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이야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은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히브리어로 적어둔 이스라엘 신의 이름. 알파벳으로는 'YHWH'다. 여호와, 야훼라 읽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무도 모른다.
모세가 신을 만나 존함 여쭈니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우리말 성경 ‘신’ 번역 고심하다 토속신앙이 받드는 ‘하나님’ 돼
못마땅한 선교사들 바꾸려 시도, 참신·상제·천제… 모두 실패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
개신교 ‘유일신’ 신앙적 열정 강조, 서민적 호칭이 기독교 전파에 한몫
내 아버지의 함자는 ‘대’자 ‘웅’자이다. 하지만 한 번도 아버지를 ‘대웅아’라고 불러 본 적은 없다. 막돼먹지 않은 독자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같은 이유에서다. 기도를 할 때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도, 함부로 그 분 성함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었고 심지어 성경을 읽을 때도 그분의 이름이 적혀있으면 그냥 ‘아도나이’라고 발음했다. 그 뜻은 ‘나의 주님’이다.
그 분 성함의 사정은 사실 더 복잡하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적혔는데, 이 언어는 본래 모음이 없었다. 예를 들어 ‘ㅎㄴㄱㄱㅇㄹㅂ’라고 자음만 적어놓고 앞뒤 문맥을 보아 ‘한국일보’라고 읽었던 것이 당시 히브리 언어였다. 이렇게 자음만 있는 이스라엘 신의 이름을 서구의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YHWH’인데, 이 이름 또한 오랫동안 소리 내어 읽지 않다 보니 어떻게 발음을 해야 할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이 자음에 인위적인 모음을 넣어 재구성한 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이다. 진짜 그 분의 성함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모세도 신 이름을 몰라 직접 물어봤다
모세가 이때 얼마나 당황했을까?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고 물어 보았는데 “난 나야”라는 대답을 듣는다면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 건지. “네가 뭔데 내 이름을 알려고 해?” 혹은 “내 이름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라는 뜻인 것도 같은데, 실제로 성서학자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런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 그 분의 성함은 사람 따위가 감히 알 바가 아니라는 거다.
이렇게 한바탕 모세를 바짝 얼려버리시더니, 그러고 나서 신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셨다. 이때 그 이름 ‘YHWH’가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이 이름의 기원에 대한 학설로서, 모세가 그 신을 만난 미디안 지역에서 이 이름이 비롯된 것이라는 가설이 유력했었다.
이스라엘의 신이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들어보자.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애굽기 3:15).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기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아들, 손자, 며느리에게 그 분을 자기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신, 이삭 할아버지의 신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자기네 가족의 신이라는 것이다. 정착민들은 자기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하늘이나 강, 산, 나무 등을 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지역이나 지형과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유목민들은 어디를 가도 자기네를 따라다니며 지켜주는 가족의 신이 중요했었다. 유목하고 방랑하던 경험을 지닌 이스라엘은 신이 낮에는 구름처럼, 밤에는 불처럼 자기네를 따라다니시며 지켜주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호칭은 급진적 토착화의 결과물
이렇게 어렵게 알아낸 그분의 성함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 지 상실하게 되어 무척 아쉽다. 그 분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호칭에 있어서도 우리가 아주 의아해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출애굽기 3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호칭이 참 별난 야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하나님’이란 말은 사실 ‘신(神)’이라는 뜻의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로 적힌 구약성경에는 ‘엘로힘’, 헬라어로 적힌 신약성경에는 ‘떼오스’라는 말인데 이 단어들은 그냥 ‘신’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도 이를 ‘God’으로 번역한다.
우리말 ‘하나님’은 그런데 그냥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민족이 고려시대 때부터 섬겨오던 한 토착신의 ‘존함’이었던 것이다. 기민석이 ‘사람’이라면 여호와는 ‘신’인데, 한국에서는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엉뚱하게 지정한 것이다. 유일신을 외치는 성경이 한국에 와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토착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 토착신의 성함인데 말이다. 재치 있는 누군가는 이렇게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하나님이 성서의 하나님으로 거듭나셨다(born-again)!”
거듭나시기 전 한국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고려시대 때부터 가지고 있던 토착신앙의 신이었다. 조선시대의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에도 이 이름이 언급된다. 5세기 전에는 신교(神敎)와 무교(巫敎) 같은 원시 신앙을 우리네가 주로 믿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막을 여는 7세기 중반부터는 중국에서 건너 온 불교가 흥왕하였고, 15세기 조선시대부터는 유교가 그 뒤를 이었다. 중국에서 건너 온 종교가 당시 메이저급 종교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하나님 신앙은 주요 종교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네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가장 살아있게 믿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다. 진실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섬기던 신이었다. 이는 최남선이 쓴 책 ‘아시조선’(兒時朝鮮)도 잘 증거하고 있는 바다.
언더우드의 고민, 개신교의 열정
그래서 존경 받는 한국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이 문제로 꽤 고심을 하였다고 한다. 성경의 유일신 그 분을, 이방 민족의 신 이름으로 부르는 게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 말고 다른 단어도 많이 시도하여 보았다. 1882년부터 1904년 사이의 한국 성경 번역을 보면 ‘신’, ‘참신’, ‘상제’, ‘천제’, ‘천주’ 등도 후보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갖은 어려움을 뚫고 한국 토속 신앙의 그 분, ‘하나님’이 성경에서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니, 아까 농담처럼 거듭나셨다.
복잡한 그 이름의 사연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성경의 신은 그야말로 한국에 잘 정착하셨다. 역사상 한국처럼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곳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그 호칭을 놓고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양보하지 못한 체 그분을 다르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개신교는 ‘하나님’, 가톨릭은 ‘하느님’으로. 본래 하나님 혹은 하느님은 ‘하늘의 님’이란 뜻이다. 한글 철자의 변천사를 통해 보자면, 문법적으로는 ‘하느님’이 옳다. 그러면 개신교 성경의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다 바꾸어야 할까? 너무 늦었다. 문법적으로 옳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이미 열렬한 개신교도들에 의해 새로운 단어로 탄생하였고 정착해 버렸다.
▲1938년 출간된 '셩경 개역' 첫 페이지. '신'의 번역어로 '하나님'이 정착된 모습이다.
원래 언어에서는 ‘문법’보다 ‘말’이 우선인 법. 그 분은 ‘유일신’이시기 때문에 ‘하나’이어야 한다는 개신교의 신앙적 열정이 문법의 정합을 이겨버린 것이다. 그래도 참 아쉽다. 같은 분을 믿고 있는데 서로 다른 호칭으로 부르니 말이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한다. 히브리어가 모음 없이 자음만 사용한 것처럼, 우리도 그냥 자음만 사용하자. ‘ㅎㄴㄴㅁ.’ 그리고 발음은 알아서 하도록. 물론 싱거운 제안이다.
‘하나님’의 서민성, 민주성
성경의 ‘신’을 우리 고유의 신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이 한국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양반들이 좋아하던 한자 이름이 아닌, 서민적인 언어 한글로 서민적인 신의 이름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란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신이지만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과 소통하고자 사람이 되셨다 한다. 이를 ‘성육신(成肉身)’이라 부른다. 자신을 낮추어 낮은 자와 함께 한다는 정신이다. 마침 성경의 그 분도 한국에 오셔서는 우리 민생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잊지 말아야 할 유산이다. 교회가 더 낮아져 보자.
<출처> 2017. 11. 4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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