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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경기 연천 '임진강·한탄강', 붉은 주상절리 하얀 돌단풍꽃 평화 향한 몸짓

by 혜강(惠江) 2017. 4. 20.

 

 

 경기 연천 '임진강·한탄강'

붉은 주상절리 하얀 돌단풍꽃 평화 향한 몸짓

 

 

연천 = 글·사진 박경일 기자

 

 

 

 *경기 연천의 왕림교에서 내려다본 차탄천의 은대리 주상절리. 여기에 차탄천의 물을 끼고 걷는 트레킹 코스 ‘에움길’이 있다. 수직의 직벽을 이룬 주상절리 협곡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물새 떼가 날아오르는 물을 건너가며 걷는 길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수많은 전쟁이 지나간 땅. 여기는 접적 지역인 경기 연천입니다. 분노와 적의(敵意), 그리고 긴장과 대치. 지금 전방지구는 북한의 잇단 도발과 북폭설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아슬아슬합니다. 이런 긴장 속에서 구태여 전쟁의 상흔이 여태 남아있는 접적 지역을 찾아갔던 건 평화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저마다 해법은 다를지라도 평화를 향하는 마음이야 다들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연천은 비릿한 쇳내가 풍기는 거칠고 굵은 것들의 땅입니다. 건너온 역사와 지형으로 미루어보면 연천은 ‘남성적’입니다. 화산 폭발로 이 땅 위에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렸고, 훗날 그 열기만큼 뜨거운 삼국의 쟁패가 있었습니다. 조선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고려 왕조의 죽음이 있었고, 조선 왕조시대에 이곳은 말 달리던 사냥터이기도 했습니다. 녹슨 철조망으로 나뉘어 아직도 지뢰가 남아있는 분단의 최북단인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벚꽃의 물결이 북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연천 땅에도 이제 늦은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민간인통제구역(민통선) 안쪽의 임진강 습지의 버드나무들도 연둣빛으로 물이 한껏 올랐고, 임진강과 한탄강의 주상절리 단애는 돌단풍과 벚꽃의 흰빛으로, 진달래의 붉은빛으로 환합니다. 임진강과 한탄강의 모습은 그저 평화로울 따름입니다.

 긴장의 땅에서 번져가는 따스한 봄기운은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전쟁으로 부서져 뒹구는 것들과 땅에 묻힌 이야기들. 그리고 금단의 공간이 돼서 남아있는 자연. 그 땅에서 만난 평화로운 풍경 하나하나가 새삼스럽습니다. 이쪽의 평화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 연천 땅에서 문득 마주친 삼각형 지뢰 표지판이, 민통선의 초소가 나누는 경계가 너무나 뚜렷해서 일 겁니다. 뒤늦게 당도한 봄볕이 이리도 환한데, 쇳내 나는 경계 너머의 겨울은 언제쯤이나 물러가게 될까요.

 

 

40m 높이의 직벽이 1.5㎞나 이어지는 임진강변의 동이리 적벽. 임진강을 건너동이대교 아래 있다. 강 건너 쪽에서 보면 길게 이어진 수직의 벼랑이 거대한 성벽을 연상케 한다.

 

 

 

# 연천 땅이 특별한 몇 가지



여행이란 무릇 ‘다른 것’을 보는 일. 그렇다면 연천이야말로 특별하다. 생겨난 지형도, 보여주는 경관도 다르고, 경계에 선 긴장감도, 비장한 역사의 무게감도 다르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게 한탄강과 임진강이다. 이 두 강이 펼쳐 보여주는 경관은 다른 강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탄강과 임진강은 대부분의 유역에서 평지 아래로 푹 꺼져서 흐른다. 드넓은 평야 지대를 잘 드는 칼로 ‘썩’하고 잘라낸 듯한 수직의 벼랑. 강은 그 벼랑의 발치에 있다. 너른 들이 펼쳐진 평야가 갑자기 뚝 잘리고 강물이 저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양수기가 없던 시절에는 저 아래 강물을 두고도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에다 물을 대지 못했단다.

  이런 협곡 지형은 강이 흘러가는 연천 땅 어디든 있지만, 보는 이의 입이 딱 벌어지게 하는 곳이 딱 두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임진강변의 미산면 동이리 주상절리다. 동이리 주상절리는 ‘적벽’이라고도 불린다. 벼랑에 물드는 단풍 때문이라기도 하고, 해 질 무렵 기운 해가 벼랑을 붉게 물들여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동이리 적벽은 지도를 앞에 놓고도 잘 알려줄 수 없을 만큼 찾아가는 길이 까다로워서 묻혀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동이대교가 놓이면서 손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적벽은 동이대교 바로 아래 있다. 강물을 따라 일어서 있는 적벽의 높이는 40m에 육박하고, 길이는 자그마치 1.5㎞다. 적벽은 강 돌이 뒹구는 반대편 물가에서 볼 때 가장 압도적이다. 강 건너편에서 직벽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 단애를 이룬 직벽이 함락 불가능한 거대한 성곽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비슷한 경관을 가진 다른 곳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장쾌하다. 거대한 직벽은 그 앞에 선 것들을 한없이 작게 만든다. 마주 선 어마어마한 바위벽의 위용, 그리고 그것을 만든 힘에 생각이 가닿기 때문이다. 

 

# 왕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



  동이리 적벽 위는 조선 초기에 왕이 신하들과 말 달리며 사냥을 했던 ‘가사평’이다. 질퍽한 진흙땅으로 여기를 걷던 중이 넘어져 흙범벅이 된 가사를 벗어놓고 갔다는 곳, 그러나 땅이 얼어 단단해지는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말을 달리기 좋은 땅이었다. 

 세종은 여기서 2만 명에 달하는 신하와 군사를 이끌고 자주 강무(講武)를 했다. ‘강무’란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 수렵은 수단이었고, 강무의 진짜 목적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군사훈련과 군사동원체제 점검이었다.

 세종은 가사평 들판에서 신하들과 말을 타고 이 들을 달리면서 화살을 쏘아 들짐승을 잡았다. 강무 행사를 나섰다가 혹한을 만나 병사 26명과 말 70마리가 얼어 죽는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병들어 쇠약해지기 전까지 강무를 거르지 않았다. 유교와 성리학에 경도된 문약(文弱)에 빠진 문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재위 내내 강무를 반대했지만 세종은 완강했다. ‘군대를 상비하는 국가사를 폐할 수 없다’는 게 세종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을 몰아냈으며 4군과 6진을 설치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대비 덕이 아니었을까.

 세종은 건강이 악화해 궁 밖으로 나설 수 없게 된 재위 25년까지 모두 35차례나 강무를 했다. 온몸에 갖가지 질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면서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은 강무를 하면서 사냥이나 군사훈련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촌로에게 옷을 하사했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게 했다.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백성들의 삶을 돌봤던 성군의 기록이다. 지도자의 이런 덕목을 필요로 하는 게 어찌 그때뿐일까.



#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린 차탄천 협곡



  연천에서 협곡지형의 빼어난 경관을 만날 수 있는 나머지 한 곳이 임진강에 합류하는 차탄천이다. 여기를 찾아가는 것도 다리를 짚어가는 게 빠르다.

 차탄천의 물길을 건너가는 왕림교. 그 다리 아래 차탄천을 끼고 우뚝 솟은 은대리 주상절리가 있다. 동이리 주상절리가 압도적인 경관을 멀리서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여기 은대리 주상절리는 가깝게 그 위용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동이리도 그렇고 은대리의 협곡지형을 이루는 주상절리도 화산이 뿜어낸 뜨거운 용암 위로 지나간 오랜 세월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작은 화산폭발이다. 수십만 년 전, 강원 철원과 평강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분출된 용암은 한탄강 유역을 메우면서 철원을 거쳐 연천, 파주까지 흘렀다. 용암이 급격하게 식는 과정에서 주상절리가 만들어졌고, 그 틈 사이로 강물이 파고들어 깎아내면서 지금의 협곡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왕림교 아래 차탄천으로 내려서면 물길을 거슬러 주상절리 협곡을 따라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를 만나게 된다. ‘에움길’이다. 이 길은 왕림교 아래 좁은 협곡 가운데에서 물길을 이쪽저쪽으로 예닐곱 번 건너가며 용소까지 이어져 있다. 협곡에서는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등 다양한 지형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손으로 만져가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주상절리가 가깝다.

 주상절리 틈에는 지금 순백의 돌단풍 꽃이 만개했다. 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고 늦게 핀 벚꽃도 진달래도 피어 있다. 길을 걷는 내내 백로며 왜가리, 민물가마우지, 물오리 떼들이 푸드득 고요한 수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천변 이곳저곳에 쓰레기가 좀 있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비밀스러운 협곡의 청량한 기운을 다칠 정도는 아니다. 왕림교에서 용소까지는 3㎞쯤. 내내 수면 높이와 비슷한 순한 길이라 왕복 1시간 20분쯤이면 넉넉하다. 



 

민간인통제선 출입 초소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친 마거천 습지의 모습. 민통선 너머의 태풍 전망대는 리모델링 공사로 문을 닫았지만, 전망대 아래 임진강 평화 습지원과 연강갤러리까지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초병과 동행해 들어갈 수 있다.

 

 

 

# 팽팽한 긴장 속의 평화의 풍경 



  연천의 비장한 풍경은 접적(接敵) 지역에 있다. 연천에는 북한 땅을 가장 가깝게 바라볼 수 있는 태풍 전망대가 있다. 1991년에 지은 태풍 전망대는 황산리의 비끼산 수리봉(264m) 정상에 있다. 군사분계선과 가장 가까운 최북단 초소가 있던 자리에 전망대를 세웠다.

 본래 최북단 초소는 군사분계선 남쪽 2㎞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1968년 북한이 철책선을 휴전선 가까이 끌고 내려왔고, 이에 질세라 우리 군도 철책을 끌고 올라갔다. 결국 초소는 휴전선에서 800m 앞둔 곳까지 올라갔고 북한 초소까지 불과 1.6㎞의 거리가 됐다. 그 초소 자리에 태풍 전망대가 들어선 것이다.

 태풍 전망대는 지금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지난달 공사가 시작돼 오는 6월 초에 다시 문을 연다. 공사가 한창인 전망대는 문을 닫았지만, 전망대 들머리인 민통선 내 임진강 평화 습지원까지는 출입할 수 있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출입을 통제하는 초소까지 가는 길에 기막힌 풍경의 마거천 습지도 있다.

 평화 습지원은 임진강 상류에 홍수조절용 군남댐을 건설하면서 두루미 서식지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한 곳. 습지원으로 드는 길목에는 이제야 벚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을 강 건너 습지에는 버드나무들이 연둣빛으로 환하다. 습지원의 평화로운 풍경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접적 지역의 긴장과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이다.

 습지원 한쪽에는 지난해 5월 개관한 연강 갤러리가 있다. 민통선 내 최초의 예술 공간이다. 주상절리를 테마로 한 대형 사진으로 외관이 꾸며져 있고, 1, 2층 전시장과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로컬 마켓, 관광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카페테리아로 구성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한성필 작가가 임진강과 한탄강의 주상절리를 대형 사진으로 담아낸 작품이 걸려 있다. 쏟아져 내릴 듯한 기기묘묘한 주상절리의 규모감이 인상적이다.



# 신라 마지막 왕과 고려 마지막 왕족



  연천에서 생경하게 마주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 뿐일까. 연천의 임진강 하류 쪽에는 고구려가 주상절리의 직벽을 성벽 삼아 지은 호로고루성이 있다.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蘆河)’에다 ‘오래된 보루(古壘)’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성은 임진강의 폭이 넓어지며 수심이 낮아진 자리에 서 있다. 고대국가의 토성 위에서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흘러가는 임진강의 모습을 본다. 칼과 창이 맞서던 전쟁의 자리여서였을까, 때마침 봄비가 내려서 그랬을까. 성 위에 올라서 본 임진강의 모습이 서늘하고 비장하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경순왕릉이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의 죽음이, 지뢰표지판이 걸린 철조망을 뒤로 두고 있다. 선대왕을 강제로 자결시킨 견훤의 선택으로 즉위한 경순왕.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라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과 맞설 힘이 없었던 그는 신라를 고려에 순순히 넘겨줬다. 나약한 군주의 비겁한 선택이란 시각도 있지만, 백성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었다. 경순왕이 죽자 고려 조정은 상여를 막아섰다. 신라 유민들이 장례행렬을 따라 경주로 내려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소요를 우려한 고려는 임진강을 앞에 둔 도성 밖 80리 거리쯤에 경순왕을 묻었다. 신라 왕릉 중에서 경주 밖의 유일한 왕릉인 경순 왕릉이 연천 땅에 있는 이유가 이렇다.

 마지막으로 연천에서 또 한 곳을 보탠다. 조선시대 고려의 왕들을 모셨던 사당 숭의전이다. 고려 왕 4명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은 임진강변의 그윽한 자리에 있다. 숭의전에서 마음이 갔던 건 고려의 사직보다 길가 언덕의 무덤 한 기였다. 무덤은 숭의전을 관리했던 고려왕조의 후손 왕순례의 것이다.

 조선개국 후 고려왕족을 몰살하는 과정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공주 땅에 숨어 살던 왕순례. 사소한 다툼 끝에 이웃의 밀고로 고려왕족임이 발각된 그는 죽음 대신 벼락출세를 한다. 조선이 출범하고 60여 년이 지나 체제가 안정되자 조선 왕조는 고려의 왕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는데, 그에게 벼슬과 농토, 노비를 내리고 사당의 관리를 맡긴 것이었다. 출세도 이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그러나 기고만장한 그는 첩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결국 쫓겨나고 만다. 한 사람의 죽음과 삶, 은둔과 출세, 그리고 탐욕과 추락이 이제 길가의 초라한 무덤으로 남아 덧없다.


▲여행정보

◇ 연천 가는 길 = 서울외곽순환도로 의정부IC로 나가면 국도 3호선이 의정부와 동두천을 지나 전곡까지 이어진다. 전곡읍에서 372번 지방도로를 따라 어유지리 방향으로 가면 동이리 적벽이 있는 동이대교가 나온다. 태풍 전망대는 공사 중이라 문을 닫았지만 임진강평화습지원과 갤러리까지는 갈 수 있다. 습지원과 갤러리도 민통선 너머에 있어 출입절차를 밟아야 한다. 삼곶리 민통초소 앞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초병이 함께 차에 탑승하는데 민통선 안에서는 줄곧 동행해야 한다. 목적지 외의 지역에서는 차에서 내리는 건 물론이고 정차할 수도 없다. 민통선 안에서는 습지원이나 갤러리 못지않게 임진강의 습지 풍경도 훌륭하니 방문지역에 두루미 관찰대를 포함하는 게 좋겠다.

◇ 여행정보 = 오는 5월 3일부터 7일까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전곡읍 일원에서 열리는 연천구석기 축제에 맞춰서 찾아가면 좋겠다. 전곡리 유적은 1978년 동아시아 최초로 구석기시대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 이를 계기로 연천은 올해로 25회째 구석기축제를 열고 있다. 학습형 축제인 구석기축제에서는 한반도의 구석기문화를 포함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구석기문화를 두루 접하고 체험할 수 있다. 대형 화덕에서 구워 먹는 구석기 바비큐가 가장 인기 있는 축제 프로그램. 감자 캐기, 석기로 돼지고기 자르기, 바비큐 굽기 순서로 이뤄진 구석기 바비큐 체험인 구석기어드벤처는 사전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일본, 영국, 독일 등 10여 개국의 해외전문가가 참여해 운영하는 세계구석기 체험마을도 흥미롭다.

이밖에 동굴벽화 그리기, 구석기 활쏘기, 어린이 낚시대회, 구석기 체험존 등 체험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비보이 공연, 7080 가족음악회, 어린이노래자랑, 연천 프린지 공연 등 다양한 공연도 펼쳐지고 연천마당에서는 연천 농특산물 장터도 들어선다. 구석기축제추진위원회 031-839-2562

 

 

 

<출처> 20117. 4. 1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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