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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일본

대마도 탐방 : 지정학적, 역사적으로 너무나 한국적인 땅

by 혜강(惠江) 2016. 12. 14.

대마도 탐방

 

지정학적, 역사적으로 너무나 한국적인 땅

 

 

글·사진 남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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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일본어로 쓰시마 つしま 섬, Tsushima Island, 対馬島)는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섬이다. 규슈 본토까지의 최단거리는 약 80 km, 남동쪽 이키 섬까지의 거리는 47.5km이며, 한반도 와의 거리는 약 49.5km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 km, 동서로 18km이다. 본섬과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5개의 섬이 유인도이다.

  본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672년 21대 당주이자 쓰시마 후추 번 3대 번주인 소요시자네(종의진, 宗義眞) 때 작은 배가 아소만과 대마도 동부를 왕래할 수 있도록 오후나고시(대선월, 大船越)이라는 운하를 만들어 두 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1900년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 불리는 더 큰 폭의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두 섬은 다리(만제키바시, 万関橋)로 연결되어 있다. 섬 넓이는 700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34,610명이다. 농경지는 전 면적의 3.4%이며, 대부분이 산지이다.




대마도의 역사

 

 

 

해좌전도(海座全圖)

 

 

   * 신라 시대부터 우리 고유의 영토였다. 그러던 것이, 본국에서 멀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자 열도에서 사람들이  불법으로 건너와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조선에 걸쳐 그들을 토벌하고 다시 경상도 관할에 두었다. 조선의 영토로 그려진 대마도 *

 

 


   삼국시대 초에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대마도는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 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對馬島主)가 일본 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朴威)가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쇼군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외교창구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에 침입했다. 이에 1419년 6월 세종은 이종무(李從茂, 1360∼1425)에게 군사를 내어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이종무는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으로 마산포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진격했다. 이 정벌을 통해 왜구의 배 127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왜구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고 한 달여 만에 철수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국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 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부터 차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었고,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이 폐지되고,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되었으며, 소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 제국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2013년 3월 22일에는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한편 대한민국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한 언론에서 "한국이 쓰시마 섬을 넘본다"라는 기사를 써서 영토 분쟁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산케이 신문에서는 "쓰시마가 위험하다"라는 쓰시마 위기론을 기사로 써 넣었다.

  2008년 일본 정부가 중학 교과서에 독도 관련한 자국 영토 주장을 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한 쓰시마 섬의 영유권 주장을 언급하기도 했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최고의원 허태열은 2008년 7월 16일 한나라당 지도부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유권 주장의 예와 B형 간염 유전자의 유사성을 예로 들며 쓰시마 섬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2010년 9월 28일 대한민국 여야 37명의 국회의원들이 대마도포럼을 창립하였다. 포럼 창립식에서 "대마도는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우리 영토임이 분명하다"며 일본이 불법으로 강점하고 있는 대마도를 조속히 반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실제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고 대마도 주민의 혈통조사에서도 한국 혈통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대마도 영유권 주장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내용을 설립 목적에 분명히 밝히고 차후 정책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을 다짐했다.



 

 


대마도의 볼거리
                

● 남부 시모시마(下島) 이즈하라


  대마도는 크게 북쪽의 히타카즈와 남쪽의 이즈하라로 나뉘는데, 히타카즈는 시골에 속하고 이즈하라는 그나마 도시의 느낌이다. 본토의 동경이나 오사카 등에는 물론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쓰시마 시청이 위치한 이즈하라로 내려오면 제법 큰 쇼핑몰 건물도 있고 갈만한 이자카야 등의 술집들도 많다. 이즈하라의 중심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티아라쇼핑몰은 대형 슈퍼마켓, 식당, 신발가게, 특산물 가게, 일본판 다이소(?) 등이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워낙에 많이 찾는 곳이라서 곳곳에는 한국말로 안내된 표지판도 많이 눈에 띈다.

  이즈하라에는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민속자료를 전시한 역사민속사료관, 1607년 선조 40년에서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며 양국의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조선통신사비,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덕혜옹주결혼봉축비,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 그리고 하치만궁 신사 등이 있다.


시라타케(白嶽.519m)산


  이즈하라 항 북쪽에 자리한 시라타케산은 대마도를 대표하는 산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상부위가 거대한 석영반암으로 이루어져 오래전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왔다. 수행자들이 수련 장소로 즐겨 찾았고 정상 바로 밑에는 신사가 모셔져 있다.  또 대륙계 고산 식물이 혼재한 원시림이 잘 보존돼 있어 일본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돼 있다.

  등산로 갈림길마다 나타나는 표지판과 국내 산악회가 매달아 놓은 표지기 덕분에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정상에 오르면 고즈넉한 아소만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3, 4시간이면 정상에 다녀올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아침에 갔다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산행도 가능하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対馬歴史民俗資料館)


  1978년 12월에 개관한 대마도역사민속사료관은 한반도와의 문화교류 흔적과 옛 대마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대마도여행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 중 하나이다.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선통신사행렬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세운 고려문(高麗門), 12번에 걸친 조선통신사행렬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조선통신사비(朝鮮通信使之碑), 성신지교린비(誠信之交隣碑)가 서 있다.

  자료관에는 한반도양식인 세형동검. 동경 및 한반도에서 전래된 청자와 불상. 대장경 등이 전시돼있다. 가장 유명한 소장품은 폭 27cm 길이 16.58m나 되는 대형 채색두루마리 그림의 조선통신사행렬도이다. 또 일본 최초로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어학습서를 짓고 대마도에 조선어학교를 세우고 조․일 선린외교를 주장한 일본인 학자 아메노모리호우슈(雨森芳洲)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이밖에 부산에 설치돼 있던 초량왜관도,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덕혜옹주와 결혼한 쓰시마번주의 후예 다케유키가  그린 유화,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서 전쟁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거짓문서에 찍었던 가짜조선왕 국새. 대마도 도주가 매일 기록했던 매일기, 조선에서 온 편지, 31명의 화가가 그린 쓰시마 그림도, 쓰시마 야생고양이(야마네꼬), 천연기념물인 살쾡이를 비롯한 6종의 동물박제 등 많은 민속자료, 종가문서, 역사자료, 귀중품 등이 소장되어 있다. 

 

 

 

 


종가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


  타이라 옆을 지나 시청을 지나면 나온다. 조선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의 눈물이 서린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기울어 가는 국가의 왕녀로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는 방문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축복받은 결혼도 아닌데 결혼 봉축이라니 …

​​  덕혜옹주가 19살이던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인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시댁이 대마도였던 셈인데, 결혼식은 도쿄에서 올렸고 덕혜옹주가 대마도를 찾은 건 결혼한 해 단 한 번 인사차 방문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대마도에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가 세워지게 됐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1세 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 7살 때 약혼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일본은 덕혜옹주를 13살 때 도쿄로 강제 유학을 보내 고종황제와 떼어 놓았다. 덕혜옹주는 식민지의 공주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갖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정신질환까지 얻게 됐다. 일본은 그런 덕혜옹주를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과 일본이 완전히 하나의 국가라고 주장했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과 결혼시켰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 역시 갖은 차별 대우와 따돌림을 당하다 어머니처럼 정신질환을 얻었다. 결국, 정혜는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써 놓고 실종되었다.

  그 일 이후 덕혜옹주의 우울증과 몽유병은 날로 더 악화되었다. 1955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했고,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외롭게 수감되었다. 그 사실을 조선일보 기자가 폭로해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귀국시킴으로써 마침내 덕혜옹주는 고국에 돌아왔다. 7년간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탄생부터 결혼, 출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축복받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의 인생. 그와 너무나 상반되는 ‘결혼 봉축’이라는 이름의 비석이 그 삶을 더 기구하게 비추는 듯했다.

 

 


반쇼인(万松院)


  쓰시마 시청에서 걸어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반쇼인은 대마도 지배세력인 소씨 가문의 묘원이다. 반쇼인은 대마도(쓰시마) 번주 종가의 사적으로 1615년에 건립해 1622년에 반쇼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누어져 상단에는 역대 번주와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 하단에는 일족 및 출가한 사람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 3대 묘지 중의 하나로 132개의 돌계단과 400년 넘은 삼나무 세 그루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쓰시마 이즈하라시에 있는 반쇼인 본당에는 쓰시마 도주가 광해군에게서 선물로 받은 촛대, 향로, 화병이 전시돼 있다. 소씨는 신라의 송씨가 물을 건너 소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선사, 최익현 선생 순국비(勉庵崔益鉉先生殉國碑)


  이즈하라 항 근처에 우리나라와 관계가 있는 수선사(修善寺)가 있다. 수선사는 656년 백제 귀족 출신인 비구니가 창건한 구품원이란 암자였으며, 이후에 수선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이 절의 앞뜰에는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연암 최익현(崔益鉉, 1833 ~1906) 선생의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다. 연암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효를 선포하였고  그 조약을 체결한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1906년 체포되어 이곳 대마도로 이송되었고 유배되어 순국하셨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해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1855년(철종 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로 출사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해 대원군이 하야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 웃사람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 비난 상소, 병자수호조약 체결 반대 상소 등으로 제주도·흑산도 등지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상소를 통해 시폐의 시정과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진충보국(盡忠報國)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對馬島)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순국비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수선사 앞뜰에 세웠다.

 

 

 


아유모도시자연공원


  이스하라 남서쪽에 있다. 은어가 돌아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공원은 약 26ha의 넓은 부지를 가로지르는 강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길이 2km가 넘는 산책로엔 무성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트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스포츠슬라이더, 퍼팅 골프장, 방갈로, 캠프장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다양한 수심과 깨끗한 계곡은 여름철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 그만이다. 대마도 깊은 속살을 아유모도시자연공원에 흐르는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서 만날 수 있다.

 

 

 



유타리온천


  쓰시마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또 궁금해하는 것은 온천. 쓰시마에는 타마노유, 유타리, 나기사노유 등 3개의 온천이 있는데 모두가 해수온천이다. 시라타게 산자락의 유타리 온천의 경우 노천탕 시설이 잘 발달되어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입욕료는 1인당 1000엔.

 

 



만제키바시(万関橋)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의 만제키세토 운하에 놓여있는 다리다. 현재의 다리는 3번째 바뀐 것으로 1996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리 볼 것도 없는 길이 30여m 남짓한 철교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다리이다. 흔히 이 다리를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다리’라고도 한다.이 다리는 오오후나코시’(大船越)로는 큰 전함이 대한해협에서 쓰시마 해협으로 이동할 수 없어 1900년 운하를 파고 다리를 놓았으며, 지금 놓여있는 다리는 1975년 새로 구축한 것이다.

  1904년 태평양함대의 전력이 약화된 러시아는 이 지역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유럽의 발틱함대를 극동지역으로 배치하는 작전을 세운다. 유럽 북단의 발틱 해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무려 18,000해리라는 장거리를 이동해야만 하는 작전이다. 이때 일본은 이 발틱 함대의 거동을 미리 파악하고 그 진로를 대한해협이라고 예측하여 주력함대인 1함대와 2함대는 우리나라 진해만에, 3함대는 아소만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발틱 함대는 제주도 남쪽을 경유 블라디보스톡의 태평양함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쓰시마 해협으로 항해를 하고 있었다. 일본의 예상은 빗나갔으나 일본은 이런 상황에 대비한 전략도 미리 구축하고 있었다. 즉, 주력함대는 발틱 함대의 항속에 맞추어 만제키 방향으로 이동하고 아소만에 매복하고 있던 3함대는 쓰시마 해협을 지나는 발틱 함대를 측면과 후면에서 공격한다.

  이렇게 하여 발틱 함대의 시선을 후방과 측방으로 끌어놓고 대한해협에서 아소만으로 들어온 주력함대는 만제키다리를 지나 불시에 발틱함대의 정면을 가로막으면서 함포사격을 일제히 퍼부었다. 당시 천하무적이라던 발틱 함대는 무기력하게 괴멸되었다.세계 해전사에서 너무도 유명한 쓰시마해전이 바로 이 해전이며, 이 해전의 패배가 러시아종말의 서곡이 된다. 만약 이 만제키다리가 없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또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참으로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다리 위에서 거센 조류의 소용돌이를 구경할 수 있다.

 

 

 



● 북부 가미시마(上島)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는 아소만의 수많은 섬이 펼쳐진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발 176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에 그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확 트인 시야는 날씨가 좋으면 우리나라 부산과 거제도를 볼 수 있다. 들쑥날쑥한 해양 지형이 특징인 아소만은 진주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 전망대는 석양과 일출이 아름다워 연말연시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전망대 바로 밑까지 차로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가는 부담도 없다.


와타즈미 신사(神社)


  아소만(浅茅湾) 입구에 있는 해궁(海宮)이다. 본디 일본의 신사는 우리나라의 산신신앙, 칠성신앙 등 무속신앙이 전통신앙과 같이 일본의 신사는 그들만의 민족 신앙인 신도(神道)의 사당이고, 태평양 전쟁 패전 이전까지 일본의 국교가 신도(神道)였다. 신도는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조상의 유풍에 따라 가미(神:신앙의 대상)을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이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과 조상숭배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가미(神)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야스쿠니가 문제가 되는 건 인간을 신격화해 그들을 숭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에겐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그 외엔 특별한 것은 없다.

  와타지마 신사는 우미사치야마사치(海幸山幸)의 신화로 유명한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와 도요타마정(豊玉町)의 유래가 되었으며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신다. 바다에서 신사의 본전(本殿)까지 다섯 개의 도리이(鳥居)는 용궁 전설이 어우러진 신화의 세계를 상상케 했다. 일설에는 수로왕릉을 바라보고 있다고도 한다.

  신사 정면으로 이어진 다섯 개의 도리이(鳥居)는 유일한 수상 신사로 밀물이 들 때는 2m나 바닷물에 잠긴다. 바다에 도리이가 세워진 이유는 바다의 신인 용왕이 2개의 수중 도리이를 통해 육지로 올라와 육지에 있는 도리이를 통과하여 신전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라고 한다. 5개의 도리이는 인간의 5욕(식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성욕)으로부터 해탈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음력 8월 1일 오마쓰리(大祭)가 열리며 봉납 연예(奉納演芸)로 붐빈다. 교통은 쓰시마공항에서 차를 이용한다. 주변에 바이린사(梅林寺), 고릴라섬, 에보시다케전망대, 신와노사토자연공원(神話の里自然公園) 등이 있다.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


  무로마치시대 대마도주 종정무의 집무실로 알려지고 있는 엔슈지(圓通寺)에는 2005년에 건립한 조선통신사이예공적비(朝鮮通信使李藝功績碑)가 서있다. 사찰 정문 오른쪽에 고려종(高麗鐘)이 걸려 있어서 이곳 역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충숙공 이예(忠肅公, 1373~1445)는 조선 전기 일본통신사였다.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 벼슬이 종이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사행(使行)은 조선전기의 18회와 후기의 12회를 합쳐 모두 30회였다. 그는 정사(正使) 또는 부사(副使)로 참여함으로써,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태종‧세종 대에 일본‧유구‧대마도에 40여 회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조일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조일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또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의 사망 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圓通寺)를 찾아 조문하였다.

  공(公)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2005년 2월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다.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요즘 이예의 위대한 업적은 매우 크다 하겠다.



 

 


장송사의 장수은행나무와 미우다 해수욕장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초조대장경'의 인쇄본과 “백제 은행나무”다. 대마도 장송사(長松寺)에는 있는 고려 현종 때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제작한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 그 앞에는 1,500년 전 백제로부터 전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여전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미우다해수욕장은 대마도 맨 위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해수욕장으로 손꼽힐 만큼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부드러운 백사장을 간직하고 있다. 해수욕장이 해변 깊숙이 들어와 파도가 거의 없다. 모래 해변 바깥쪽으로는 잔디가 심어진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 식탁도 여러 개 만들어져 있다. 한여름 복잡한 국내 해수욕장을 피해 한번 가 볼 만하다.

 

 

 

 


박제상 순국비(朴堤上殉國碑)


  한국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가미아가타쵸 사고(佐護) 마나토(湊) 마을에 서 있다. 그야말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라 충신의 기념비이다.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은 신라의 충신이다. 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삽라군(歃羅郡, 지금의 양산)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다.

 

"나는 계림(鷄林·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 왕자 미사흔을 구하고 자신은 붙잡혀 목숨을 잃은 박제상이 자신을 회유하는 왜왕에게 외쳤던 말이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인교 천황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죽었다.

  1988년에 건립된 순국비 주변은 깔끔하게 단장돼 있고, 20여 평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으며 쉼터와 벤치 등 편의시설도 있지만, 인적 없는 황량한 시멘트 포구 앞이라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한국전망대


  그리고 대마도 최북단 한국관망대를 찾았다. 한국의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했고, 모든 자재를 한국에서 가져와 지었다는 전망대였다. 한국 전망대는 거제도까지 49.5KM, 부산까지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니 저 멀리 아득하게 부산이 보이고 거제도가 보였다. 한국전망대 내부 사진전에도 부산 광안리에서 불꽃 축제를 할 때 그곳에서 찍은 야경 사진이 화려하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폰 그대로 한국과 통화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전망대는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쓰시마에 잡혀 온 한국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이나 추석 명절에 올라 한국땅을 바라보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던 곳이다.

  전망대 옆에는 조선역관사순난비가 서 있었다. 이 비는 1703년 108명의 역관사가 탄 배가 부산을 출발했으나 급변한 날씨 때문에 대마도를 목전에 두고 조난을 당해 전원이 사망한 비참한 해난 사고였다. 나라를 위해 타국에서 숨진 이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1991년 세운 추모비라 한다. 비석에는 1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역관사순난비

 

 

 

대마도 거리와 항구, 음식들

 

 

 

 

 

   대마도 여행을 하면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생각이 있다. 지정학적,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영토라는 생각이다. 1948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국제사회 공식 문헌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에 요구해 온 대마도 반환 요구 말이다.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라는 구호 아래 국론을 모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름은 웬일일까. 대마도의 자연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거닐었던 시간 속에 한국 같은 느낌이 절로 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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