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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아픔의 명약, 기쁨이 기다린다면 아픔도 치유될 수 있다

by 혜강(惠江) 2018. 12. 1.

아픔의 명약

 

기쁨이 기다린다면 아픔도 치유될 수 있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나이팅게일이 일하던 스쿠타리 야전 병원의 병실. 아픔은 스스로를 돌보게 하고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게 한다. 윌리엄 심슨(William Simpson) 1856년작.

 

 

고통은 상대적인 것
산모가 산통을 참는 것은 아기의 탄생이 기다리기 때문


처참한 십자가형 당한 예수는 인간의 다시 태어남이란 기쁨이 있기에

고통을 참아

 

 황당한 말이지만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각종 질병이 찾아와도 덜 두려울 것 같다.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다. 몸이 지치거나 아픈 것은, 고맙게도 몸에 이상이 있으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면 혓바늘이 돋고 몸살감기가 걸리는데, 고맙게도 그 아픔 때문에 몸을 돌보아야 할 필요성을 알게 되고 비로소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여 회복에 이른다.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집었는데도 아프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시라.

 

 그래서 고통은 무척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다. 아픈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일부분인 것이다. 매일 점심때마다 배가 고픈 것도 밤이면 잠이 쏟아지는 것도 사실 같은 기제의 병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프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아픈 덕택에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크리스티안 노스럽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병은 적이 아니다. 병은 그냥 메시지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이해다. 탁월했던 사도 바울도 처음엔 병을 적으로 여겼다. 간질로 추정되는데, 그는 이 병이 자기를 찌르는 ‘가시’라고 했다. 심지어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바울은 수많은 사람의 병을 자기 손으로 고쳐주며 성공적인 전도활동을 했던 능력의 사도였는데, 정작 자기가 자기 병은 못 고치니 말이다. 병이 낫고자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번번이 쓰러졌다면 얼마나 민망했을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냉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고린도후서 12:7-10)

 

 그러나 뒤따르는 그의 고백을 보면, 병은 결국에 적이 아니었고 정말로 메시지였다. 그는 병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으로서 심한 모욕과 궁핍과 곤란을 겪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깨달은 바는 ‘사람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가장 강하다는 것’이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지난 2,0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주었는지 모른다. 몸이 아픈 사람이든 마음이 아픈 사람이든 이 가르침에 좌절을 이길 수 있었다. 신앙인이 아니어도 우리는 잘 안다. 아프고 나면 더 성숙하고 강해지는 것을. 바울은 비참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겠지만 아픔에 대한 그의 해석은 많은 이를 위로할 영원한 메시지가 되었다.

 

 심지어 시인 조지훈은 병을 친구로 여겼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에게도 병은 적이었겠지만, 오히려 찾아 올 때마다 쉼도 주고 삶의 가르침도 주기에 그만 정이 들었나 보다. 그에게 병은 애증의 친구였다. 49세 때, 아직 젊은 나이였던 조지훈은 고혈압과 기관지 질환으로 타계한다. 그러나 그 친구로 인한 삶의 외경은 ‘병에게’라는 시로 남아 지금도 많은 이를 위로하고 있다.

 

 

병에 걸린 욥을 찾아 온 세 친구. ‘파리의 시리아 성경’의 화보에 실렸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고통이 모두에게 다 친구 같고 메시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길고 처참한 병고로 인해 가족들마저 피폐해지는 것을 보고 더 고통스러워한다. 치료가 되었어도 병과의 전쟁 같았던 투쟁은 여전히 심리적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병환의 결과로 다리를 잃었다고 하자. 평소에 즐기던 달리기를 못하면 그 박탈감으로 인한 우울증에 또 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에릭 카셀은, 의학은 앞으로 질병의 극복과 함께 환자의 ‘고통’이라는 것을 좀 더 총체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방향으로 진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픈 이들을 위한 사회적 관심과 참여가 더 요구된다. 도우미와 가족, 친구들의 친밀한 협조는 치료 이후에 몰아 닥칠 폭풍을 잠재우는 유일한 명약이기 때문이다.(에릭 카셀, ‘고통 받는 환자와 인간에게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

 

 성서의 욥이라는 인물은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아픈 그에게 가까운 친구들이 오히려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신마저 중병에 들자, 욥은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며 부르짖는다. 이때 그의 친구들이 위로하겠다고 찾아왔는데, 욥은 오히려 마음이 더 상하고 만다. 친구들이 계속해서 욥에게 왜 그런 불행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꽤나 전문적으로 너무나 잘 분석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교통사고를 내어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불구가 된 사람에게 위문을 가서는, 겨울철 차량점검의 중요성과 안전운전 요령을 정성껏 설명하여 주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요새 말로 ‘팩트 폭행’을 당한 것이다.

 

 친구들의 조언이 당시 신앙과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통 받던 욥에게 필요했던 건 설교가 아니었다. 그에 필요했던 건 같이 아파해 주는 것, 그저 말없이 손을 잡고 같이 눈물 흘려주는 것 이었을 텐데. 이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 ‘다모’를 보고 다음의 명대사가 떠올랐어야 하는데 아쉽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나님은 나중에 자신에게 바득바득 대들었던 욥은 옳다고 했다. 그러나 바른 말만 했던 친구들은 옳지 않았다고 선언하신다. 아플 때 비명을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아픈 마음에는 공감의 눈물이 가장 잘 듣는 약이다.

 

 관찰된 바에 의하면 환자들의 고통은 흥미롭게도 상대적이라고 한다. 카셀은 이렇게 말한다. “환자들은 전혀 고통스러울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매우 고통스러울 것 같은 상황에서 담담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할 때 그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고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러한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결국 고통은 환자의 주변이 설정하여 주는 만큼 가해진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아픈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사회적 사명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픈 이들을 위한 우리의 동참은 실질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충분히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이 증거하고 있다. 자신의 살이 찢기는 고통도 쉽게 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아기의 탄생이라는 명약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을 때 느끼는 통증은 엄청나지만 이 때문에 고뇌하는 산모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나의 아내도 온 몸의 뼈를 잡아당겨 벌리는 듯한 산통의 고문을 겪었었지만, 지금 아들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고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면 아픔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고안한 사형 기술이라고 한다. 그 고통을 예감한 예수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이 고통만은 모면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했었다. 인간으로서 예수가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을까? 마침 성경도 같은 상대적 원리를 말해준다. 고통 뒤에 기다리는 기쁨이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브리서 12:2) 참으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 고통 뒤에 ‘다시 태어날’ 인간 때문이었다. 갓 낳은 아기를 자기 품에 안은, 산모의 힘겹고도 행복한 함박웃음을 본 적이 있으신지. 예수는 그런 산모와 꼭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그 고통을 잊게 해줄 기쁨을 그저 흠뻑 주면 안 될까? 아까워하지 말고 말이다. 가족이, 친구가, 나라가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2018. 1. 27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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