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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신성의 또 다른 얼굴, 여리고성 싸움에서 드러난 잔혹함

by 혜강(惠江) 2018. 12. 1.

 

교회의 난제 ‘헤렘(ḥerem)'

 

신성의 또 다른 얼굴, 여리고성 싸움에서 드러난 잔혹함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여리고 성의 함락을 다룬 제임스 티소의 그림.

 

 

 여리고 성 여기저기에서는 벌써 여인들의 혼절한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지켜야 하지만, 여리고 남자들은 이미 넋이 나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익히 그들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 여호와. 그들은 척박한 동편 사막에서 무려 40년을 버티어 살아온 전설의 무리들이며 전직이 이집트 노예들이었다. 가나안 사람에 비해 작은 체구이지만 노예의 후손답게 뼈와 근육이 단단했다. 게다가 그들은 물마저 역행하게 만드는 ‘마력의 신’이 늘 동행하였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독방에 갇혀 만두만 15년간 먹었다 한다. 이스라엘 백성도 사막에서 같은 것만 40년간 먹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주 메뉴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면 흥분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의 맛을 이미 보았고 그 지겨운 만나를 끊었으니, 고기 맛을 본 맹수와 다를 바가 무엇이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의 맛을 보러 더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5:11-12)

 

공포스러운 존재, 이스라엘 군대

 

 이 공포의 무리가 자기네 성으로 온다는 소식에 여리고 사람들은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5:1)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그들이 보여준 결의에 찬 행동을 보면 가히 정신을 잃을 만 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부싯돌 칼을 갈아 자기네 거시기 표피를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닌가. (5:2-3) 전쟁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짐승을 죽여 피를 보는 것이 일반이라면, 그들의 이런 무서운 행위는 남자들의 사기를 끊어 혼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문대로 독하고 무섭다. 아니 공포 그 자체다. 성 밖으로 도망나가려 해도 너무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 도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6:1) 폐쇄는 사람이 자기 삶의 모든 의지를 잃어버릴 때에 종종 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의 검은 그림자가 드디어 여리고에 이르렀다. 큰 함성과 함께 성벽을 타고 올라오거나 문을 부수리라 예상했다. 그들 앞에 목을 내밀어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아내와 아이들은 살려 달라고 빌 참이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의 불꽃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심장 터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 순간을 터트리질 않는다. 천천히 그 군대는 성 주변으로 몰려와 묵묵히 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공기를 얼어 붙이는 묵묵함이다. 여리고 사람들은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맹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았다. 극한 긴장과 인내에 눈앞이 쓰라렸다. 한 바퀴 다 돌았을 무렵 이젠 그 순간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 버렸다. 첫 날이라 살펴만 보고 간 것일까? 그 다음 날도 왔다. 한 바퀴를 돌고, 그리고 그냥 또 돌아가 버렸다. 매일 한번씩, 6일간 이렇게 이스라엘은 성을 어슬렁거리고는 돌아가 버렸다.

 

 허물어져 간 것은 성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사람을 묶어 놓고 이마에 물을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고약한 고문이라더니, 이렇게 여리고 사람들은 무너져갔다. 다음 기록을 보면 그런 전략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6:10)

 

 6일째에는 마음을 도닥이지 못해 정신이 무너져 헛소리를 내뱉고 성안을 헤매는 이가 생겨났다. 나무 가지에 줄을 걸고 목메 자살한 이들도 있었다. 극한 상황에 이르면 자기 새끼를 물어 죽이는 동물들처럼, 자식이 적의 손에 무참히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니 내 손으로 평안하게 끝내버리자는 비장한 각오들마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여리고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상대를 멸절한 이스라엘

 

 7일째 되던 날, 이스라엘은 이미 정신 줄을 놓은 여리고 사람들을 긴장의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새벽부터 도는데 이번에는 일곱 번을 돌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오나 보다 하던 여리고 사람들은 정적이 주는 긴장감에 온 몸의 신경은 터질 듯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이스라엘 무리들이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고 천둥 같은 나팔 소리를 불어댔다. 성 안의 공간이 굉음의 폭격을 당했다. 팽팽했던 여리고 사람들의 신경 줄은 그만 터지고 말았다.

 

 여호수아서 5~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리고성 함락 기록을 ‘입장을 바꾸어’ 재구성해 보았다. 이스라엘에게는 기쁜 승리의 기록이지만, 여리고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는 공포와 참사의 기억이다. 인류 역사상 기억에 남을 고도의 심리 전술이었다. 그리고 아마 최초로 사용된 ‘충격파음 무기(sonic weapon)’ 사용 기록일 것이다. 자비를 구할 틈도 없었다. 남자는 물론 여자, 노인,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이스라엘의 손에 멸절당하고 말았다. (6:21) 가축들도 다 죽였으니 이게 뭔가. 보통은 노략질을 하러 성을 무너뜨리는데, 이들은 다른 것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오직 살육만을 위해 덤벼들었던 피의 축제였다.

 

 신성은 폭력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세속은 하나님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때 파괴가 발생한다. 신성의 폭력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문제는 아니다. 마치 태양이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뜨거운 속성 때문에 근처에 오는 모든 것들은 다 태워버리고 파괴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소위 성전(聖戰)을 치를 때에는 적의 전부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마치 모든 것을 신께 바치는 희생제물처럼 여겼는데, 이런 전쟁 행위를 ‘헤렘(ḥerem)’이라 부른다. 이는 당시 주변 민족들도 행했던 방식이었다.

 

 ‘입장을 바꾸어’ 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제자리에서 몸을 180도 돌리기만 해도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다. 위의 종교적 이론이 한 성읍 사람들에게 행했던 그 폭력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문제는 성서뿐만이 아니다. 성서를 신의 계시로 믿는 교회도 생각해 보자. 타협할 수 없는 교회의 신학적 배타성은 신자에게는 뜨거운 신심이지만 교회 밖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성서를 읽어왔고 교회를 세워왔다. 그런데 그들 중 위의 난제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어 신앙인이 되었다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성서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그냥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즉, 이해가 아니라 체험을 한 것이다. 문제를 풀어서가 아니라 문제보다 더 큰 사랑을 경험하여, 사람은 신앙인 되어왔다.

 

교회는 세속의 욕망을 멸절해야 한다

 

 영화 ‘스피드’를 보면, 어느 버스 안에 설치된 폭탄은 그 버스가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지 않으면 폭발하게 되어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난제는 하나님이 기독교 안에 설치해 놓은 이 폭탄과 같은 것은 아닐까?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헤렘’처럼 세속의 욕심과 자랑을 남김없이 진멸해버려서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속도가 일정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도가 늦추어지면 폭발해 버릴 수도 있다. 교회가 모범적인 실천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하나님은 여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이라도 하듯 그 잔혹함 못지않은 폭력을 스스로에게 가하신다. 자기의 외아들 예수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시고, 십자가의 끔찍한 형벌에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셔야 했으며, 어찌하여 자기를 버리시냐는 아들의 눈물의 호소도 들었어야 했다. 아들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겠다는 것이 아비의 심정 아니던가. 하나님에게 가해진 폭력도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속죄를 통한 인간 구속이라는 종교적 기제를 통해 설명되어져야 하는데, 이는 차후에 알아보자.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는 12월이 어느덧 가깝게 다가와 있다.

 

<출처> 2017. 11. 18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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