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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언을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

by 혜강(惠江) 2018. 12. 1.

 

‘성모’ 아닌 ‘어머니’ 마리아

 

예언을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너무나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예감이 하나씩 실현되어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만 했다.

 

임신 때의 황당한 계시를 잊고 평범한 모자로 살고 싶었으나
“성전이 내 아버지 집입니다” 어린 예수의 말에 계시 되살아나며
모성과 신앙 사이 끝없이 갈등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마리아는 마을 밖으로 끌려 나가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걱정에 휩싸였다. 약혼자 요셉에게 어떻게 이 말을 꺼내야 할까. “아기를 임신했어.” 맘 좋기로 유명한 요셉이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어 가만히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당연히 어떤 놈이 자기의 약혼녀를 임신시켰을까 궁금했을 터. 성령으로 임신했다는 마리아의 횡설수설에 요셉은 더더욱 마음을 굳히려 했지만, 다행히도 꿈에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내려주어 다시 마리아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어리숙했을 소녀였지만 지금은 성모(聖母)로 일컬어질 정도다. 어린 처녀로서 그리고 사회에 큰 요동을 일으켰던 아들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큰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며 살았지만, 그녀는 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존경받는 진정한 이유가 달리 있다. 마리아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며 가장 위대한 존재, 어머니. 성모라는 신비감보다 한 아들의 어머니였다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를 더 깊이 성경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녀는 가난하게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태어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율례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그들이 드린 제물이 비둘기였는데, 이는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예물이었다. (레위기 5:7) 남편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 또한 그녀의 가정이 잘 살았더라도 소탈했을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어린 예수를 바라보던 마리아의 마음은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예수가, 내 아들 예수가, 아빠는 하나도 안 닮고 엄마만 쏙 빼 닮은 예수가,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 장가가서 자식 낳고 잘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어느 어머니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처럼 말이다. 임신했을 때의 계시와 황당했던 경험은 어쩌면 잊고 싶었을 것이다.

 

점점 드러나는 예수의 운명

 

 아니 진짜로 잊고 살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열 두 살이었을 때 예루살렘을 같이 갔다가 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흘 뒤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던 예수를 찾아냈는데, 당장 달려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며 여느 부모처럼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소년 예수는 왜 자기를 찾느냐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냐하며 낯선 말대꾸를 하였다. 아버지 요셉 앞에서 여기 성전이 자기 아버지의 집이라 한 것이다.

 

 어쩌면 열두 살 예수는 이미 자신의 숙명을 알았으며,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아님을 부모에게 알린 것이리라. 지난 12년간 묻어있던 그 옛날의 계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누가복음 2:50; 이하 새번역) 사실 부모는 잊고 싶었고 잊었던 것이다. 예쁜 자기 아들 예수의 믿지 못할 숙명을 말이다. 같이 부모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좀 달랐다. 성경의 다음 구절은 아버지 말고 어머니만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2:51) 이 사건 이후 아버지 요셉은 사실 무대에서 사라진다. 어머니 마리아만 예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알지만, 성부 요셉은 우리는 모른다.

 

 이 일 이후에도 10대 예수의 모습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고, 그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전한다.(2:52) 그러나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 그 가정에는 무거운 전운처럼 감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열일곱, 열여덟이 되어도 장가갈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요셉은 이유를 묻기도 하였겠지만, 무언가를 마음에 간직하였다는 어머니 마리아는 묵묵한 예수를 그저 먹먹하게 바라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들 예수의 그 아픈 말로를 알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자기 아들을 쉽게 떼어 놓을 수 있는 엄마는 아무도 없다. 참 마음 아프게도 성경은 아들 예수가 자기 엄마 마리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또 이렇게 말한다. “아기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2:40) 아기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의 바람 꼭 그대로다.

 

어머니 마리아를 외면하는 예수

 

 잊고 싶지만 이제는 자꾸만 기이했던 그때의 일들이 기억에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어느 하나가 또렷하다. 처음 아기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어느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했던 말이 있었다. 그가 아기를 안더니 예수를 두고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며 한껏 칭송을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2:33). 그 다음, 정말 알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빼고 어머니 마리아에게만 했던 말이다.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2:34-35)

 

 아들 예수로 인해 칼이 자기의 마음을 찌른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그 먹먹한 마음을 두고 마리아는 커가는 예수를 지켜봐야만 했다. 마리아는 모성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모성은 마리아를 자주 혼돈 속에 빠트렸다. 집을 나간 후 변변치 않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던 아들을 찾아, 한번은 그 일하는 곳에 찾아 갔었다. 아들을 보고 그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은 심정에 찾아갔으나, 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소식을 들은 예수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마가복음 3:31) 그리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자신의 형제요 자매며 어머니라고 설교를 이어갔다.

 

 그래, 아들 일하는데 찾아오질 말았어야지, 아마 깊은 뜻이 있어서 한 말일 거야. 이렇게 마리아는 읊조리며 돌아섰을 것이다.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돌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사실 예수도 눈길을 떼지 못했을 것 같다. 마리아가 한 번 만이라도 뒤를 돌아다보았다면, 예수가 그 눈빛만으로도 “어머니”하고 불렀을 텐데. 하지만 예수도 마음을 다독여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어머니와 정을 떼지 못하면, 서로 더 힘들어 질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누가 내 어머니인가” 박대하며
차갑던 예수도 죽음 직전엔 제자들에게 어머니를 부탁

 

 

 

루카 지오르다노의 1672년 작 '수태 고지(受胎告知)'. 마리아도 정상적인 엄마로 살고 싶었을 지 모른다.

 

 

최후의 순간 어머니를 받아들인 예수

 여자가 처음 아기를 가지면 얼마나 마음이 설렐까? 어린 마리아도 다르지 않았고, 그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로 불렀다. 기독교 전통 속에 ‘마그니피캇(Magnificat)’ 혹은 ‘마리아 송가’로 알려지게 된 유명한 노래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누가복음 1:46-50; 개역개정)

 

 어머니 마리아는 가슴에 칼이 꽂히는 아픔을 감내하였고, 성모 마리아는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음을 받는 여인이 되리라고 찬송을 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어머니 마리아는 와 있었다. 그의 처참한 마지막을 다 보았다. 죽기보다 보고 싶지 않았겠지만, 죽어도 꼭 보아야만 했다. 아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어머니에게 했던 마지막 말씀이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그 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복음 19:26-27; 가톨릭 성경) 전에 자기를 찾아왔던 어머니에게 했던 매몰찬 반응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에게 어머니를 모실 것을 당부하시고, 아들 예수는 숨을 거두었다.

 

<출처> 2017. 12. 9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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