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곤돌라 타고 바다로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가수가 된다
이병철·시인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
산마르코 광장에선 여행객들이'햇빛 샤워', 99m 종탑 올려다보며 두칼레 궁전 회랑 걸어
낭만의 해상도시
122개 섬 잇는 400여개 다리… 멋진 풍광이 수상버스를 유람선으로 만들 정도
음악이 흐르는 골목길
빨래 널린 좁은 골목 빨랫줄은 '오선지', 바람에 흔들리는 수건·속옷들은 '음표'
석양 속 곤돌라
뾰족한 뱃머리에 찔려 하늘이 석양 쏟아낼 때, 곤돌라 사공은 역광 속 칸초네를 열창
▲ 해상의 도시 베네치아의 야경. 곤돌라가 지나다니던 수로는 해가 지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위기로 물든다. 2 화려함에 압도되는 베네치아 전통 가면. 3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불리는 산 마르코 광장의 동틀 무렵. / 픽사베이·이병철·플리커
베네치아에 가려거든 이탈리아어를 모르더라도 칸초네 한 곡쯤은 외워야 한다. 당신을 태운 곤돌라가 비좁은 수로를 통과해 아드리아 바다로 나서는 순간, 노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테니 말이다. "Che bella cosa na jurnata 'e sole!(오, 맑은 태양, 너 참 아름답구나!)" 나는 마치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새처럼 '오 솔레 미오('O Sole Mio)'를 종일 흥얼거렸다. 듣기 좋은 미성(美聲)은 아니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음치도 가수가 된다.
산타루치아역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물 냄새가 풍겼다. 지중해 햇살이 과즙처럼 쏟아지는 '물의 정거장'에서 수상버스 '바포레토'에 올랐다. 대중교통마저 유람선으로 만드는 베네치아의 경관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바람에서 '찰랑' 물소리가 나고,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피워 올리는 햇살의 아지랑이에선 잘 구운 파니니 냄새가 나는 듯했다. 색채는 맛이 되고, 빛은 소리가 되며, 소리는 또 냄새가 되는 공감각적 풍경이 내 오감을 활짝 열었다.
▲ 저녁이면 수로 주변은 분위기 있는 식당가로 변한다(위).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나온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며 한숨을 쉬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 이병철·픽사베이
세상의 모든 문물과 사람이 모여들던 중세 해상도시 베네치아,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부른 산마르코 광장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이 햇빛 샤워를 즐기고 있었다. 높이 99m에 달하는 산마르코 종탑을 올려다보며 두칼레 궁전의 아름다운 대리석 회랑을 걸었다. 광장을 산책하는 걸음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천 년 동안 정오마다 낮게 엎드렸을 대성당과 궁전의 그림자가 발바닥에 닿자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졌다.
신선한 치즈와 올리브, 토마토, 루콜라, 프로슈토 햄이 얹어진 화덕 피자와 해물 파스타를 먹으며 토스카나 와인을 마셨다. 바쁜 일상으로부터 멀리 달아난 지중해의 식탁이 아닌가. 파라솔 아래 앉아 두 시간 동안 느릿느릿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걸린 이불 빨래와 게으른 햇살마저 경쾌한 음악이 되는 좁은 골목들을 걸으며 소화를 시켰다. 빨랫줄은 오선지 악보, 바람에 흔들리는 알록달록한 속옷과 수건들이 음표였다. 정말로 어느 집 창문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국의 골목은 몽상, 평화, 그 자체로 완전한 여행이다. 명소보다 나는 그 도시의 가장 좁고 오래된 골목을 더 사랑한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 리알토 다리에 도착했다. 운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16세기 말에 지은 대리석 다리인데,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수많은 사람이 다리에 오르거나 다리가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리 아래 흐르는 푸른 물살이 반사광으로 사람들의 미소를 더욱 빛내고, 곤돌라들은 물 위를 미끄러져 가며 멋진 배경이 되어주었다.
곤돌라에 올랐다. 늙은 곤돌리에(곤돌라 사공)가 노를 저을 때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물소리가 귀를 적신다. 곤돌라가 흔들리는 대로 몸도 흔들리면서 나는 베네치아의 일부가 되어갔다. 뾰족한 뱃머리에 찔린 하늘에서 석양이 터져 쏟아질 때, 빛을 흠뻑 맞은 곤돌리에가 역광 속에서 칸초네를 불렀다. 완전함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이상한 용기가 생겨 답가로 지미 폰타나의 '일 몬도(Il Mondo)'를 불렀다. 영화 '어바웃 타임' 삽입곡인데, 몇 해 전 그 영화를 보고 노래에 매료돼 한글로 가사를 옮겨 적으며 외운 것이다. 곤돌리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좀 민망했지만, 그는 내 노래를 열렬히 칭찬해주었다. 그사이 해가 저물고, 곤돌라는 산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을 등진 채 항구로 돌아왔다.
광장에 어둠이 내려앉고, 부풀어 오른 달이 수로에 육중한 몸을 끼워 넣었다. 불 꺼진 창마다 별빛이 날아가 박혀 지중해의 가장 눈부신 야경을 완성하는 저녁, 가면을 쓰고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광장을 채웠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려한 불빛과 차분한 물빛이 음악 속에 반짝이는 베네치아를 바라보았다. 가판 상점에서 산 스파클링 와인을 들고는 운하 둑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전부 씻겨나갔다.
122개 섬이 400여 개 다리로 이어진 낭만의 해상도시에서, 뚱뚱한 베네치아 고양이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다가 바다와 별을 한꺼번에 들이켜는 황홀감에 그만 취하고 말았다. 술을 마시면 무엇이든 황홀하게 느껴지지 않겠느냐마는, 베네치아의 밤은 유독 더했다. 밤늦도록 마시고 스스로 밤이 되고 바다가 되다가, 물의 도시가 머리맡에 띄워 보내는 파도를 베고 누워 소라고둥처럼 적막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죄수들이 감옥으로 연행될 때 건너면서 "아름다운 이 물의 도시를 다시는 볼 수 없다"며 탄식했다던 '탄식의 다리'를 보면서 베네치아에 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탄식의 여정이 되지 않도록,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산타루치아역으로 향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천에서 베네치아까지 가는 직항편이 생긴다는 소식은 한국에 와서 들었다. 단축된 비행시간만큼 이제는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칸초네 한 곡을 새로 연습해서 가을 베네치아에 가야겠다.
여행정보
아시아나항공은 오는 5월 1일부터 베네치아 직항 노선을 개통한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직항편이다. 신규 취항에 맞춰 특가 항공권 및 추가 마일리지 적립 등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매주 화·수·금 운항.
베네치아에는 매력적인 부속 섬들이 있다.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섬, 세계적 휴양지 리도섬, 형형색색 건물들이 아름다운 부라노섬 등은 수상버스를 통해 갈 수 있다.
음식 저렴하고 한적한 피자·파스타 레스토랑 'Al Garzoti'와 베네치아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Al Mascaron'을 추천한다.
[출처] 2018. 3. 13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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