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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서해

간척으로 넓어진 교동도, 그곳엔 역사가 흐른다

by 혜강(惠江) 2018. 2. 25.



간척으로 넓어진 교동도


발길 이끄는 서해의 섬, 그곳엔 역사가 흐른다  



황두진 건축가



여러 섬이 간척으로 하나가 되면서 교동도엔 저수지도 생겨났다. 붕어로 유명한 바닷가 민물 저수지에는 겨울에도 얼음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개항 전후 외국인들은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혹은 '은자의 왕국'으로 불렀다. 또 다른 별명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천 개의 섬의 나라'였다. 그들에게 조선은 섬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였던 것이다. 별명은 보통 현실을 과장하게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한반도의 섬, 즉 헌법상의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모두 세어 보면 4000개가 훌쩍 넘기 때문이다. 특히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갯벌이 발달한 소위 리아스식 지형으로 불리는 한반도 서남해안이야말로 섬들의 천국이다. 오죽하면 일반명사일 것 같은 '다도해'가 고유명사로 쓰일까.

 그중 하나 교동도는 서해에 있는 섬이다. 그 면적은 47.141㎢로 서울 사대문 안의 3배 정도다. 대한민국의 섬 중에서 19번째로 크다. 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원래는 크고 작은 몇 개의 섬이었다. 이들이 서로 붙어 하나가 된 것은 간척의 결과다. 간척은 새만금 방조제처럼 근대 이후의 소산인 것 같지만, 한반도에서 그 역사는 매우 길다. 고산 윤선도와 그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 등이 가문의 업으로 삼았던 것은 그 하나가 예업(藝業)이고 또 다른 하나가 간척이었다.

 교동도의 경우는 그보다도 역사가 훨씬 길어 고려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고 침략 당시 바로 옆 강화도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인 간척이 시작되었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일은 이후 석모도·주문도를 거쳐 인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까지 이어져 왔다. 사실상 남서해안 섬의 상당수가 그렇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의 너른 벌판들은 자연적인 퇴적이 아니라면 간척으로 섬들이 이어진 결과다.

 한파가 이어지던 이번 겨울의 어느 날 교동도에 다녀왔다. 김포를 거쳐 강화도로 향하다 보니 한강은 물론이고 김포와 강화도 사이 저 유명한 염하(鹽河)마저 얼어 있었다. 유빙이 조류를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떠다니거나 깨진 유리 조각처럼 해안가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강화교(1969)와 이를 대체한 강화대교(1997) 그리고 교동대교(2014) 등이 연달아 놓이면서 이제 교동도는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 길을 황해도까지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다.

 교동도는 역사가 풍부한 섬이다. 최고봉인 화개산 일대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았다는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몇 곳 중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거센 물살 때문에 탈출이 어렵다는 이유로 연산군·광해군 등 많은 왕족이 이 섬에 유배되었다. 삼도수군통어영도 여기 있어서 지금도 남산 포구 근처에 당시 배를 묶어 두던 계류석 하나가 어느 집 담벼락 옆에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근현대로 넘어오면 1926년에 '훈맹정음'으로 불리는 한글 점자를 만든 박두성의 생가, 그리고 황해도 실향민들이 만든 대룡시장 등이 찾는 이의 발길을 이끈다. 섬 곳곳에 쳐져 있는 철조망과 각종 군사 시설 또한 언젠가는 우리 시대의 유적으로 남을 것이다.

 사진 속의 고구저수지는 난정저수지와 함께 교동도의 대표적인 저수지다. 1978년에 설치된 것이지만 자료에 의하면 그 자리는 이미 조선시대에 간척이 이루어진 곳이다. 넓은 의미에서 간척의 흔적이라고 하겠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낚시터일 이곳의 두꺼운 얼음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낚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너머가 바로 바다지만 붕어 같은 민물 어종이 잡힌다. 지극히 현재적인 풍경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건이 중첩된 매우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출처] 2018. 2. 23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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