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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의 발상지이자 본거지, 안성 - 남사당패 바우덕이의 사당과 무덤

by 혜강(惠江) 2017. 6. 3.



남사당의 발상지이자 본거지, 안성


- 남사당패 바우덕이의 사당과 무덤 -



· 사진  남 상 학




바우덕이 사당 앞에 세운 바우덕이 동상



 안성은 조선시대 남사당놀이의 발상지이자 총본산으로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안성에는 남사당놀이패의 꼭두쇠 바우덕이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전통놀이인 남사당 풍물놀이를 계승하기 위해 설립한 남사당전수관과 공연장이 있어 주말마다 남사당의 신명나는 공연도 볼거리다. 그리고 해마다 바우덕이 축제도 열린다. 그 현장을 찾아나섰다. 


안성과 남사당






조선 후기 마을을 돌며 춤과 노래를 보여주던 떠돌이놀이패인 유랑예인 집단이 있었다. 10여개의 유랑예인 집단 중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꼽히던 남사당패. 남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이들은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곡예, 춤, 노래를 공연했다.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때이며,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남사당패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60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공연을 벌였다. 이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들도 남사당패에 참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담당 업무가 철저히 분화되고 엄격한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기술을 전승하였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 내용을 정하여 기예를 연마하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다니면서 풍물놀이, 줄타기, 탈놀음,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등을 공연하였다. 떠돌이놀이패인 것은 분명하나 전문 예인 집단이었다. 


 




남사당패의 바우덕이




 이들 남사당패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우덕이였다. 바우덕이는 열다섯 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의 신분으로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천재 예인이다.


1848년(헌종 14)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巖德)이었다. 1853년, 머슴으로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당시 다섯 살의 나이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의 남사당패에 맡겨져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었다.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놀이를 익힌 그녀는 특히 소고에 능했으며, 남성들이 주축을 이루는 남사당패 안에서 기·예능이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 민요의 가사만 보더라도 바우덕이는 기·예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만하다. 놀라운 일은 바우덕이가 열다섯 어린 나이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꼭두쇠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만장일치로 새로운 꼭두쇠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뿐만 아니라 워낙 대중적 인기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남사당패는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한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펼쳤다.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그 때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집단인 안성 남사당패에게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준 옥관자(玉貫子)였다. 옥관자는 옥으로 만든 망건(網巾)의 관자로 1품과 3품만이 사용했는데, 1품은 문양이 없는 만옥(漫玉), 정3품은 나팔·매화 등 여러 가지 꽃 문양을 새겨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 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게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우덕이놀이패가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기배(旗拜) 드렸다고 한다.


 그 후 남사당패는 이름이 "바우덕이"로 통칭되었고,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민중예술단으로 전국을 돌면서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바우덕이는 조선 후기의 최고의 예능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어 1870년(고종 7) 23살의 젊은 나이에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바우덕이는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으나, 연예인의 어머니이자 재능 있는 예능인으로 남게 되었다.



바우덕이의 사당과 묘






 바우덕이 사당은 바우덕이가 살던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청룡리 39-1)에 있다. 바로 청룡사 옆이다.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남사당패는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로 시작하는 바우덕이 민요에도 나와 있지만 바우덕이와 안성 청룡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이렇듯 청룡사가 남사당패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본이 분명치 않은 남사당패 구성원들은 절에서 발급한 신표(信標)를 일종의 신분증명서로 삼고 각지를 떠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남사당패는 지금 표현으로 공연 수익금의 일부를 청룡사에 보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다고 남사당패가 꼭 사찰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청룡사는 각종 법회에서도 남사당패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안성 남사당패의 근거지였던 청룡사 맞은편에는 아직도 남사당 마을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바우덕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성 청룡사를 찾아보아야 한다.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 있는 청룡사>






청룡사가 남사당패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 때문

 


 청룡사는 큰 사찰은 아니지만 매우 아름다운 대웅전(보물 제824호)으로 유명하다. 유물·유적으로 청룡사대웅전 외에 청룡사동종(보물 제11-4호), 청룡사3층석탑(문화재자료 제59호), 청룡사사적비(유형문화재 제124호) 등이 있다.


 안성 사당패의 근거지였던 불당골은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靑龍寺)로 들어가는 계곡인데, 사하촌에서 청룡사로 올라가는 왼쪽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부도밭이 나타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 언덕 위에 2005년 지었다는 바우덕이 사당이 보인다.



<바우덕이 사당>









 계단을 올라 담장이 둘러쳐진 마당으로 들어서면 바우덕이 동상이 있다. 바우덕이 사당 터는 경주 정씨 호조참판공파 종중의 기증과 대한불교조계종 청룡사에서 사용 승낙을 함으로써 마련되었다. 작은 사당보다는 사당 옆에 실물을 상상으로 재현한 바우덕이 동상이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조선시대의 예인 바우덕이는 이곳에서 농요,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남사당의 기예를 익히며 자랐을 것이다. 선운사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당은 청룡사를 통과하는 등산객들에게도 인기 많은 장소이다. 



<바우덕이 묘> 


 스물세살에 폐병으로 사망한 바우덕이는 마지막까지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 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바우덕이묘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2 개울가에 있다. 입장 쪽에서 청룡저수지로 올라가다 보면 바우덕이의 무덤을 알리는 푯말이 나타난다. 푯망릉 따라들어가 개울을 건너자마자 묘가 나타난다. 여기서 바우덕이사당까지는 3㎞ 정도의 거리다. . 


 안성시는 무덤 역시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생전의 바우덕이가 줄타기를 하듯 바우덕이의 묘로 오르는 돌계단도 가파르다. 허물어 내린 봉분은 흙을 더 쌓아주었고 없었던 무덤 날개도 마련해 주고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제단석도 갖추었다. 안성 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에서 세운 묘비는 축대 아래 있다. 바우덕이 묘는 2001년 9월 7일 향토유적 38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40년간 식당을 경영한 한 아주머니는 지금의 바우덕이 묘는 실제의 묘가 아니라고 말을 들었다고 한다.  실제의 묘는 언덕 아래 개울가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 장소에는 낮은 봉분의 묘가 하나 있다.    






실제 바우덕이의 묘라 주장하는 또 다른 무덤, 묘비 아래 냇가에 있음


바우덕이 풍물단의 신명나는 공연 인기






 총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는 남사당놀이는 풍물놀이에 사용되는 악기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며 각각의 놀이판마다 재담, 해학, 익살, 사회 비판의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대중화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 마당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1) 풍물(풍물놀이)

  (2) 버나(접시돌리기)

  (3) 살판(땅재주)

  (4) 어름(줄타기)

  (5) 덧뵈기

  (6) 덜미(꼭두각시놀음)


 풍물단원들은 풍물놀이에 사용되는 악기를 배경음악으로 고사굿을 필두로 살판 덧뵈기·버나놀이·어름·상모놀이·북춤 풍물놀이·무동놀이 등을 쉼 없이 보여준다.


(1) 풍물놀이 : 풍물놀이는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 중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길놀이로 시작된다. 신명을 돋우는 일종의 농악으로 공연 시작을 알리고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한다. 공연이 펼쳐질 마당에 도착하면 고사굿을 지내는데 남사당패 중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축원과 고사덕담의 내용을 담은 비나리를 부른다.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24명이 한 조를 이뤄 24판 정도의 판굿을 돈다. 꽹가리, 장구, 북, 징, 소고, 태평소의 악기를 갖고 진풀이·무동(새미놀이)·벅구놀이·채상놀이·선소리 등 다양하고 다채로운 공연을 연출한다. 특히 안성 남사당의 웃다리 가락이 경쾌하고 다채롭기 때문에 그중 으뜸으로 친다. 농악과 다른 점은 관중의 흥미와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육체 연기를 확대한 묘기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버나 : 두 번째 놀이인 버나는 가정에서 곡물을 거르는데 쓰는 채를 돌리기 쉽도록 가죽으로 둥글채 외에 대접을 사용하기도 한다.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담뱃대나 기다란 나무를 가지고 버나를 돌리고 하늘 높이 던지며 받아내는 묘기는 본래 남사당놀이를 시작하면서 구경꾼의 관심을 끌고 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행되었다고 한다.


(3) 살판 : 살판은 다른 말로 땅재주라고 하는데, 살판은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음판이라'라는 말에서‘살판’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시키는 묘기인 살판은 앞으로 걸어가다가 손 짚고 공중 회전하는 앞곤두, 뒷걸음으로 가다가 손 짚고 공중 회전하는 뒷곤두 등 모두 11가지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어릿광대와 꾼이 재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땅재주를 부리는 놀이로 흥이 넘치는 남사당 풍물가락에 익살이 넘친다.


(4) 어름 : 어름은 줄타기 곡예로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줄꾼을 ‘어름산’이라고 하는데, 보통 3미터 높이의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며 매호씨(재담을 주고받는 상대)와 성인 취향에 맞는 재담을 하고, 반주를 하며 추임새를 넣던 매호씨는 그 재담에 맞장구를 치며 흥을 돋운다.


(5) 덧뵈기 : 덧뵈기는 '탈을 쓰고 덧본다'라는 뜻에서 사용된 '탈춤놀이'의 남사당 말이다. 모두 네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남사당의 덧뵈기는 우리나라의 남부·중부·북부지방의 다양한 탈놀이를 종합하여 만들었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풍부하며 사회 풍자가 짙은 것이 특징이다. 덧뵈기는 우리나라 전통 탈놀이와 달리 특정한 지역성과 행사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남사당이 팔도를 유랑하는 유랑예인 집단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폭넓게 일반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였다.


(6) 덜미 :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는 민속인형극인 덜미다.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다. 박첨지놀음, 꼭두박첨지놀음 등의 용어로도 불린다. 덜미는 총 40여개의 인형과 100여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연출되며 각각 독립되어 연관된 2마당 7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덜미는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박첨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지배층인 양반의 어리석음을 은근히 놀려 주는 해학이 짙은 풍자극이다.

 

 인형극은 검은 천으로 가린 놀이 무대인 덜미막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인형 조종자인 ‘대잡이’와 악사로서 관객 쪽에 앉은 ‘산받이’가 서로 재담을 주고받으며 진행된다. 산받이는 등장인물이면서 관중과 같은 입장에 있기도 하기 때문에 무대와 관중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고, 관객들의 참견에 대해 반응하며 공연 당시의 세태풍자를 곁들인다. 약 1시간 20분 정도 공연되는 꼭두각시놀음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으로서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 가부장제 아래의 남성의 횡포에 대한 비판으로 힘 없고 가난했던 백성들이 한바탕 웃고 즐길 수 있게 해주었던 신명나는 놀이판. 남사당놀이는 서민의 마을을 위로하고 시름을 달래주며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전통예술이다. 이처럼 남사당 공연은 해학과 비판이 넘치는 내용으로 조선 후기 지배계층에 억눌려 살던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며 공연을 통해서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혹세무민이자 천한 행동으로 치부되던 비속한 놀이문화를 백성들의 공연예술로 발전시키고 대중문화로 정착시키고 노비보다도 비천한 신분과 여자라는 남존여비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나라의 대중연예를 만들어내는 백성들에게 힘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그 명맥마저 끊길 뻔한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남사당의 근거지이자 생활터전이었던 안성에서 남사당의 후예들이 안성과 서울을 중심으로 남사당의 전통을 끈질기게 이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남사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남사당놀이는 1964년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주말에 남사당 풍물놀이 상설 공연







 안성시는 전통놀이인 남사당 풍물놀이를 계승하기 위해 보존회와 안성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을 만들고 보개면 복평리에 남사당 전수관을 건립했다. 전수관 앞마당에는 야외무대가 있다. 바우덕이풍물놀이는 199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안성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은 일반인들이 남사당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해마다 4~10월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공연을 펼친다.  토요일에는 오후 4시, 일요일에는 오후 2시 시작한다. 


 예전에 남사당놀이는 서민들에게는 환영 받았지만 양반에게는 멸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무 마을에서나 자유로이 공연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기 위해서 곰뱅이쇠가 마을의 최고 양반이나 이장에게 찾아가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협상한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면 ‘곰뱅이 텄다’라고 외치고 풍악이 울리며 남사당놀이가 시작된다.


 남사당놀이는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 가부장제 아래의 남성의 횡포에 대한 비판으로 힘없고 가난했던 백성들이 한바탕 웃고 즐길 수 있게 해주었던 신명나는 놀이판이었다. 요즘에도 풍물놀이만이 지닌 특성을 살려 풍자와 조롱으로 부패한 사회(인물)를 비꼬는 대사로 관람객들의 폭소를 이끌어낸다. 공연일 낮 시간에는 일반 관광객,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전수 체험도 실시한다.


안성바우덕이축제 개최


 또,  안성시는 2001년도부터 해마다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를 기리고 남사당 전통문화의 바우덕이의 예술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2001년부터‘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축제는 2006년부터 유네스코 공식자문협력기구의 CIOFF®의 공식축제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전통을 소재로 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잡고 있다. 축제는 전야제인 길놀이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5일간 다양한 행사를 펼친다.


 






안성에서 민날 수 있는 남사당풍물놀이








 해마다 열리는 바우덕이축제의 거리 행진과 공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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