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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유일신 사상’은 타 종교 증오가 아니라 외사랑 순애보

by 혜강(惠江) 2018. 12. 1.

 

유일신과 이스라엘판 ‘사랑과 전쟁’

 

‘유일신 사상’은 타 종교 증오가 아니라 외사랑 순애보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야훼의 애절한 부탁에도 이스라엘은 '바알'(왼쪽)과 '아세라'라는 가나안의 신들과 ‘바람’을 피웠다. 유일신 사상은 바람피우지 말고 내게 돌아와 달라는 야훼의 간청이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외국으로 떠나 보내며 공항에서 부둥켜안고 눈물짓는 사내들을 종종 보셨을 것이다. 하나님도 같은 심정이었다. 사랑하는 신부 ‘이스라엘’을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지만, 성경은 자주 이들을 연인이나 부부로 묘사한다. ‘여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막 탈출하였을 때, 이들은 역사 안에서 처음 만났다. 탈출을 도와주었던 강하고 고마운 ‘남자’ 여호와를, 시내 산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그리고 둘에게는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이 광야에서 펼쳐진다. 쉽지 않은 40년의 광야 시절이었다. 여느 신혼부부가 그러하듯 지독히도 많이 싸웠다. 자주 싸웠다는 건 사실 사랑했다는 증거고, 하나님도 이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셨다.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치리라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호세아 2:17ㆍ공동번역)

 

야훼와 이스라엘, 알콩달콩 신혼부부

 

 척박했던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둘은 오직 서로만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인이 사막에서, 비유하자면 베벌리힐스로 가게 되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한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바알’ 그놈 때문이다. 이미 여자는 바알과 밀회를 나누다 들통난 적이 있던 터였다. 가나안 근처 브올 지역에 갔다가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바알이라는 이방 신에게 절하고 그 곳 여인들과 행음을 하였다. (민수기 25장)

 

 더군다나 가나안은 바알의 주무대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를 통해 이렇게 신신당부하였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명기 6:4-5) ‘전과’마저 있던 애인을 공항에서 떠나 보내던 남자의 마음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가서도 남자는 나밖에 없다는 거 그것만 지켜주면 돼. 자기야, 나만 사랑해!” 후대에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읊는 유명한 기도문 ‘쉐마(shema)’가 되었다.

 

 여러 멋진 남자, 혹은 여자들이 있지만 내 사랑은 자기 하나뿐이라는 훈훈한 순정에 우리는 살 맛을 느끼곤 한다. 누가 보기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여도 우리는 이런 순정에 행복해 한다. ‘유일신 사상(monotheism)’이라 하면 이 우주에 오직 한 신, 그분밖에 없다는 신학적 혹은 종교철학적 설명을 떠올리기 쉽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도 우주에 신이란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사상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애초에 구약성경이 힘주어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사실 위와 같은 호소에 가깝다. 남자가 자기 하나밖에 없어 선택했다는 것보단, 여러 남자 가운데에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마음이 더 애틋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람과 그런 관계이기를 바라셨다. 정확히는 이를 ‘단일신사상(henotheism)’이라 한다.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중에 쫓겨날 때까지 오직 여호와만 믿으며 살아간 적이 거의 없었다. 간헐적인 유일신 신앙 운동이 몇 차례 있었을 뿐, 유명한 솔로몬도 지금으로 보자면 거의 종교 다원주의자에 가까웠다. 하나님의 성전을 역사상 최초로 지어놓고 온갖 칭송은 다 받았지만, 이후 이방 신들을 위한 성전도 열심히 세웠으니 그 칭송이 무색해졌다. 더욱이 하나님은 양다리만큼은 걸치지 말 것을, 자기 아니면 바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이 여자에게 누누이 당부했었다. 남자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참담하게도 이스라엘은 종교 혼합주의를 선택했다.

 

이스라엘, 바알ㆍ아세라와 바람나다

 

 참 궁금하기도 하다. 대체 바알은 얼마나 매력적인 ‘남자’였을까? 바알은 비를 내리는 폭풍우의 신이었다. 농사를 짓던 가나안 토착민들에게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던 신이다. 바알의 형상을 보면 그는 손오공처럼 주로 구름을 타고 다니며 손에 창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사실은 창이 아니라 번개다.

 

 반면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신 분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자기 백성을 따라다니며 사방의 적으로부터 보호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가나안에 와서는 안 해보던 농사를 짓게 되었다. 비가 오지 않아 애가 탈 때면 옆집에 사는 토착민 아저씨의 엄포를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 신 여호와가 전쟁만 잘했지 언제 농사를 지어봤대?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바알에게 와서 무릎을 꿇어!” 원시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만 비가 안 와도 다음 해에는 집단 아사가 닥쳤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고도 바람을 피운 이유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쾌락의 문제였다. 바알을 섬기면 그 당시 남자들은 엉큼한 재미도 볼 수 있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풍요와 생산력(fertility)이 중요했기에 성행위가 제의적인 의의를 지니기도 했다. 성경이 묘사하는 바알 제의는 늘 성적인 쾌락과 연계되어 있으며, 바알 신화에도 성적 행위를 두드러지게 묘사된 부분들이 있다. 어쩌면 ‘성창(聖娼ㆍsacred prostitute)’이 있어서 바알을 섬긴 뒤, 그들이 예배자들과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에 남자들이 얼마나 열렬히, 절대 빠지지 않고 바알 예배에 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된다.

 

 바알 말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심히 섬기던 또 하나의 신은 ‘아세라’였다. 아세라는 여신이며 가나안 최고의 신인 ‘엘’의 사모님이시다. 발굴된 아세라 신상의 모습이 참 인상적인데, 늘 자기의 풍만한 가슴을 양손으로 들어 받치며 자랑하고 있다. 여인의 가슴은 아이에게 젖을 주는 푸근한 모성의 상징이며, 동시에 남자의 눈길을 빼앗는 성적 매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세라의 큰 가슴도 이렇게 풍요와 쾌락을 암시하고 있다. 먹고사는 것 그리고 쾌락, 이 두 가지에 이스라엘 백성은 무너졌다. 지금으로 보자면 돈과 쾌락을 좇다가 인생을 말아먹은 격이다. 기원전 1000년쯤이나 서기 2000년께나 사람을 망치는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오래된 연인, 이제는 제자리를 찾자

 

 그런데 하나님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실까? 한번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간에 비 내리기 시합을 하였는데, 결국 엘리야가 이겼다. 비는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쾌락을 부정하시는 분이신가? 성창과의 관계를 권장하시지는 않겠지만, 성경의 아가서도, 전도서도 마음껏 즐길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신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다. 여러모로 그들은 새 파트너를 원했다. 마치 오랜 연인 간의 일처럼 그렇고 그랬다.

 

 나만 사랑해 달라는 단일신 사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했던 호소였다. 이사야서의 유일신 사상 또한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외침이었다. 신학이나 철학 서적이 말하는 유일신 사상처럼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이 아닌 것이다.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믿음은 누가 잘 설명해 주어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매우 고유한 종교적인,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성서의 이야기도 신은 오직 나뿐이라고 이 땅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지금 교회를 다니며 믿는 사람, 하나님과 사랑의 경험을 나누었던 신자들에게 하는 호소다. 제발 이 세상 살면서 돈 욕심 때문에 혹은 쾌락이 너무 좋아서 고귀한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는 하나님의 애절한 호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시는 훈훈한 순정이다.

 

<출처> 2017. 11. 11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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