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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5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오래된 신발 / 고창남

by 혜강(惠江) 2015. 1. 1.

 

2015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래된 신발

 

-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삽화=변금윤

 

 

[시 당선소감]

 

 

고창남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감사하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살아갈수록 자주 길 밖으로 내몰린다. 내내 앓으면서도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열심히 살아야지, 잘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허공 속 메아리로 현실의 삶을 받쳐주진 못했다.  
 
다만 내 살 속에 기억이란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래의 별들은 들판에 내리는 눈처럼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고 하나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녹아서 사라지기도 하였다. 

누구도 품어주지 못하는 존재감으로 시의 바다를 헤엄쳤다. 병이다. 고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병이다. 이번 수상으로 잠시 쉬어갈 수 있겠다.

포구에서 잠시 쉼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부모님과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내 윤현미, 그리고 사랑하는 예람, 은결에게 감사를 드린다.

탐라장애인종합복지관 활동지원센터 직원들과 장애인활동도우미를 하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이호동 김기평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의 바다로 헤엄쳐 나갈 것이다. 마치 불치병 환자처럼. 오래된 일기장을 편다. 

▶약력 ▷1965년 제주출생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송정보학과 졸업 ▷1999년 제주신인문학상 수상



[시 심사평]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택했다 

 

사진 왼쪽부터 황학주 시인, 김병택 문학평론가

 

새로운 시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설렘은 첫째 새로운 안목에 대한 기대이며 다음으론 시인으로서의 역량이다. 그 설렘을 가장 먼저 겪는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은 행운이랄 수 있다. 2015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수준은 편차가 많았으나 시세계가 다양하고 기대가 되는 시편 또한 적지 않았다.

결심에 남은 작품은 김미경의 '나는 노래를 잘해요', 임경현의 '내 빛바랜 여자', 리호의 '폭설의 카르마', 고창남의 '오래된 신발' 등이다. 이 가운데 '나는 노래를 잘해요'는 4·3 사건을 다루는 문체가 유려하고 이미지의 흐름이 좋으며 무거운 주제에 비해 경쾌한 리듬감이 돋보였으나 감정의 구도가 단편적이고 무엇보다 장시 형태여서 제외되었다. '내 빛 바랜 여자'는 일상적 삶의 낮은 자리에서 대상을 불러내는 차분한 음성을 가졌고 '늦은 점심에 나무그늘 얹는 젓가락 한 쌍'같은 절구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긴장감과 새로움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폭설의 카르마'와 '오래된 신발'이다. '폭설의 카르마'는 중의적인 시적 구조와 남다른 상상력으로 좋은 점수를 얻었으나 주제를 충분히 녹여내지 못해 다소 전달에 어려움을 겪고, 언어에 대한 천착이 당차지 못해 가다만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오래된 신발'은 완성도가 있고 시를 끌고 가는 힘도 안정적이었다.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그만큼 만만찮은 자기 연마의 과정을 짐작케 했으나 우리가 친숙하게 읽어온 '낯익음'의 유형이라는 점 때문에 손을 들어주는데 망설임이 따랐다. 진지한 논의 끝에 두 작품의 장점 중 후자를 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새로운 안목 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을 선택한 것이다.  

당선자에게 기존의 장점에 더해 자신만의 개성적인 발성법을 보다 치열하게 밀고나오기를 당부하며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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