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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괴산 화양구곡, 우암 송시열을 생각하며 화양구곡의 미(美)를 탐닉하다

by 혜강(惠江) 2013. 11. 16.

충북 괴산

 

우암 송시열을 생각하며 화양구곡의 미(美)를 탐닉하다

 

 

남상학

 

 

 

 

 

  선유구곡을 둘러보고 화양계곡으로 향했다.  화양계곡 역시 아름다운 형상을 따라 구곡(九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런데 화양구곡은 이곳 여러 계곡 중 그 품새나 절경이 '갑'이다. 

 

  넓고 깨끗한 너럭바위와 맑은 계류, 우뚝하게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한 폭의 진경산수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양새가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도 「택리지(擇里志)」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절경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이곳에 은거한 뒤부터였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인조 11년(1633년) 27살이 되던 해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로부터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는 칭찬을 들으며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여러 번 벼슬길에 나섰지만, 항상 산천에 뜻이 있어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구곡에 은거하였다. 이때 그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화양동은 원래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이었다. 그러다 우암이 정계에서 물러나 이곳에 살면서 중화의 ‘화(華)’와 일양래복(一陽來復:‘흉함이 가면 길함이 다시 되돌아온다’는 주역 괘의 한 구절)의‘양(陽)’을 따서‘화양동’으로 고쳤다고 한다. 중국을 숭상한 우암의 뜻이 담긴 셈이다. 그는 평생토록 중국 남송 때 성리학자인 주자(朱子)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화양의 아름다운 경치마저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 계곡 경치가 너무 좋아 일찍이 송나라 朱熹가 지은 ‘武夷九曲歌(무이구곡가)’을 본떠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하였다. 주자가 살았던 무이산은 중국 푸첸성(福建省)에 있는 대왕산을 중심으로 한 산맥의 총칭으로 쓰촨성(사천성)과 푸젠성에 걸쳐있다. 구이린(계림)과 비교되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우암은 화양계곡의 아홉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경천벽(擎天壁)·운영담(雲影潭)·읍궁암(泣弓巖)·금사담(金沙潭)·첨성대(瞻星臺)·능운대(凌雲臺)·와룡암(臥龍巖)·학소대(鶴巢臺)·파천(巴串)이라고 붙였다. 특히 가장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는 4곡 금사담 위에 암서재(충북도 유형문화재 175호)가 있으며 우암은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이곳에는 우암을 제향한 화양서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한 만동묘가 복원돼 있다.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우암이 쓴 ‘대명천지(大明天地)’, 만동묘의 어원인 ‘만절필동(萬折必東)’ 등 바위에 새긴 많은 글씨도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암은 이 화양구곡에서 주자와 죽은 효종을 그리며 글로 한을 달래고 흐르는 물로 세월을 잊었다.

 

   그런데 상류의 선유동계곡은 동인(東人)의 종조 퇴계 이황(1501~1570)이 이름을 지었는데, 화양구곡의 이름은 반대 당파인 서인(西人) 계열의 노론 영수인 우암이 한 세기 뒤늦게 지었으니 말이다. 시대가 달라 생전에 만날 수 없었던 퇴계와 우암은 죽어서 두 구곡 사이를 잇는 푸른 물결로 연이 닿아 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화양계곡의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화양구곡의 가경(佳境)을 둘러보기로 했다. 

 

 

   화양구곡 유적지를 두루 돌아볼 때에
   선현을 그리며 그 행적 생각하네

   옥같이 맑은 강에 속된 생각 씻어내고 

   길가의 고운 단풍 나그네 길 늦추네.


   (華陽九曲歷巡時  懷慕先賢踐履思  玉水淸江塵想滌  錦楓滿徑客行遲)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탐방안내센터에서 못 미쳐 250m쯤 떨어져 있다. 차로 가다 보면 대개 지나치기 쉽다. 탐방안내센터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되돌아 나와서 돌아보면 된다. 이 경천벽은 구곡의 첫 관문답게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장관이다.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어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듯 하고 있어 경천벽이라 한다. 우암의‘화양동문’ 글씨가 선명하다.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은 경천벽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다. 탐방안내센터에서 느티나무, 참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거쳐 화양교를 지나 자리잡고 있다.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운영담이라 이름 했다. '운영' 두 글자도 주자(朱子)의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지형상 급류가 잠시 숨을 돌리며 흐르는데, 구름 그림자 대신 잿빛 기암절벽이 건너편에서 호령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사진을 연방 찍어댔다. 잔잔한 옥빛 물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은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를 가리킨다. 우암은이 바위에서 매일 새벽과 효종의 기일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그 이유로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우암은 효종과 함께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청나라를 정벌론)을 도모했다.  정치적 동지였던 효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그의 대업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한이 바위에 서린 것일까? 읍궁암 곳곳에 사람이 앉은 자리 크기의 움푹 팬 데가 여러 곳이다. 

 

 

 

  읍궁암을 지나쳐 몇 걸음 옮기자 길섶 나무그늘 아래 얼핏 스쳐 지나기 십상인 돌비가 하나 서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인 ‘화양서원묘정비’이다. 묘정비란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 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숙종 42년(1716년)에 세운 것이었으나 조선 말기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 조치로 땅속에 묻혔던 것을 광복 이후에 땅속에서 파내어 다시 세웠다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우암이 죽은 뒤 이곳 화양동에는 그를 배향한 화양서원이 세워졌다. 이 서원은 한동안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위세가 당당했다. 노론(老論)의 영수인 송시열의 은거지에 세워진 사액서원인데다 인근에 명나라의 신종(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임금)과 의종(명나라의 마지막 임금)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암은 임진란 때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 만동묘라는 묘명(廟名)은 화양동의 5곡인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에서 따왔다. 


 

 

 

 이 말은 주로 충신의 절개는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상징할 때 쓰는 말로, 곧 ‘대명국(大明國)’에 대한 조선의 ‘신하 된 도리’는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지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던 터라,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처사는 무조건 옳다며 모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나날이 방자해진 화양서원의 유생들은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해 관리와 백성을 불문하고 갖은 수탈과 횡포를 일삼았다. 서원의 요구를 거역할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결국, 이러한 횡포는 훗날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파락호(破落戶) 시절 이곳을 지나다가 크게 봉변을 당한 대원군은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도둑놈 소굴’이라며 철폐해 버렸고, 뒤이어 다른 서원들까지도 문을 닫게 했다. 오늘날 잡초만 무성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의 옛터에는 주춧돌과 계단석, 그리고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영화롭고도 오만했던 옛 시절을 짐작하게 한다.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은 화양구곡의 하이라이트. 물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는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여러 절경 중에서도 가장 풍광이 아름답다. 마치 쏴 하고 화를 낸 것처럼 휘돌아나가는 와류 밑으로 금빛 모래가 융단처럼 깔렸다.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으므로 금사담이라 했다. 그 주변을 집채만 한 바위들이 호위하고, 다시 그 뒤 펑퍼짐한 거대 암반 위에 우암의 독서재(讀書齋)였던 암서재(巖棲齋)가 자리 잡았다. 이 서재도 우이산에 있던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따라 한 것. 우암의 자취를 더듬는 이들에겐 더없이 반갑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 아담한 기와집은 효종 6년(1655)에 처음 세워진 이래로 수차례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저곳에서 우암은 글을 쓰고 술잔을 기울였다. 1666년 8월 우암이 집을 지은 뒤 “시냇가에 바위벽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간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 받들어 한 치라도 더위 잡고 올라보려네.”라고 읊었다. 금사담 계곡 바위 위에 손바닥만 한 터를 잡고 반듯하게 자리한 서재에는 그 옛날 우암의 책 읽는 소리 들리는 듯 물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염계와 낙양을 그리며 동서로 전전하다가

   달 솔 바위와 함께 학을 벗해 살았소    

   끊어진 구름 텅빈 산에서 다시 일어나니 

   금사담 맑은 물 무이구곡 같구나

 

   (望懷濂洛轉東西  與月松巖伴鶴棲  雲斷山空留此興 金沙潭淨武夷齊)  

 

 

 바위 전시장인 암서재 곳곳에 '충효절의' 등 우암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쪽에는 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훤히 열려 있어 화양동 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가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누마루에 앉아서 화양동의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300여 년 전 우암의 포부와 풍류가 오롯이 느껴지는 듯하다.

 

  금사담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별 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의 5곡인 첨성대(瞻星臺)가 있다.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경치도 좋을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다. 이 바위벽에도 글자가 여럿 새겨져 있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하여 명나라에 대한 무한한 신망을 보여주는 송시열의 각자(刻字) 글씨와 숙종 때 판서 민정중이 북경에 갔을 때 구해서 송시열에게 준 것을 새겼다고 하는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不動]’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가 물소리와 함께 유구한 역사를 이어간다.

 

  또, 이곳 첨성대 큰 바위에 새겨진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선조가 임진왜란 후에 쓴 글씨로,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베껴 옮긴 것이다. ‘만절필동’은 중국의 강물이 도중에 한 번을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정통 한족인 명나라를 사대하고 야만 오랑캐인 청을 배척한 북벌파 송시열의 결의를 담고 있다. 

 

 

 

  이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바위인 제6곡 능운대(凌雲臺), 층을 이룬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고 한다. 

 


   높고 높은 산언덕 제각기 층 이뤘네
   대에 올라 굽어보니 흰 구름도 발 아래라.
   푸른 하늘 넓고 넓어 아득히 머니,
   하늘 끝 보고파 다시 위로 오르네.   

  

   (嵬嵬岡巒各作層 臨臺俯瞰白雲凌 蒼穹浩浩千里遠 欲望天涯更上登)



 

   자연의 조화가 아니고는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제7곡인 와룡암은 첨성대(瞻星臺)에서 동남쪽으로 1km 지나면, 궁석이 시내 변에 옆으로 뻗쳐 있어 전체 생김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 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선인이 읊은 그대로다. 


   서린 바위 목욕하는 누운 용 같고,
   붉은 단풍 푸른 솔 나무그늘 짙구나.
   여의주 얻지 못해 남긴 한을 머금고 
   천지의 조화로 화석으로 만들었네.

   (洛水盤巖似臥龍  丹松翠樹陰濃  驪珠未得含遺恨  造化乾坤化石終) 

 

 

  영락없이 바위가 용이 누운 듯한 형상이다. 와룡암 옆에 채운사를 안내하는 간판이 서있다. 채운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도일선사가 창건하고 수도암이라 하였는데 조선 광해군 2년 혜식선사가 중창하고 채운암이라 개칭하였다. 한말 왜병들의 침입으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고,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1948년 홍수로 매몰되자 그 요사채 일부를 이곳에 옮겨 환장사와 채운암을 합쳐 증축하고 채운사라 이름하였다 전한다.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 지나면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다.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 채 여기저기 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천애절벽에 턱걸이를 하듯 겨우 붙어 자라는 솔들이 가련하다. 절벽 아래 소는 깊이를 모를 정도로 시퍼렇다. 한번 간 선학은 간 곳 없고 저무는 빈 산에 사람 흔적 적막할 뿐 가을이 저물고 있다.

 

  이제 화양구곡의 마지막 코스인 제9곡 파천(巴串), 계곡의 끝을 장식하는 흰 바위는 티 없는 옥과 같다 하여 파천이라 불린다. 파천은 학소대 북쪽으로 조금 지나 걸어 오르는 길에서 우측으로 난 길은 따라 내려가서 만날 수 있다. 개천 복판에 티 없는 옥반과 같은 널찍한 바위가 깔려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른다.

 

  200여 평 정도 되는 바위 위에는 2백 명 정도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반석이 오랜 세월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려서 반들반들한 암반을 만들었다. 화양계곡을 찾는 대부분 관광객은 제4곡인 금사담의 암서재까지 보고 화양계곡을 다 보았다고 발길을 돌리기 십상인데, 사실 파천을 보지 않고서 어찌 화양계곡을 보았다고 할 것인가. 

 

 

 

 

<묵을 곳, 먹을 것>  

 

 화양동계곡과 선유동계곡은 속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화양동분소 ☎ 043-832-4347) 내에 있기 때문에 취사와 야영은 원칙적으로 지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계곡을 따라 음식점과 민박집을 겸한 청주식당(043-832-4581), 화양식당(043-832-4392), 정화식당(043-832-4310), 동원식당(043-832-4572) 등의 업소들이 들어서 있다. 음식은 주로 산채비빔밥, 토종닭, 파전, 도토리묵, 민물매운탕 등을 내놓는다.

  전문 숙박업소로는 화양유스호스텔(043-832-8803), 화양파크모텔(043-832-5169), 화양여관(043-832-4365) 등이 있고, 화양동 계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평리에는 미로모텔(043-832-6446)이 있다. 선유동계곡 주변에도 자연휴게소(043-833-8406), 초원식당(043-833-8054), 화송식당(043-833-6954), 은선휴게소(043-833-3871) 등 민박을 겸한 음식점이 있다. 

 

 


<교통>

 

 <버스> 청주여객터미널(043-234-6543)에서는 화양동(시외버스터미널 ☎043-832-4552)을 거쳐 선유동입구인 청천면 송면리(시외버스정류장 ☎043-833-8132)까지 운행하는 직행버스가 7:20~19:30까지 약 1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화양동까지는 약 1시간 10분 소요
 <승용차> 중부고속도로 증평IC→증평읍(34번 국도)→괴산읍 대사리 삼거리(19번 국도, 우회전)→문광삼 거리(49번 지방도, 좌회전)→청천면 덕평리(525번 지방도)→도원교 삼거리(좌회전)→화양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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