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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대구의 ‘숨은 속살’ 달성

by 혜강(惠江) 2012. 6. 4.

 

 

대구의 ‘숨은 속살’ 달성

 

흩어진 절터… 아슬아슬 늙은 돌탑… 천년 고독 들려주네

 

 

달성(대구)= 글·사진 박경일 기자

 

 

 

▲ 비슬산 어깨쯤의 능선에는 다 흩어져서 부서진 기왓장만 발끝에 차이는 옛 절집 대견사 터가 있고 그 끝의 암반에는 삼층석탑이 낙동강의 물줄기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아슬아슬 벼랑 끝에 세워진 소박한 석탑 한 기가 마치 마술처럼 풍경에 긴장과 장엄, 그리고 저릿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까마득한 벼랑에 서서 저 아래로 낙동강 물길과 그 물길이 적시고 가는 마을을 굽어 살피고 있는 늙은 석탑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요. 눈과 비, 햇볕과 바람 속에서 이렇게 지나온 세월이 천 년. 허공에 지은 듯 암반 끝의 돌탑 하나가 빚어내는 긴장과 장엄의 풍경 앞에 섰습니다. 탑을 품고 있던 절집은 다 흩어져 기와 조각들만 발끝에 차이는 곳. 여기는 대구 달성의 비슬산 능선, 옛 대견사 절터입니다.

대구광역시라면 누구든 대구시를 먼저 떠올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대구에는 달성군도 있습니다. 대구는 시(市)와 군(郡)이 함께 있는 이른바 ‘도농복합시’입니다. 울산이 울산시와 울주군을, 부산이 부산시와 기장군을, 인천이 인천시와 옹진군을 포함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달성은 그래서 좀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 누구든 ‘대구에 간다’면 그게 대구시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듣지, 달성군에 간다고 들어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대구관역시의 딱 절반쯤 되는 달성 땅에 여간해서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처 몰라봤습니다. 달성이 이렇듯 매혹적인 풍광과 향기 짙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비슬산 어깨쯤에서 석탑 하나만 남겨 놓은 옛 대견사 절터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삼십년 넘게 깃들어 있던 곳입니다. 석탑의 자태 때문에 비슬산의 대견사지부터 이야기를 꺼냈지만, 달성 땅에서 가볼 곳들을 짚자면 끝이 없습니다.

추리고 추려서 골라낸 곳들이 바로 낙동강 물굽이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도동서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선 사육신을 기리는 육신사, 그리고 해당화 향기 그윽한 연못을 거느린 삼가헌입니다. 아 참, 임진왜란 당시 왜병으로 조선 땅에 발을 딛자마자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귀화해 왜군과 맞섰던 귀화 일본인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돌담으로 둘러친 한옥마을 남평문씨 본리세거지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이렇게 달성의 곳곳을 두루 둘러본다면 대구를 빌딩숲의 대도시로만 보는 게 실상은 반쪽의 시선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낙동강의 물굽이와 그 물을 굽어보는 자리에 서 있는 수많은 정자와 서원, 한옥들…. 거기에 깃든 이야기들을 따라나서면 대구가 품은 향기가 맡아지실 겁니다. 삼가헌의 정자 하엽정이 거느린 연못의 수련이 밤새 꽃잎을 닫고 가뒀다가 이른 아침에 뿜어내는 그윽한 향기처럼 말입니다.

 

 

정겨운 흙담길, 소박한 서원… 숨겨진 이야기들 ‘소곤소곤’

 

 

 

▲ 화원읍 본리리의 남평문씨 본리세거지 한옥마을의 황토를 이겨 바른 돌담. 문익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애초에 구획을 정리하고 가지런히 한옥을 앉혀 마을 곳곳에 이처럼 곧게 이어지는 돌담길을 갖고 있다.

 

 

 
# 직설과 은유, 그리고 비움과 채움을 산에서 보다  

 

대구의 명산이라면 십중팔구는 팔공산부터 들겠지만, 대구 남쪽 달성군의 비슬산도 그에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장중함과 화려함, 그리고 낙동강을 굽어보는 자태로 보자면 비슬산이 오히려 더 낫다고도 할 수 있겠다. 대구가 품고 있는 팔공산과 비슬산은 산세는 둘 다 그만그만하지만,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먼저 팔공산. 비유해 보자면 팔공산은 ‘직설적’이다. 팔공산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갓바위부터가 그렇다. 늘 욕망 실현과 구복을 위한 기도가 넘쳐나는 갓바위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 혹은 ‘들어준다고 믿는 대상’으로 산정에 앉아 있다. 거두절미. 팔공산 암봉 끝 갓바위가 보여주는 것은 간명하다. 욕망 실현의 꿈과 구복의 희망이다. 갓바위로 대표되는 팔공산을 찾아가 보면 그런 현세적인 것들로 단단하게 뭉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비슬산은 이와는 좀 다르다. 비슬산에서는 운율과 상징, 혹은 그윽함이 느껴진다. 먼저 그 이름부터가 그렇다. ‘비파 비(琵)’에 ‘거문고 슬(瑟)’. 훗날 불교에 수용된 고대 인도의 힌두신인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琵瑟怒)’에서 왔다. 비슈누는 세 걸음으로 우주를 건너간다는 태양신이다. 태양신을 떠올려 보니 어쩌면 비슬산 어깨쯤에 참꽃(진달래꽃)이 붉은 선혈처럼 피어나 바다를 이룰 때의 모습과 겹쳐진다. 하지만 지금은 봄의 끝. 참꽃은 다 졌고, 몰려들었던 인파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래서 지금 비슬산자연휴양림을 거쳐 대견사지로 오르는 청량한 숲길은 더없이 한적하다.

비슬산의 숲길에는 너덜지대가 곳곳에 있다. 산행 길에 만나는 돌너덜은 영 피곤한 게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흘러내린 돌무더기가 어찌나 길고 웅장한지 흘러내린 바위들이 마치 거대한 강을 이루는 듯하다. 이곳의 암괴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 아슬아슬 암반 끝에 서 있는 석탑에서 그윽한 운율을 느끼다

 

 

 

*대견사 삼층석탑 *

 

 

비슬산이 가진 고즈넉함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옛 대견사 절터 마당 암반 끝에 세워진 삼층석탑이다. 허물어지고 흩어져 간혹 발길에 차이는 기왓장만 그곳이 절터였음을 말해 주는 곳. 시간이 지워 버린 그곳에는 한 기의 석탑만 저 아래 사람 사는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까짓 석탑 하나’쯤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 앞에 서 보면 알게 된다. 우람하다거나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소박한 석탑 한 기가 풍경에 얼마만큼의 긴장과 탄력을 부여하는지를 말이다.

 

구태여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좋겠다. 이런 풍경을 보려면 산 아래서 출발하면 50분 남짓 거리인 대견사지까지만 가도 충분하다. 홀로 서 있는 석탑에서 유장한 산세로, 그리고 산 아래 사람 사는 마을에서 그 마을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로 시선이 차츰 확장되면 모난 마음이 절로 둥그레지는 듯하다. 그래서일 게다. 석탑 앞에서는 어쩐지 딱딱하고 각진 현세의 구체적인 욕망보다는, ‘시간에 대한 경배’나 ‘순한 마음에 대한 갈구’ 같은 부드러운 것들로 두 손을 모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팔공산의 갓바위가 ‘채움’이라면, 대견사지의 석탑에서는 ‘비움’을 본다.

 

지금은 자취도 없지만 비슬산의 대견사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머물렀던 절집이다.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선불장’에서 당당히 장원급제한 일연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이곳 비슬산에 들어 참선 삼매에 들었다. 그후 남해 정림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는 비슬산에서만 이십여 년을 머물렀다.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문 시간까지 합친다면 삼십 년을 헤아린다. 비슬산 암자에 머물던 그는 산길을 넘던 길손들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혹은 기록으로 담아 두었을 것이고, 짐작건대 그게 곧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고승 일연.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보냈고, 떠났다가도 이내 다시 돌아왔던 비슬산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이곳으로 이끈 힘은 어떤 것이었을까.

 

 

▲ 건축을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했다는 도동서원.

 

 

 

 

# 임진왜란의 왜장이 조선인이 돼서 살다

 

 

달성 땅 곳곳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바로 가창면 우록마을의 녹동서원이다. 외양으로 보자면 녹동서원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규모도 작거니와 세월의 묵은 맛도 도대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곳의 특별함은 서원에 모신 인물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상륙했으나 조선의 기풍과 앞선 문물에 감화돼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순한 스물한 살의 왜장이 있었다. 그가 귀순을 결심하고 조선의 경상병마절도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이렇다.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의 나라에 나서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이후 왜군과의 싸움에 여덟 차례나 나가 빼앗긴 성을 되찾아오는 등의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공적으로 그는 정이품 벼슬을 받고 임금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아 ‘김충선’이란 이름을 얻어 조선사람이 돼서 살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조정에서 내린 논밭을 다 마다하고 그는 우록마을에 소박한 거처를 두고 평생을 머물며 학문을 닦았다. 이후 지금까지 그의 후손은 전국에 7000명을 헤아린다. 일본인 사야가, 아니 조선인 김충선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 바로 녹동서원이다. 서원은 보잘것없지만, 달성군이 지난 3일 이곳에 ‘한일우호관’을 세웠다.

 

이쯤에서 대두되는 의문 한 가지. 김충선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우호의 인물이겠지만, 일본인들에게도 그럴까. 한창 전쟁 중 적에 투항한 그를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역자나 ‘천하의 매국노’쯤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념관에 ‘한일우호’의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실제로 김충선은 오래도록 일본 역사학자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녹동서원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김충선의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면서 그는 일본에서 ‘천하의 매국노’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했다. 이후 녹동서원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 옛집과 그 집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

 

 

*사육신을 모신 사당 육신사 *

 


달성을 찾아갔다면 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하빈면 묘리의 육신사다. 육신사란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다가 죽임을 당한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여섯 신하 즉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다. 사실 이곳은 사육신의 고향도, 연고지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사당이 세워져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사육신은 멸족을 당했다. 스스로 죽임을 당한 것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화가 미쳤다. 사내라면 모두 몰살을 당했다. 여자들은 모두 관비로 보내졌다. 아예 후손을 잇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박팽년만 가문의 대를 이었다.

피바람이 몰아쳐 가문의 사내란 사내는 다 죽임을 당한 뒤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친정집이 있던 영남관아 소속 관비로 내려왔다. 며느리는 태중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낳은 아이가 사내라면 가차없이 죽임을 당할 처지. 그런데 그만 사내아이를 낳고 말았다. 때마침 친정집의 여자 종도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며느리는 종의 아이와 바꿔 쳤다. 딸을 낳았다고 했으니 죽임을 면한 것이다. 그렇게 박팽년의 가문은 아슬아슬하게 대를 이었고, 그때 태어난 박팽년의 손자가 바로 육신사가 있는 하빈면 묘리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런 연유로 육신사가 이곳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육신사는 이른바 ‘관제(官制)’의 냄새가 나는 다른 유적지와는 다르다. 짙은 숲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데다 일대의 마을 전체가 한옥마을로 꾸며져 있어 운치가 넘친다. 눈길을 끄는 곳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다.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는 뜻밖에도 관리의 손이 잘 닿지 않고 있다. 

 

육신사에서 자그마한 야산을 넘어가면 이조참판 벼슬을 했던 박팽년의 11대손이 터를 잡아 세운 고택 삼가헌이 있다. 삼가헌은 거느리고 있는 누각 하엽정의 그윽한 정취가 그만이다. 연꽃을 심은 연못 주변에는 지금 창포와 붓꽃, 작약꽃이 한창이고 누각 아래 흰색 해당화가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초여름의 녹음 속에 부채 하나 들고 누각에 올라앉아 연못을 바라본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듯하다.

이 밖에도 달성에서는 성리학의 흐트러짐 없는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했다는 도동서원의 품격 있는 아름다움과도 만날 수 있다.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다람재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변의 도동서원 모습은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름답다. 기호사림파의 거두였던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은 좌우대칭의 엄격한 원칙을 지키며 지어졌다. 곳곳에서 이런 원칙들이 엿보이는데, 특히 기단에 돌을 쌓은 정성 어린 솜씨만으로도 경탄스럽다.

여기에다 문익점의 후손들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흥사 절터 자리에 일군 마을인 ‘남평문씨 본리세거지’도 들러볼 만하다. 마을을 들이기 전에 구획을 정리하고 재실과 살림집, 마을 안길을 계획해 세운 한옥마을은 긴 돌담과 한옥의 정연한 아름다움으로 치장돼 있다.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길게 이어진 돌담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의 태엽을 감아 조선시대쯤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달성 가는 길 · 묵을 곳 

 

 

달성 가는 길=달성의 육신사와 삼가헌은 대구의 서북쪽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왜관나들목으로 나와 공단삼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금산교차로에서 대구·성주 방면으로 좌회전해 낙동강을 오른쪽에 끼고 달리다 보면 육신사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비슬산의 대견사지 석탑에 오르려면 비슬산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삼는 게 좋다. 중부내륙고속도로 현풍나들목으로 나가 현풍·비슬산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좌회전해 휴양림으로 들어서 차를 세워 두고 숲길을 오르면 된다. 현풍나들목으로 나와서 이방·구지 방면으로 우회전해 구지면 소재지를 지나 구지서로에 접어들면 낙동강변에 있는 도동서원을 만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가족여행이라면 비슬산자연휴양림(053-614-5481)을 추천한다. 달성은 숙소 사정이 그리 여의치 않다. 대구시의 남쪽인 가창면 삼산리 쪽에 모텔촌이 있지만 좀 낡은 편이고, 성서공단 쪽에도 모텔 밀집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유흥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가족여행객들이라면 아예 대구시내로 들어가서 숙소를 찾는 게 더 낫다. 대구에는 호텔인터불고 대구와 노보텔앰배서더 대구를 비롯해 엘디스리젠트호텔, 호텔대구, 대구그랜드호텔 등의 수준급 숙소가 있다.

달성의 화원읍 천내리의 ‘교동면옥’(053-634-9222)은 편육 대신 육전을 고명으로 올리는 진주식 냉면을 내는 맛집이다. 대구시내까지 제법 이름이 나있다. 만두와 떡갈비 등을 곁들여도 좋다. 유명세로 보자면 달성에서는 현풍의 곰탕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다. 현풍면 성하리 인근에는 원조 현풍할매집곰탕(053-614-2031) 등 곰탕집들이 몰려 있다. 국물맛이 진하고 수육도 실하게 넣어준다. 현풍 5일장에서 맛볼 수 있는 장터의 수구레국밥 전문점인 신현대식당도 놓치기 아쉬운 맛집이다. 수구레란 쇠가죽 바로 아래서 발라낸 질긴 부위를 일컫는다. 잘 차려진 밥상을 받고 싶다면 고속도로 현풍나들목 인근 구지농공단지 부근에 있는 궁중약선한정식을 내는 ‘무궁화’(053-614-8833)를 추천할 만하다. 

 

 

<출처> 2012. 5. 23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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