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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가을에 찾은 백담사,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에 흠뻑 젖다.

by 혜강(惠江) 2018. 10. 29.


가을에 찾은 백담사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에 흠뻑 젖다.

 

·사진 남상학

 

 

 

   속초로 넘어가기 전에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인 백담사를 먼저 찾았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화려하게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담사를 왕래하는 버스를 탔다.

  백담사에 이르는 7㎞의 계곡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화려했다. 시간이 넉넉하면 걸어가며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곱게 물든 가을의 멋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버스는 좁고 굴곡진 길을 20분쯤 달려 우리를 내려놓았다.  

 

 

 

 

 

  백담사는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진 백담 계곡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백담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곡에 놓인 수심교를 건너야 한다. 수심교를 건너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극락보전이 보이고, 좌우로 화엄실과 법화실이 배치되었다.

  백담사는 신라 시대 세워진 절로서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다고 한다.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백 개가 있어 ‘백담사’라 이름을 붙였다. 그만큼 계곡 깊숙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대부분 그렇듯이,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의 하사품인 옥탑, 설담당 부도, 연포당부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등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백담사가 유명한 것은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라는 점이다. 첫째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출가 사찰이자, 위대한 만해 정신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이 백담사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수도하면서 민족과 국민을 위해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집필에 열중했다.

백담사 앞뜰에 들어서면 먼저 기념관 앞뜰에 세워놓은 시비 <나룻배와 행인>, 그리고 만해의 스님 흉상이 우리를 친근하게 맞아준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는 그 ‘당신’으로 표현된 그 무엇을 위하여 무한한 인내심, 무한한 희생과 사랑의 의지를 보이고 있음에서 그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인욕(忍辱)과 헌신적 사랑의 자세는 바로 그의 불교적 정신이거나 또는 조국애였을 것이다. 

 

 

 

 

 

  백담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ㄱ’자 형의  만해기념관이 있다. 만해 기념관은 만해의 민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기념관 내에는 만해 스님이 백담사에서 불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불교대전》의 원전을 비롯하여 만해 생전의 유묵과 《님의 침묵》 초간본, 만해의 옥중 투쟁 등 항일운동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의 작품 <님의 침묵> 앞에서 30여 년 전 교실에서 이 시에 대하여 꽤나 열강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으로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단호한 그의 자세는 그냥 세태에 휩쓸려 안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교훈이 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진리를 앞세워 조국의 광복을 고대했던 그의 소망은 통일을 바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현실이 아닌가.

 

 

  

  또한 백담사가 역사적 곡절을 지녔다고 한다면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은거했던 절이기 때문이다. 그는 1988년 11월 23일, 대(對)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후 백담사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갔다. 아니, 은거라기보다는 유배 생활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2년여 동안 이곳 화엄실에 머물면서 뼈아프게 ‘인생무상’을 터득했을 지 궁금하다.  

 

 

 

 

 

  이렇게 백담사는 서로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온 두 분 모두를 품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계곡으로 내려서니 흐르는 물가에 세운 무수한 돌탑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소원성취를 염원하는 손길들이 쌓은 것일 게다. 나 역시억겁을 흐르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정결한 물에 더러운 손을 씻고 다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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