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오늘의 의상 -정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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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이정학 기자 luis80@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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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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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풍성한 비유로 우리 시대의 삶에 화두 제시
‘빨대’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새끼 곰에 대한 어미 곰의 모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으나 설명이 지나쳐 시적 형성력을 잃고 말았다.
‘어떤 악기’는 비뇨기과 탁자 위에 꽂혀 있는 ‘오줌 컵’들을 하나의 악기로 파악한 점이 신선하고 기발하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신선함과 기발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이웃의 중력’은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관계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었다. 보통 그 투명함 속에는 냉소적인 차가움이 있게 마련인데 인간적인 따스함이 돋보여 호감이 갔다. 그러나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한 탓으로 더는 심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된 ‘오늘의 의상’은 풍성한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특정한 모임에 예의상 입고 가는 의상을 일컬어 ‘드레스 코드’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특정한 의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은유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종교성에 함락돼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함께 투고한 ‘향신료 상인’이나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 등도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한국시단의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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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름의 골목 지나는 어린 나에게 돌아가고
- 정지우
잠시 쉬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몸으로 시를 써서 왼쪽엔 통점을, 오른쪽엔 고독을 모시고 살았다. 문득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엔 더욱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다. 매번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순간을 지나치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름을 넌지시 위로할 수 있겠다. 무수한 날들, 삶의 전환점을 돌아 어린 나에게 돌아가는 일이 헛되지 않음에 감사한다. 오랜 기다림에 손을 내밀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의 근원이신 엄마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전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언제나 곁에서 독자로 조언과 힘을 실어주었던 남편과 소망을 주는 딸 이주, 이정 그리고 동생 애정이에게 지면을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봉일, 이문재, 이영광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학우들, 목동 문우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힘들 때 벗이 돼주었던 동료 논술 선생님들과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희망을 견디기로 한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 1970년 전남 구례 출생
▲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논술 언어력지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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