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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남해

고흥 녹동항, 아름다운 섬 소록도와 거금도

by 혜강(惠江) 2012. 8. 17.

  

전남 고흥 

 

녹동항과 아름다운 섬 소록도와 거금도

 

 

글·사진 남상학

 

 


 고흥 녹동항(鹿洞港)은 고흥반도 남서쪽에 있다. 국가지정 어항인 녹동항은 항 내수면적 31만 8천3백㎡이며,인근 소록도와 거문도, 백도, 제주도 등 섬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 항구이며 인근 섬에서 생산되는 활어와 김, 미역, 다시마, 멸치 등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 녹동항의 유람선 선착장, 앞에 보이는 섬이 소록도다.

 

풍요로 넘치는 녹동항  

 

 

  인구 1만 5천의 조용한 녹동은 늘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고흥 연근해에서 생산되는 각종 수산물이 어항으로 들어올 때는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녹동항은 1971년 1종 어항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녹동 신항이 건설되어 현재는 구항과 신항으로 나뉘어 있다.

 

 구항에는 녹동재래시장이 들어서 있고, 신항에서는 제주도와 거문도 여객선이 운항 중이며 3000톤급 화물선 7척을 접안시켜 연간 69만 톤의 물량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 녹동항은 인근 섬에서 잡히는 활어와 김, 미역, 다시마, 멸치 등 해산물의 집산지로 풍요가 넘친다.


 

 더구나 녹동항은 벌교-고흥-녹동간 국도 27호선이 4차로로 확장 개통되었고, 소록도에 이어 국내 3번째 큰 섬인 거금도(금산)를 잇는 연륙교가 완공되어 관광객과 물동량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특히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m 전방에 작은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小鹿島)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흥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소록도가 육안으로 사람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선으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소록도는 지금 소록대교가 가설되어 더욱 편리하게 왕래하고 있다.  


 

* 녹동항-소록도 사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1,160m의 소록대교의 위용



  2009년 3월에 개통된 소록대교의 위용은 녹동항이 운치를 더한다. 녹동항-소록도 사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1,160m, 왕복 2차선의 소록대교는 12개의 교각 위에 87.5m에 이르는 주탑 2개가 교량 상판을 매단 케이블을 지탱하고 있다. 조명을 밝히는 밤이면 소록대교는 녹동항의 멋을 한층 멋스럽게 한다.  

  매년 5월에는 녹동청년회의소가 주관하는 "녹동 바다 불꽃축제"가 열리며, 녹동항 근처 어시장과 횟집에서 바람을 타고 오는 바다내음 속에 갓 잡은 싱싱한 생선과 낚지류를 안주로 하는 술맛은 관광객, 연인, 주당들의 아름다운 녹동항에 대한 이미지를 깊게 한다.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小鹿島) 

 


  섬은 낭만이자 한편으론 고립의 장소다. 일제가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모은 것도 격리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격리 대신 소통이 구조화되고 있다. 육지와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는 소통의 상징적인 표시물이다. 이 대교를 건너 사람들이 소록도를 무시로 드나들고 있다.


  소록도 안에 있는 국립소록도병원은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1941년에는 환자가 6천명을 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7백여 명의 환자들이 아주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소록도는 환자 생활지역을 제외한 지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는 소록도는 깨끗한 자연환경과 해안절경,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소록도 중앙공원 등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잘 이룬 공원으로서 고흥의 대표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 소록도 주차장에 옆 바닷가에 마련된 매점 보리피리 휴게소, 매점의 야외 파라솔 사이로 보이는 소록도는 평화스러웠다.  <사진> 좌로부터 김삼봉 교장, 우남일 교장, 오용환 교장이 포즈를 취했다.

 

 

 * 소록도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해안에 조성한 나무데크 길을 따라간다. 자못 경치가 아름답다. 



  

◇근심과 탄식의 장소, 수탄장(愁歎場)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섬 소록도에는 수많은 아픈 역사가 깃들여 있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소나무 숲 사이를 걷다보면 바다처럼 노란색 간판에 새겨진 희뿌연 흑백사진 한 장이 눈을 바늘처럼 찌른다. 비록 천형(天刑)이라 불리는 나병 환자지만, 사랑은 그곳에도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을 부모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1950∼60년대 한센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직원지대의 미감(未感)시설로 보내졌고,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만날 수 있었다. 미감아(未感兒)라고 불리던 자녀들과 한 달에 한번 도로를 경계로 부모 자식 간 슬픈 상봉의 장면이 담긴 흑백사진이다.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하는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 수탄장이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가슴 아픈 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  

 

* 소나무 숲길 옆에, 한 달에 한번 도로를 경계로 부모자식 간 슬픈 상봉의 장면이 담긴 '수탄장' 흑백사진을 담은 간판과 소나무 길이다. 

 

 

 

◇애한(哀恨)의 추모비

 

  방문자들은 소록도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끔찍한 역사의 체험장을 통과해야 한다. 해안 산책로 끝자락에 있는 '애환의 추모비'가 서 있다. 이 추모비에는 끔찍한 사건이 담겨 있다.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자치권을 주장하는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사격을 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84명의 한센인을 죽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우리는 추모비 앞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묵념을 올렸다.

 

 

 

 

◇일제시대의 검시실과 감금실(단종대)

 

  애환의 추모비에서 조금만 진행하면 소록도병원이다. 병원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길로 들어서는 벽에는 소록도를 상징하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국립 소록도병원 본관
골목 옆 건물 벽에 그린 벽화

 

  이 벽화를 감상하며 곧  일제강점기 나병 환자들의 아픔이 그대로 간직된 건물 두 채가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검시실과 감금실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던 곳. 쉽게 말하면 감옥이다. 창살이 있고 방은 시멘트 바닥이다. 변기도 덩그러니 있다. 붉은 벽돌 담 안에 쇠창살을 단 감금실 건물은 교도소를 방불케 한다. 이곳 벽에는 김정균의 ‘감금실’ 전문이 액자에 실려 있다.

 

 검시실에서는 망자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시체를 해부했고, 감금실은 나병을 유전병으로 생각했던 일본인들이 자녀를 낳지 못하도록 강제로 그들의 정관수술을 자행한 단종대가 있다.  형틀에 묶인 채, 고통에 몸부림치던 환자의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곳에 25살의 청년 이종이 단종수술을 받은 후, 통곡하는 심정으로 쓴 시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이 시를 읽다 보면 몸부림을 치며 강제 시술을 받았던 한센 형제들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이 메도록 슬퍼진다. 젊은 시절 읽었던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의 실체를 단적으로 표현한 소설 속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이 망각의 벽을 뚫고 하나씩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소록도를 찾는 나의 발걸음은 여전히 내게는 무겁고 아픔이 동반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원장의 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단종대에 올랐던 젊은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한센인의 '한'(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중앙공원과 한하운 시비

 

 

 절망과 탄식의 장소를 힘겹게 넘어서면, 1930년대 후반 약 6,000평의 너른 대지 위에 연인원 6만명이 넘는 나병 환자가 동원돼 조성한 중앙공원이다. 솔송나무, 황금편백, 공작편백, 실편백, 당종려, 태사목, 섬잣나무 등 갖가지 나무와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진 곳으로 마치 수목원에 온 듯하다.


 검시대와 단종대가 있는 곳에서 불과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만큼 중앙공원에 펼쳐진 숲은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일본, 대만에서 들여온 반송, 나한송, 실편백, 황금편백 등 희귀 수목들이 지천으로 펼쳐져 눈이 부시다.

 

 


  지금은 수목이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었지만 그 시절 아픔을 간직한 역사 기념물이다. 아름답고 멋진 나무 그늘에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앉아 있다. 이제는 나병이 치유된 사람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움은 나병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이룩한 모습이니 그들에게는 안식의 공원(公園)이 아니라, 고통의 공원(恐園)이 아니었을까. 해설자는 말했다. 

 

 “중앙공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는 한센병 환자들의 썩어 문드러진 입술을 타고 저절로 흘러내린 침으로 키워낸 겁니다. 돈 몇 푼으로 값을 매길 수 없지요.”

 

  그래서인가. 기묘한 수목들에 차마 눈을 주기가 민망했다. 공원 중앙에 수형이 멋진 반송들에 둘러싸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육중한 몸을 누인 채 쉬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며 양양한 미래를 시작하던 25세에 다시 악화되어 직장도 그만 두고 숨어들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1949년 《신천지》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외 12편이 실리면서,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로 소개되었다. 〈보리피리〉를 읽다 보면 말 그대로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의 삶과 세월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를 새긴 돌은 악명높은 스오 원장 당시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한센인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으로 때려가며 옮겨놓은 것이다. 이곳 어르신들은 이 바위를 "사토한테 맞아죽으나, 옮기다 깔려서, 혹은 지쳐서 죽으나 어쨌든 갖다 놓기는 해야겠으니 '죽어도 놓고 죽자"고 하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부른다. 일제는 한센인들에게 벌목부터 석재 채취까지 각종 노역을 시켰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는 한센인의 눈물과 땀이 스며 있다.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조성된 공원 곳곳에는 한센인들의 애환이 서린 기념물들이 있다. 중앙공원의 상징인 구라탑(求癩塔)은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워크캠프단이 1963년 세운 기념탑이다. 미카엘 대천사가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탑은 공원에 우뚝 서서 '한센병은 낫는다'고 웅변하고 있다.  해풍이 세차게 불어오자, 울창한 수목들은 바람에 흔들려 온몸을 흔들어댄다. 바위에 새겨진 한하운의 시어(詩語)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람에 실려 수런거린다.  

 

  그러나 눈물로 키워낸 나무들이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록도 주민들의 말로 다 못할 고난을 누구도 달래주지 않았어요. 홀로 삭이며 살아야 했죠. 중앙공원의 나무들은 오히려 그들 주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지요. 나무를 보듬어 안으며 끝내 지워지지 않는 천형의 고통을 씹어 삼켰다고 해야겠지요.”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는 소록도 주민들의 눈에 나무가 들어왔기에 다가섰고, 나무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나누어 준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은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구라탑 뒤편의 세마공적비는 먹먹했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43년간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며 사랑을 실천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비다. 이 두사람은 1960년대 소록도에 들어온 오스트리아 간호사들이다.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3)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82)은 각각 1962년과 1966년에 가톨릭교회  소속으로 처음 소록도 땅을 밟았다. 이들은 한센병 환자들 거주지인 소록도에서 구호활동에 매진한 이들로 공식적인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원봉사자로 남아, 반세기에 가까운 4여년 동안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보살폈다.


  2005년 11월 23일, 소록도의 집집마다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길 원했던 두 사람은 건강 악화로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염려하여 2005년 11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홀연히 섬을 떠났다.


 두 사람이 소록도를 떠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지만, 10년이 지난 2016년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휴먼 다큐 <마리안느와 마가렛>(감독 윤세영·작가 양희·내래이션 이해인 수녀)가 제작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소록도에서 자원봉사자로 40여년 동안간 오직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소록도 생활과 주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생활 모습과 오스트리아 현지 가족들의 인터뷰로 구성됐다.  이 작품은 소록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더해져 다큐멘터리로써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리안느
마가렛
두 간호사가 살던 사택

 

 

요한 바오르2세 방한 기념비

 

 소록도 중앙공원 내  천주교 부지에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하는 자그마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984년에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어디인가?"라고 질문한 후, 소록도에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로했고, 그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은 그간 원생들과 일반인들이 따로 사용했던 선창과 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했다.

당시 교황은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한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의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후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직접 읽어주었다. 

이 천주교 부지는 과거 1940년대, 소록도의 건물을 짓기 위한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한센인들의 애환을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려는 뜻에서 공장을 없애고 작은 연못 위에 성모상을, 그 앞에 자그마한 제대를 만들어서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터를 만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2세 소록도 방문시 마리안느,마가렛 두 간호사가 영접하고 있다.

 

 

한센병박물관

 

 

  소록도에서 마지막 둘러본 곳은  소록도국립소록도병원이다. 이 박물관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2016년 5월 17일 개관했다. 소록도의 역사적 가치 보존, 한센병에 대한 편견 해소, 소록도 사람들의 세상과의 소통을 돕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한센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 있다.

 

  소록도박물관에서는 한센병, 인권, 전이공간, 삶, 국립소록도병원, 친구들 등 6개 주제로 상설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기획전시실, 영상문화센터, 수장고, 어린이도서관, 학예연구실 등을 갖췄다.

 

 

 

 

  소록도에 남아 있는 한센인들은 모두 73세 내외의 고령자들이다. 과거 나병환자였지만 치유가 된 사람들이다. 이제 이 병의 감염률은 제로다. 이 땅에서 이 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과거 앓았던 병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그들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상처로 남아 있었다.

 

 

 

거금도, 풍광이 멋스러운 일주 드라이브

 

  소록도를 나와 소록도와 인근 거금도를 연결하는 거금대교(거금도 연도교)를 건넜다. 이층으로 건설된 다리는 제법 웅장하다. 2km 길이에 167.5m 높이의 2개 주탑, 84개의 케이블이 상판과 연결돼 있다. 거금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최초의 복층 구조라는 점이다. 상층부는 2차선 차로이며, 하부는 자전거와 보행자 도로로 지어졌다. 예전 같으면 녹동항에서 뱃길로 이어지던 섬이었지만 소록도에서 거금대교로 이어지는 거금대교 덕분에 자동차로 거금도에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남도는 점점이 흩뿌려진 섬들의 향연이다.

  거금도(居金島)는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다. 우리나라 섬 중에서 10번째로 큰 섬으로 마치 고구마처럼 생겼다.  거금도에는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있다. 

  가는 길에 1970년대 박치기로 유명했던 프로레슬러 김일 기념체육관이 보인다. 건물은 웅장하다. 본래 거금도 출신인 김일 체육관이었는데 김일 체육 기념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일 선수 생전 레슬링 시합 사진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치기 왕 김일의 모습이 생생하다. 김일 체육 기념관에서 조금 가면 연소 해수욕장이 맞이한다. 연소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해변을 감싸고돌고 있는 전경이 아름답다.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가는 드라이 길은 풍광이 멋스럽게 다가왔다. 날씨가 곧 비라도 내릴 것 같이 흐렸지만 저 멀리 점점이 떠있는 수많은 섬들을 바라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거금도 너머는 완도군이다. 금당도, 비견도, 충도, 금일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 위에 뾰족뾰족 뚫고 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운 해안의 수면 위로는 양식장 부표들이 가득하다. 근해에서 장어·감숭어·전어 등이 잡히고, 김·미역·굴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다. 특히 김 양식은 대규모로 행해진다. 실제로 일주도로를 돌다 보면 한가한 도로변에 미역을 널어 말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돌다보면 익금해수욕장, 금장 해수욕장 등 아름다운 해안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몽돌해안 표지판도 보인다. 마을 앞 아담한 포구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몇 척의 소형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무척 정겨웠다.   

 

  고구마 잎이 푸르게 자라는 남쪽 마을은 생기가 넘친다. 농산물로는 쌀·보리·참깨·고구마·면화 등이 주로 생산되며, 마늘·양파·콩 등도 약간씩 생산된다고 한다. 앞서 녹동항에서 농산물을 육지로 실어 나르는 농협 전용선을 볼 수 있었는데 그만큼 농산물이 풍부하다.

  거금도 한 귀퉁이에서 국도27호선 종점 표지석을 만난다. 물론 종점이라고 더 갈 수 없는 길은 아니다. 길은 거금도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거금대교로 이어진다. 섬은 여전히 그리운 섬으로 남는다.

 

 

거금대교

 

거금도안내도
김일체육관의 건물과 내부전시물
연소해수욕장
익금해수욕장(위)과 익금해수욕장 쉼터에서 바라본 바다
금장해수욕장
예쁜 돌담집
일주도로에서 만나는 양식장
옥룡마을 풍경
오천몽돌해변의 몽돌들
국도27호선 종점 오천항
항구의 모습이 예쁘다.
거금도 특산품 미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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