 것을 만들고, 많은 이들을 이롭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이 만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것과는 매우 다르게 사용되었다. 절대 대량의 책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적당한 수의 책을 찍어내어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에게만 정보를 전달한 것이다. 심지어 대중을 위한 한글 인쇄는 거의 없었고, 양반들을 위한 한자 인쇄를 주로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그 좋은 금속 활자는 많은 이들의 공공 이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구텐베르크의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일구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구의 것을 들어 우리네 과업을 폄하하는 것 같아 좀 죄송하다. 하지만 거듭 생각해볼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한 선민의식, 나눔을 거부하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이 최고의 것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되었다. 하지만 이 최고의 것이 절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아니었다. 반드시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여 왔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어야 한다고 자주 피력했다.(이사야 42:6; 49:6; 60:3) 애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시조 격인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에도 분명히 알렸다.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를 통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창세기 12:1-3)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누기를 꺼려했다. 강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방사람들을 어지간히도 미워했다. 하나님은 자기네만 사랑하시고 자기네만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 하며, 자기네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망각해 버렸다. 그래서 성경의 룻기는 털어놓았다. 이스라엘 최고 왕인 다윗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던 이방인 모압 사람을 증조할머니로 두고 있다고. 요나서도 토로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민족주의는 완강했다. 그래서 민족의 정치적 독립보다, 민족에게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던 예수를 그들은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예수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사람들에게 열렬히 전해져, 지금의 한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얻지 못한 이유를, 기독교 교리의 창시자인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스라엘은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로마서 9:31-32)이라는 것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쉽게 생각해 보자. 그들은 빈틈없는 행위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희생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와 정성껏 바쳤고, 율법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잘나고 잘했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는 모든 것을 나누었다

 

 반면 이방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렀다고 바울은 말한다.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고 율법도 지키지도 않았지만, 예수가 구원자라는 소식을 듣고 믿기만 하면 의로워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짜’였다. 노력도 안 했고, 해도 안 될 것 같은 부실한 사람도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였던 것이다. 노력과 행위로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기들의 수고가 너무 아까우니까.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남들은 노력도 안 했는데 공짜로 얻는다면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얻게 된 것이 있다면, 누구든 당연히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한번 자기 것이 되면, 그런 노력도 안 한 다른 이들에게는 나누어주기 싫어진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가지게 된 심보였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으니, 하늘의 복락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했었다.

 

 예수도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그들이 끔찍이 싫어하던 사마리아의 여인이나 이방인들과도 나누었다. 비천한 어부나, 매국노 세리, 부정한 창녀들과도 나누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이 받은 최고의 것 바로 예수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었다. 더 나아가 자기들의 생활과 소유마저 이웃과 나누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사도행전 2:44-45) 최고의 것은 역시 나누는 것이다.

 

아직 나눌 시간 이틀이 남았다

 

 서울의 연세대학교를 잘 아실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문 대학이다. 이 대학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매우 기념비적인 학교인데, 1885년 한국으로 들어온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설립한 기관이다. 그는 원래 인도에 선교사로 가길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변 동료 선교사 어느 누구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자신이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연세대학교에 세워진 언더우드 동상. 당초 계획했던 선교지는 아니었지만 언더우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한국에 쏟아 부었다.

 

 언더우드는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고의 것을 한국에 주기 위해 그는 신학뿐 아니라 의학도 공부했다. 한국어 공부도 최선을 다하여서, 심지어 나중에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크게 공헌한다. 번역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 최고의 것을 주기 위해 결국 교육 기관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 기관이 발전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된 것이다. 언더우드는 정말 자신을 최고로 만들었고, 그 최고의 것을 한국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인재들이 연세대학을 통해 배출되었고 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어느덧 또 한 해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때이다. 정말 올 한해 최선을 다했다며 자축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 결과 경제적 이익과 명예도 얻었을 수가 있을 텐데, 이를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기꺼이 나눈다면 구텐베르크의 기계처럼 이웃에게 큰 의미를 남기리라 믿는다. 나누지 않는다면 그저 한국의 금속 활자처럼 아쉬움만 남을 수도 있다. 신앙인에게는 나누어 주는 것이 당연한 삶의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금속 활자를 아깝게 묻혀두지 마시길. 2017년 한 해, 아직 베풀 수 있는 날이 이틀이나 남았다. 이틀 뒤 새해에는 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 오직 더 나누어 주기 위해서.

 

<출처> 2017. 12. 30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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